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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꿰첸토의 고전주의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5. 12. 22:54

     

    1504년 라파엘로가 피렌체에 왔을 때는 로렌조 메디치가 죽은 지 10여년이 지났고 그의 후계자도 추방되었으며 도시장관이었던 피에트로 소데리로가 이 공화국에서 다시 시민정권을 세운 뒤였다. 그러나 궁정적, 형식적 예술양식으로의 전환은 이미 이루어졌고 새로운 예술 취미의 기준도 정립되어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니까 예술발전은 외부로부터 아무런 새로운 자극을 받지 않고도 기왕에 전개되고 있던 길을 따라 그대로 나아갈 수 있었다. 라파엘로는 페루지노와 다 빈치의 작품에서 이미 제시된 방향을 그대로 따라하기만 하면 되었고, 창조적인 예술가로서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초시간적, 추상적 형식규범을 지향하고 있던 점에서 본질적으로 보수적이지만 당시의 양식사적 발전경향에 비추어본다면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일반적 추세에 그대로 합류하는 일뿐이었다. 하지만 라파엘로를 이러한 예술방향에 묶어두게 한 데에는 외부적 자극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단지 이러한 자극이 이제는 더이상 피렌체 자체에서 나오고 있지 않았을 따름이다. 피렌체 이외의 대부분의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왕가적인 생활수준과 궁정적인 생활양식을 누리는 세도있는 문벌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로마에서는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본격적인 군주적 궁정이 형성되었는데, 이 궁정에서는 군주들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예술과 문화를 사용하던 다른 궁정에서와 동일한 사회이상이 지배하고 있었다. 

    예술중심지로서의 로마

    로마 교황청은 완전히 분열된 이탈리아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교황들은 자신을 로마황제의 후계자라고 생각했고, 또한 당시 이탈리아 전역에서 싹트고 있던 고대 로마의 영광을 부활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꿈과 기대를 자신들의 권력확장에 이용하는 데 부분적으로 성공하기도 하였다. 로마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그들의 정치적 야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로마는 서구문화의 중심지가 되고 유럽의 정신계를 좌우하는 강력한 영향력을 획득하였으며 이러한 영향력은 반종교개혁운동 기간에 더 심화되었고 바로크 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교황들이 아비뇽으로부터 로마로 돌아온 후, 로마는 기독교를 믿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대사나 공사들이 몰려들어 외교의 중심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당시의 사정으로는 엄청난 액수의 돈이 들어오고 나가는 중요한 금융시장이 되었다. 교황청은 재력에서 북부 이탈리아의 모든 제후와 참주, 은행가와 상인들을 훨씬 능가하였다. 교황청은 이들보다 더 많은 돈을 지출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피렌체가 쥐고 있던 예술시장의 주도권을 물려받았다. 교황들이 프랑스에서 돌아왔을 때의 로마는 야만민족의 침입과 수세기에 걸친 로마 세도문벌가 사이의 불화로 인한 파괴때문에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로마인들은 가난하였고, 고위성직자들조차 피렌체와 경쟁해서 새로운 예술의 발흥을 꾀할만큼의 부를 축적하지 못했다. 꽈트로첸토의 교황의 주거지인 로마는 한 사람의 예술가도 보유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교황들은 다른 도시의 예술가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마사치오,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 도나텔로, 프라 안젤리코, 베노초 고촐리, 멜로초 다 포를리, 핀투리키오, 만테냐 같은 당대의 유명한 화가들을 로마로 불러들였지만, 이들은 주문받은 일만 끝내고는 그들의 작품 이외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로마를 떠나버렸다.

     

    The Coronation of the Virgin. 1422 - 1425. Gentile da Fabriano

     

    자신의 예배당을 장식하는 일로 로마를 한때 이탈리아 예술활동의 중심지로 만들었던 교황 식스투스 4세(재위 1471~84) 아래서도 로마의 지역적 특징을 나타낼만한 예술 학파나 경향은 전혀 형성되지 못했다. 로마적인 예술경향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브라만테와 미켈란젤로, 그리고 드디어는 라파엘로가 로마에 상주하면서 교황을 위해 그들의 능력을 제공했던 율리우스 2세(재위 1503~13)의 치하에서였다. 이때부터 비로소 로마 특유의 예술활동이 전개되는데, 이 예술활동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바 기념비적 도시로서의 위대한 로마, 전성기 르네상스(High Renaissance, 15세기 초의 고전기 또는 그 예술을 뜻함)를 말해주는 최대의 기념비이자 유일하게 본격적인 기념비로서의 로마이며, 이는 당시 교황의 궁정에 주어졌던 여건하에서만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다. 

    꽈트로첸토의 예술이 일반적으로 세속적 사고에 의한 예술이었다면 이때부터 로마에서는 새로운 교회적 예술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러면서도 여기서는 내면성이나 초세속성보다 장중, 위엄, 권력, 지배 등이 강조되었다. 기독교적 감정의 내향성과 초세속성이 물러가고 그 대신 범접하기 힘든 냉철함과 정신적, 육체적인 면에서의 우월감이 등장한다. 모든 교회와 예배당, 모든 제단화와 세례반을 통하여 교황들은 무엇보다도 그들 자신의 기념비를 세우려 하고 신의 영광보다는 자신들의 영광을 기리려 한 것처럼 보인다. 레오 10세(재위 1513~21) 치하에서 로마의 궁정생활은 그 절정에 이른다. 교황청은 황제의 궁정을 방불케 하고, 추기경의 저택은 소군주의 궁정을 연상시키며, 그밖의 고위성직자들의 저택도 귀족적인 생활방식을 통해 서로 겨루기라도 하듯이 그 영광을 뽐낸다. 교황을 위시한 고위성직자들 대부분은 처음부터 예술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예술가들을 고용하여 교회를 설립하거나 아니면 자신들을 궁정을 건립, 장식하였다. 라파엘로의 친구이자 패트런이었던 아고스티노 키지를 선두로 한 로마의 부유한 은행가들도 성직자들에게 뒤질세라 다투어 예술보호자의 역을 맡았다. 그리하여 이들은 예술시장으로서 로마의 위치를 높이기는 했지만, 거기에 독자적인 성격을 부여하지는 못했다. 

    피렌체를 위시한 이탈리아 여러 도시의 지배층이 일반적으로 단일계층으로 이루어졌던 것과 달리, 로마의 상류층은 서로 날카롭게 대립되는 세 집단으로 형성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집단은 교황의 친척과 고위성직자, 그리고 국내외 외교사절단 및 교황청의 영화에 자기 나름대로 한몫 하고 있던 그밖의 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교황청 집단이다. 이들은 대체로 가장 야심적이고 또 가장 재정능력이 있던 예술후원자들이었다. 두번재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로서는 대은행가와 부유한 상인을 들 수 있는데, 전 기독교세계를 포괄하는 교황청 재정관리의 중심지로서 극히 사치스럽던 당시의 로마는 어느 도시보다도 이들에게 좋은 경기와 돈벌이를 제공해주었다. 은행가 알토비티는 당대의 거물 예술후원가 중 한 사람이었고 또 은행가 키지를 위해서는 라파엘로의 적수였던 미켈란젤로를 제외하고는 당대의 유명한 예술가들이 모두 다 동원되었다. 즉 라파엘로 이외에도 소도마, 발다사레 페루치,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줄리오 로마노, 프란체스코 펜니, 지오반니 다 우디네와 그밖의 많은 예술가를 기용하였다.

     

    MADONNA DELLA SEGGIOLA,  c. 1513-1514, Raffaello

     

    세번째 집단에 속하는 사람으로서는 이미 몰락한 로마의 옛 명문 멤버들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예술계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으나, 다만 그들의 아들딸들을 부유한 부르즈와 가정의 자제들과 결혼시킴으로써 사회적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이러한 결혼으로 인해 일찍이 피렌체와 그 밖의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에서 구귀족이 중산층과 함께 사업에 뛰어듬으로써 가능했던 것과 비슷한 계급간의 융합이 이루어졌지만 그 범위는 훨씬 못미치는 것이었다. 

    율리우스 2세가 집권하던 초기만 해도 로마에 상주하는 화가들은 통틀어 8~10명 안팎이었으나 25년 후에는 당시 로마의 산 루카 길드에 가입한 화가가 무려 125명이나 되었다. 물론 이들 중 대부분은 교황청과 부유한 시민계급의 급격한 예술수요에 이끌려 이탈리아 각지에서 로마로 몰려든 평범한 장인들이었다. 고위성직자와 은행가가 발주자로서 예술제작에 참여한 비중도 매우 크지만, 르네상스 전성기의 예술에서 가장 특징적이고 또 이 시기 예술양식의 형성에 결정적인 것은 미켈란젤로는 거의 전적으로 그리고 라파엘로는 많은 부분을 바티칸을 위해 일했다는 사실이다. 르네상스 전성기의 '위대한 양식maniera grande'은 오로지 바티칸을 위한 예술활동 속에서만 발전할 수 있었고, 다른 곳에서 형성된 여러 예술 경향은 이 위대한 양식에 비하면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예외없이 촌스러운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로마 이외의 어느 곳에서도 우리는 이처럼 고상하고 배타적이며 교양과 학식이 철저히 배어 있고, 또 세련된 형식문제들만을 위해 철저하게 몰두하고 있는 예술양식을 찾아보기 힘들다. 초기 르네상스 예술은 아직도 광범위한 대중들로부터 적어도 오해를 받을 수는 있었다. 바꿔 말하면 초기 르네상스에서는 가난한 사람과 교양이 없는 사람들도 비록 심미적 활동의 핵심에서 벗어나 있더라도 자기 나름대로 예술에서 자기 자신들과의 관련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일반대중들은 새로운 예술양식과 도대체 아무런 관련도 맺을 수 없었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나 미켈란젤로가 그린 여자 예언자들 같은 그림이 과연 당시의 대중들에게 -그들이 이러한 그림을 직접 보았다고 가정하더라도 - 무엇을 말해줄 수 있었을 것인가?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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