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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의 전문화와 다면성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5. 6. 10:58

     

    우리는 재능의 다양성, 특히 한 인간에게서 구현되는 예술과 학문의 결합을 르네상스의 특징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예술가 한 사람이 여러 기술을 완전히 습득하는 현상은, 다시 말하면 지오토, 오르카냐, 브루넬레스키, 베네데토 다 마이아노,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건축가인 동시에 조각가, 화가였고 피자넬로,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 베로키오가 조각가인 동시에 화가, 금은세공가, 메달조각가였으며 점점 전문화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도 라파엘로는 화가이자 건축가였고 미켈란젤로는 조각가, 화가인 동시에 건축가였다는 사실은 다면성이라는 르네상스의 이상보다는 오히려 조형예술이 가지고 있던 기술적, 수공업적 성격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Benedetto da Maiano, Portrait of a Man

     

    박식다재는 실제로는 중세적 이상이다. 콰트로첸토는 수공업적 전통과 함께 이러한 중세적 이상을 계승했으나, 콰트로첸토가 수공업적 정신에서 멀어져갈수록 이러한 중세적 이상에서도 멀어지게 되었다. 르네상스 후기에 이르면 한꺼번에 여러 예술분야에 종사하는 예술가는 점점 줄어든다. 그러나 인문주의적 교양이상과 '보편적 인간uomo universale'이라는 이념이 승리하게 되자 전문화에 반대하는 정신적 경향이 또다시 득세하게 되어 다재다능을 숭상하는 경향으로 발전하는데, 이때의 다면성이란 이미 수공업적 성격이 아니라 딜레탕트적 성격을 띤 것이다. 콰트로첸토 말기에 가서는 다면화와 전문화 경향이 서로 경합을 벌이는 상황에 이른다. 즉 한편으로는 상류계층의 요구에 부응하는 인문주의적 교양이상이라는 보편주의가 지배적이 되는데, 예술가들은 이러한 보편주의의 영향 밑에서 이지적, 교양적 지식을 통해서 그들의 손재주를 보완하려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분업과 전문화의 원칙이 승리함과 동시에 예술영역에까지도 전문화가 점차 하나의 지배적 경향이 되는 것이다. 이미 지롤라모 카르다노Girolamo Cardano는 여러가지 일에 종사한다는 것이 교양인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전문화 경향에 대립하는 하나의 주목할 만한 현상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건축가 중에서 처음부터 건축가를 직업으로 지망한 사람은 유일하게도 안토니오 다 산갈로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이다. 브라만테는 본래 화가였고, 라파엘로와 발다사레 페루치는 건축활동을 하면서도 계속 화가로 머물렀으며, 미켈란젤로는 무엇보다도 조각가였다. 당시의 대가들이 비교적 늦게 건축을 직업으로 선택하고 이를 위해 주로 이론적인 공부만을 했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수공업적 교육이 얼마나 빨리 지적, 학술적 교육에 의해 밀려나게 되었는가를 말해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건축이라는 것이 부분적으로는 귀족의 아마추어적 소일거리나 취미밖에 되지 못했음을 말해주기도 하는 것이다. 대귀족들은 예전부터 건축주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아마추어 건축사 노릇도 즐겨 했던 것이다. 

    기베르티는 피렌체 세례당의 문을 완성하는 데 수십년을 소요했고, 루카 델라 로비아도 같은 성당의 성당의 성가대석을 만드는 데 거의 10여년을 보냈다. 이와 달리 길란다이오의 작업방법은 이미 독창적인 조묘描, fa presto 기술로 특징지어졌고, 바사리는 이미 진정한 예술성의 단적인 증거는 손쉽고 재빠른 제작에서 드러난다고 보았다. 딜레탕티즘과 완벽한 기술 소유는 그 자체로는 서로 매우 모순되지만 인문주의자의 성격에는 이 두 요소가 잘 결합되어 있는데, 그 까닭은 '지적 생활의 달인'이라고 불린 이들 인문주의자들은 또한 영원히 시들지 않고 변함없는 딜레탕트들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요소는 인문주의자들이 실현하고자 했던 인격의 이상에 속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역설적인 결합에는 인문주의자들이 영위하던 전신생활의 문제성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 문제성은 인문주의자들이 그 최초의 대표자였던 문인의 개념, 다시 말해서 그들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완전히 독립된 직업인이어야 옳지만 실제로는 여러 면에서 구속을 받고 있는 직업계층인 문인이라는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4세기 이탈리아의 문인들은 대체로 상류계층 출신이었다. 그들은 도시귀족이거나 아니면 돈 많은 상인의 자제들이었다. 구이도 카발칸티와 치노 다 피스토이아는 귀족출신이었고, 페트라르카는 공증인의 아들이었으며, 브루네토 라티니는 자신이 공증인이었고, 빌라니와 사케티는 부유한 상인이었으며, 보카치오와 세르캄비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다. 이러한 문인들은 중세의 음유시인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인문주의자들이 계층적으로 혹은 교육적, 직업적으로 하나의 동일한 사회적 범주에 속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 중에는 성직자와 속인, 부자와 가난한 사람, 고위관리와 신분이 낮은 공증인, 상인과 교사, 법률가와 학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하층계급의 대표자들이 전체 인문주의자들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점점 더 커져갔다. 그중에서도 가장 명망있고 영향력이 크며 사람들에게 가장 두려움을 준 인물은 구두장이의 아들이었다. 이들 하층 출신의 인문주의자들은 모두가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점에서 적어도 한가지 공통되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상당수는 신동으로 인정받았으며 갑자기 앞날이 촉망되는 출세길이 열린 운명으로서 처음부터 매우 특이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일찍부터 일깨워진 과도한 출세욕과 천신만고의 수업, 가정교사나 비서로서의 어려운 생활, 이 모든 것이 그들에게 도덕적으로 깊은 상처를 입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의 사회적 여건은 문인에게 기회를 주기도 했지만 재능있는 젊은이의 영혼을 처음부터 질식시키기에 알맞은 위험 또한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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