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르네상스의 천재 개념과 독창성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5. 1. 09:18

     

    르네상스의 예술관에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은 천재 개념의 발견이다. 예술작품은 자주적 인격의 소산이고 자주적 인격은 전통, 이론, 규범은 물론 작품까지도 넘어서서 그 위에 군림하는 것이며 작품은 그 법칙을 이러한 인격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는 생각,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자주적, 창조적 인격의 소유자는 작품보다 더 풍부하고 심원하며 어떠한 객관적 형상으로도 완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정신의 독창성과 자발성 그 자체에 가치를 두지 않았고 거장을 모방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요 표절도 허용될 수 있는 일로 간주했으며 정신적 경쟁이라는 생각에 겨우 접하기는 했을망정 결코 그것이 지배적이지 않았던 중세에는 천재라는 개념은 완전히 생소한 것이었다.

    천재란 곧 신의 선물이요 남에게 양도될 수 없는 타고난 창조력이라는 이념, 천재가 따를 수 있고 또 따라야만 하는 독자적이고 일회적인 예술의 법칙성에 관한 이론, 그리고 천재적 예술가의 특성과 고집에 대한 합리화, 이러한 모든 생각들은 자유경쟁에 입각한 동적인 사회의 본질 때문에 중세의 권위주의적 문화에서보다 개인들에게 더 좋은 기회가 주어졌고, 또 지배자들이 그들을 선전해야 할 필요성과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공급규모로써는 도저히 예술시장을 충족시키지 못할 만큼 예술의 수요가 급증했던 르네상스의 사회에와서야 비로소 생겨났다. 그러나 경쟁이라는 근대적 개념이 멀리 중세까지 소급되는 것처럼, 객관적 근거에 따라 초인격적으로 규정된 중세적 예술 개념도 계속해서 그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예술가의 인격에 대한 주관주의적 파악도 중세가 끝난 후에 매우 서서히 관철되었다. 따라서 개인주의적 르네상스 개념은 두 가지 면에서 교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부르크하르트의 테제(개인주의가 르네상스에 비로소 생겼다는 명제)를 간단히 일축할 수만은 없는데, 그 이유는 비록 중세에 이 미개성을 강조하는 예술가들이 없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과 자신의 개성을 의식하고 이를 긍정하며 의도적으로 고양시키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개인주의라고 할 때 그것은 자기반성적인 개인의식을 두고 하는 말이지 단순한 개인적인 작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개성에 대한 자기성찰이 르네상스에서 비로소 시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르네상스에서도 처음부터 자기성찰을 하는 개성이 등장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예술 속에서 개성의 표현을 찾고 이를 높이 평가하던 끝에야 비로소, 예술이 더이상 객관적인 '무엇'이 아니라 주관적인 '어떻게'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예술이 이미 자기고백이 되고, 또 바로 주관적 표현임으로 해서 일반적인 인정을 받게 된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예술의 객관적인 진리내용을 운위하였다. 개성의 힘과 개인의 정신적 에너지 및 자발성은 르네상스의 위대한 체험이었다. 이러한 에너지와 자발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서의 천재는 르네상스의 이상이 되었고 이를 통해 르네상스 사람들은 인간 정신의 본질과 현실을 지배하는 그것의 위대한 힘을 인식하였다. 천재 개념의 발전은 정신적 소유권이라는 사고방식이 생겨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정신적 소유권이라는 관념과 독창성을 향한 의지는 중세에는 없었던 것이다. 이 두 개념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예술이 단순히 신적인 것의 표현에 불과하고 예술가는 영원하고도 초자연적인 사물의 질서를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수단밖에 되지 않았던 동안에는 예술의 자율성이나 자기 작품에 대한 예술가의 소유권이란 전혀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정신적 소유권에 대한 요구와 자본주의의 시작을 결부시키는 것은 쉽사리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이긴 하지만 그런 식의 논의는 단순히 개념의 애매한 사용에 의존해서 진행되는 것이기 쉽다. 정신의 생산성, 그리고 이와 결부된 정신적 소유권이라는 생각은 기독교 문화의 붕괴와 더불어 생겨난다. 종교가 더이상 정신생활의 모든 영역을 지배, 통일하지 못하게 되자 곧 온갖 정신적 형식의 자율성이라는 개념이 대두했고, 그 자체로서 의미와 목적을 지닌 예술이라는 하나의 형식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술까지 포함한 모든 문화현상을 종교적 측면에서 설명하려는 그후의 온갖 시도에도 불구하고, 중세문화의 단일성을 회복하고 예술로부터 그 자율성을 완전히 박탈하려는 시도는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이때부터 예술은 비록 그것이 예술 이외의 목적에 사용된 경우라 하더라도 그 자체로서 즐길 수 있고 또 의미가 있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개개의 정신적 형식이 동일한 하나의 진리를 각각 다르게 표현한 데 불과하다는 중세적 사고에서 한번 벗어나게 되자, 이미 개개의 정신적 형식의 특성과 독창성 자체가 그 형식의 가치를 재는 기준이라는 생각도 나타나게 마련이었다. 트레첸토가 아직도 한 사람의 거장 즉 지오토와 그 전통의 영향권안에 머물렀다면, 콰트로첸토에 와서는 개인적 노력이 어디서나 나타나고 있다. 독창성을 향한 의지는 이제 경쟁적인 사회의 투쟁속에서 하나의 무기가 되었다. 사회의 움직임이 바로 독창성이라는 수단을 만들어내지는 않았지만, 이를 자신의 목적에 알맞게 만들어서 좀더 유용하게 활용하였다. 예술시장에서의 사정이 일반적으로 예술가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는 동안에는 아직도 개인적 특성에 대한 의지가 병적일 정도의 독창성을 추구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새로운 상황으로 인하여 예술시장에 불협화음이 일어난 매너리즘 시대에 가서야 비로소 나타난다. 그러나 '독창적 천재'의 전형이 나타나는 것은 18세기, 그러니까 패트런의 시대로부터 자유롭고 냉혹한 예술시장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예술가들이 그들의 물질적 생존을 위해 종전보다 더 가혹한 투쟁을 벌여야만 했던 18세기에 이르러서이다. 

    스케치에 대한 평가

    천재 개념의 발달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보를 내디딘 것은 업적 그 자체보다는 업적을 내는 능력이, 작품보다는 예술가 자신이, 작품의 완전한 성공 여부보다는 작품에 나타난 의도와 사상이 더 중요시되면서이다. 이러한 발전은 개인적인 표현방식이 그 자체로서 흥미롭고 유익하게 느껴지게 된 시기에 와서야 비로소 가능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발전을 가능케 하는 전제조건이 콰트로첸토에 이미 어느정도 나타났다는 사실은 필라레떼 논문의 한 구절에서도 분명해지는데, 거기서 그는 한 예술작품의 여러 형식을 원저자 본래의 필치를 금방 알 수 있는 초고의 여러 특징과 비교하고 있다. 소묘, 초안, 스케치, 보쩨토bozzetto(밑그림) 등과 같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일체의 것에 대한 이해와 늘어나는 애호는 이러한 발전이 진일보한 것이다. 단편적인 작품에 대한 기호 역시 천재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는 주관적인 예술관념으로부터 비롯한다. 고대의 토르소에 의해 훈련된 예술관은 기껏해야 여기에 가세했을 땨름이다. 소묘나 스케치는 르네상스인들에게는 예술적인 형상화라는 면에서뿐만 아니라 하나의 기록으로서, 즉 예술적 창작과정을 나타내는 기록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르네상스인들은 이러한 것들을 완성된 작품과는 상이한 하나의 특수한 표현형식으로 인식했고, 예술가의 창작과정을 그 시발점에서 창작자 자신과 미처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여준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바사리에 의하면 우첼로는 궤짝이 하나 가득 찰 만큼 많은 소묘를 남겼다고 한다. 이에 비하면 중세로부터 전해오는 소묘는 전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중세의 소묘들이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물론 중세의 예술가들이 후세의 거장들처럼 순간적인 착상에 큰 의의를 부여하지 않았고 또 이러한 순간적인 착상을 정착시켜야 할 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사실에서도 기인하겠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한편으로는 그런대로 쓸만한 종이를 누구나 살 수 있을 정도로 종이가 대중화된 후에야 비로소 소묘가 보편화 되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세에 실제로 그려졌던 소묘 중에서 극히 적은 일부분만이 보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 대다수가 소멸된 것은 시간적으로 너무 오래되엇기 때문만이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이 애초에 소묘를 보존한다는 것에 대해서 후세 사람들처럼 큰 가치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묘의 보존에 흥미가 없었다는 사실에서도 바로 중세의 객관적인 예술관과 르네상스의 주관주의적 예술관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중세에는 예술품이 단지 하나의 대상적인 가치만을 지니고 있었다면 르네상스에 와서는 예술품에 인격적 가치를 아울러 부여했다. 르네상스에서는 소묘가 예술적 창조의 공식처럼 되었는데, 왜냐하면 소묘는 따지고 보면 모든 예술작품에 따르게 마련인 단편적인 것, 미완성적인 것, 완성할 수 없는 것을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업적 자체보다도 업적을 이루는 능력을 중시한다는 천재 개념의 기본 특징은 또한 천재성이란 남김없이 실현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뜻하는 동시에 이러한 견해는 르네상스인들이 왜 불완전한 소묘에서 예술의 전형적인 형식을 보았는가를 해명해주는 것이다. 

     

    Leonardo Da Vinci

     

    천재는 완전히 표현될 수 없다는 개념에서 한 발자국만 더 나가면 세상이 몰라주는 천재가 되고, 동시대인들의 부당한 평가를 후세인들이 바로잡으라는 호소가 된다. 그러나 르네상스인들은 이 한 발짝을 결코 내딛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성공하지 못한 예술가들이 호소대상으로 삼은 후세 사람들보다 예술이해가 더 깊어서가 아니라, 당시 예술가들의 생존 경쟁이 비교적 격렬한 형태를 띠지 않았기 때문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재 개념은 이때부터 복잡한 변증법적 양상을 띠게 된다. 천재 개념은 한편으로는 예술을 알지 못하는 속물들에 대항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엉터리 화가나 아마추어 화가들에 대하여 일종의 자기방어 수단을 예술가에게 제공했다. 속물들에 대항해서는 그들은 괴짜라는 탈을 쓰고 숨었고, 엉터리 화가들에 대해서는 자신의 재능이 선천적인 것이고 예술은 결코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프란치스코 데 홀란다는 이미 그의 <회화에 관한 대화, 1548>에서 훌륭한 예술가는 하나같이 보통사람들과는 다소 다른 무엇을 가지고 있고 진정한 예술가는 타고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물론 그 당시에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천재는 영감을 받은 사람이고 그의 가치는 초인격적, 비합리적인 성질의 것이라는 이론은, 이 시기에 이미 자신들을 다른 사회계층과 좀더 날카롭게 구분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공적, 즉 초기 르네상스에서 말하던 뜻에서의 덕(virtù. 徳,한자의 원뜻에 가까운 윤리적인 규범보다, 전인적인 '힘', 특히 르네상스의 남성들에게서 기대되던 덕목들을 가리킴) 까지도 포기하는 하나의 정신적 귀족계급이 형성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이.탈.리.아 역사 > 르네상스 rinascimento'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술의 과학화  (0) 2020.05.05
    예술의 자율성  (0) 2020.05.03
    예술가의 전설  (0) 2020.04.29
    예술가와 인문주의자  (0) 2020.04.28
    르네상스 전기문학  (0) 2020.04.20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