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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분계층 간의 평등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5. 17. 19:45

     

    완전히 발전된 하나의 전체를 이룬 문화 시대는 국가적 공동 생활, 종교, 예술, 학문 등으로만 표현되지 않고 사교 생활에도 뚜렷한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중세는 나라에 따라 별로 다르지 않은 궁정과 귀족들의 풍속과 예의, 그리고 중세 특유의 중간 계층을 만들어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풍속은 가장 중요한 점들에서 이와 대립되고 있다. 우선 그 기반이 다르다. 고급 사교계에서 신분상의 차별이 없어지고 현대적인 의미의 교양 계층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떤 출신인가 하는 것은 상속받은 재산과 보장된 여가 시간 같은 것과 관련될 경우에만 영향력을 가졌다. 이것은 물론 절대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중세의 계급 범주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여전히 유효한 상황이었고, 비록 이탈리아 바깥의 유럽 국가들에 주로 한정되었지만 어쨌든 외국의 귀족 계층과 일종의 계급적 유대 관계가 존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라는 의미에서 신분의 해체는 분명히 이 시대의 일반적인 특징이었다. 

    이것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는 우선 적어도 12세기 이후로 도시에서 귀족과 시민이 공동으로 거주하게 된 점을 들 수 있다. 그럼으로써 공동의 운명과 오락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시민과 격리되어 성에서 바라보는 세계관은 아예 형성 단계에서 방해를 받았다. 둘째로 이탈리아에서 교회는 북부 유럽의 경우처럼 귀족 계급의 맏아들들을 위한 연금 지불처 노릇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주교구들, 성직자 협의회 직급들, 수도원장 자리들은 종종 극히 기묘한 이유에 따라 주어지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 혈통에 따라 배분된 적은 없었다. 주교들이 훨씬 더 수가 많고, 훨씬 더 가난하고, 보통은 온갖 세속적인 영주 자리와는 완전히 무관하였지만, 그 대신 그들은 주교좌 성당이 있는 도시에 살았다. 그러면서 주교좌 성당 참사회와 함께 도시의 교양 시민계층의 한 요소가 되었다. 이어서 절대 군주들이 나타났을 때 대부분의 도시에서 귀족 계급은 정치적으로 위험이 없고 온갖 섬세한 삶의 즐거움들로 장식된, 근본적으로는 부유한 시민과 거의 구별이 되지 않는 사생활의 영역을 얻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단테 이후로 문학이 모든 사람의 것이 되었을 때, 고대적인 의미에서의 교양과 인간 자체에 대한 관심이 거기 덧붙여지게 되었을 때, 그리고 용병대장들이 영주가 되고, 순수한 귀족 혈통 및 정식 결혼에 의한 출생만이 왕좌에 오를 자격을 인정받는 일이 중단 되었을 때에 평등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귀족이라는 개념은 완전히 사라졌음을 믿을 수 있었다. 

    고대를 인용하는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 한 사람만 인용할 경우라도 귀족 계급의 개념을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단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귀족(고귀함)이란 탁월함과 물려받은 부에 근거한 것"이라는 정의에서, 귀족이란 자기 자신의 탁월함이나 혹은 조상의 탁월함에 근거한다는 자신의 정의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다른 자리에서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신곡>의 천국편에서 조상인 카치아귀다와 이야기할 때에 고귀한 혈통을 들먹였다는 이유로 자신을 질책하였다. 혈통이란 당사자가 매일 새로운 가치를 거기 덧붙이지 않는다면, 시대가 언제라도 벗어버리는 외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향연>에서 그는 고귀한nobile 이라거나 고귀함nobilta' 이라는 개념을 출생 조건에서 거의 완전히 분리시켜서 도덕적, 지적인 탁월함과 동일시하였다. 여기서 '고귀함'이란 철학과 자매개 된다는 말을 통해서 높은 교양이 특별히 강조되었다. 

     

    The School of Athens, Rafaello 

     

     

    이어서 인문주의가 이탈리아 사람들의 사고를 철저하게 지배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더욱더 분명하게 출생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5세기에는 이미 이것이 지배적인 이론이었다. 포지오는 대화 <고귀함에 관해서>에서 대담자들과 - 니콜라 니콜리와 위대한 코시모의 동생인 로렌조 메디치 - 함께 개인적인 공적 이외에 다른 고귀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합의를 보고 있다. 통상적인 선입견에 의해 귀족적인 삶이라고 여겨지던 많은 것들이 극히 날카로운 표현들로 풍자되었다. "조상이 대담한 악행을 오래 저질렀을수록 진정한 귀족성에서는 더욱더 멀어진다. 매사냥과 사냥에 열중하는 일은 짐승들의 둥지가 향내를 풍길 수 없듯이 귀족 냄새를 풍기지 못한다. 고대인들이 열중했던 농사짓기가 숲이나 산지를 쓸데없이 돌아다니는 일보다 휠씬 더 고귀한 일이 될 것이다. 그렇게 돌아다니는 것은 짐승들과 같은 행동이다. 그런 것은 오락은 될 수 있을망정 삶의 업적이 될 수는 없다" 시골이나 숲의 성에서 보내는 프랑스와 영국의 기사 생활이 전혀 고귀하지 못한데, 하물며 도이치의 도둑 기사는 말해 무엇하랴. 로렌조는 여기서 어느 정도 귀족 편을 들지만 타고난 감정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 아주 특징적인 일이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 제 5권에서 귀족 계급을 인정하고, 탁월함과 물려받은 부에 근거하는 존재라는 정의를 내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니콜라 니콜리는 이렇게 답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확신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의견을 말하고 있다. 그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윤리학>에서 그는 참된 선을 지향하는 사람을 가리켜 고귀하다고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로렌조는 그리스어의 귀족Eugeneia 이란 말은 좋은 태생을 뜻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지만 아무 소용도 없다. 니콜로 니콜리는 라틴어로 귀족nobilis,즉 주목할 만한 존재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 이 말은 귀족을 그의 행적과 연관시키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런 토론말고도 이탈리아 여러 지역에서 귀족의 위치가 다음과 같이 그려지고 있다. 나폴리에서 귀족은 게으른 존재로서, 자신의 영지를 관리하지도 않고, 힘든 일로 여겨지는 무역에도 종사하지 않는다. 집에서 빈둥거리거나, 아니면 말이나 타며 지낸다. 로마의 귀족은 무역을 경멸하지만 자신의 영지는 손수 관리한다.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는 물론 귀족의 칭호가 당연히 열려 있다. "농사짓는 일이긴 하지만 존경할 만한 고귀함"인 것이다. 롬바르디아에서도 귀족들은 물려받은 영토의 수입으로 산다. 여기서는 혈통과, 통상적인 일을 안 하는 것이 귀족으로 통한다. 베네치아에서 고귀한 사람들, 곧 통치 계급은 모두 무역에 종사한다. 제노바에서는 귀족이나 귀족이 아닌 사람들이나 모두 상인이고 뱃사람이며, 오직 출생만 구별이 된다. 일부 귀족들은 물론 산 속의 성에 숨어서 산적 노릇을 한다. 피렌체에서 옛날 귀족의 일부는 무역에 종사하였다. 다른 일부는 - 휠씬 적은 숫자였다 - 자신의 신분을 기뻐하고 오로지 사냥과 매사냥에만 열중하였다. 

    거의 이탈리아 전지역에서, 자신의 출생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이라도 교양과 부유함에 맞서서 오만할 수가 없었다는 것, 그리고 정치적 우선권 혹은 궁정에서의 우선권을 통해 더 높은 계급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는 것은 결정적인 사실이었다. 이렇게 보자면, 귀족의 삶이 철저히 시민의 생활과 같고, 오직 몇가지 명예로운 권리에서만 우선권을 가졌던 베네치아는 겉보기에만 예외였다. 물론 나폴리는 사정이 달랐다. 나폴리는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나폴리 귀족의 엄격한 신분 구별과 화려함의 욕구를 통해서 르네상스의 정신적 운동과 단절되어 있었다. 중세의 롬바르디아 및 노르만 통치와 그 뒤를 이은 프랑스 귀족 계급의 강한 영향을 늦게까지 받은 데 덧붙여서, 15세기 중엽 이전에 벌써 아라곤 지배 계급이 이곳에 들어왔다. 그것은 1백 년 뒤에야 에스파냐 지배를 받게 되는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보다 훨씬 이른 것이었다. 삶은 부분적으로 에스파냐식으로 변질되었다. 그 가장 중요한 요소는 노동에 대한 경시와 귀족 호칭에 대한 열망이었다. 그 영향은 1500년 이전에 이미 작은 도시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카바 수도원에서는 이런 탄식이 나온다. 이곳은 벽돌공과 직조공들만 살던 동안에는 부유한 지역으로 널리 알려졌었다. 그러나 벽돌공의 연장과 직조공의 의자들 대신에 박차와 등자 금을 입힌 혁대를 보게 되고 누구나 법학 박사나 의학박사, 공증인, 장교, 기사 등이 되려고 애를 쓰는 세상이 되자 가장 끔찍한 빈곤이 이곳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피렌체에서는 코시모 대공 치하에서(1569~1574) 비로소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무역과 다른 직업을 경시하는 젊은이들을 자신의 성 스테판 기사단 기사로 받아들인 것은 주로 그의 덕분이었다. 그것은 아버지들이 아들들에게 근면함을 상속의 조건으로 내걸었던 초기 피렌체의 사고 방식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서 15세기에 베스파시아노 피오렌티노가 부자들은 자신들이 물려받은 재산을 늘리지 말고 모든 수입을 전부 지출해야 한다고 말했다면, 그것이 피렌체 사람의 입에서 말해지는 한 대지주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었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야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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