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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네상스 전기문학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4. 20. 19:32

     

    시문학의 영역 밖에서 이탈리아 사람들은 유럽인들 중 처음으로 역사적인 인물의 내면과 외면의 특성들을 정확하게 서술하려는 성향과 재능을 가졌다.

    중세 초기에 이미 상당한 정도의 시도들이 나타난다. 설화들은 전기의 과제가 언제나 그렇듯이 개인의 묘사에 대한 관심과 기량을 어느 정도까지 보여주어야만 했다. 수도원 연대기와 주교좌 성당 연대기들에는 많은 성직자들, 예를 들면 파더본의 마인베르크, 힐데스하임의 고데하르트 등과 같은 성직자들이 상당히 잘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많은 도이치 황제들에 대하여 고대의 방식에 따른 전기 서술들이 존재하였다. 이런 책들은 극히 중요한 특징들을 포함한다. 이런 책들과 비슷한 세속적인 전기Vitae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성자들의 전기와 비슷한 평행을 이루었다. 그러나 주앙빌(1224~1317)의 <성 루이 이야기>에 나오는 서술과 나란히 놓고 보면 아인하르트도 라데비쿠스도 그와 견줄 수가 없다. 이 작품은 물론 대단히 산만하지만 그래도 최초로 완벽하게 새로운 유럽인의 정신을 묘사하고 있다. 성 루이와 같은 인물들은 원래가 드문 법인데다가, 아주 순진한 저자가 한 사람의 생애의 모든 세세한 행동과 사건들을 직접 목격하고 그것을 묘사한다는 드문 행운이 겹친 경우이다. 프리드리히 2세, 미남왕 필리프 등의 내적인 본질에 대해 얼마나 빈약한 출전에서 추론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라. 그런 다음 중세 말에 이르기까지 전기라고 나타나는 많은 것들은 단순히 시대사일 뿐이며, 아무런 의미도 없이 찬양해야 할 사람 개인을 위해서 쓰여진 것이었다. 그에 반해서 이탈리아 사람들의 경우에는 중요한 사람들의 특징적인 면모를 탐구하는 것이 지배적 추세가 되었다. 이것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구별되는 점인데, 다른 나라들의 경우 그런 일은 우연히 그리고 극히 예외적으로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것에 대해 이렇듯 발전된 감각은, 스스로 종족에서 벗어나 개체가 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전기 모음

    광범위하게 퍼진 명성의 개념과 연관지어서 사람들의 생애를 모아놓고, 비교하는 전기서들이 나타난다. 이런 책들은 아나스타시우스, 아넬루스와 그들의 후계자들처럼 혹은 베네치아 총독 열전처럼 왕조나 성직자들을 차례로 서술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중요한 사람만 고르면 되었다. 여기서 모범으로 작용한 전기 작가들로는 쉬토니우스 외에도 네포스Nepos(기원전 100~25)의 <유명한 사람들>, 그리고 당시 알려지고 번역된 범위 안에서 플루타르크 등이었다. 문학사 서술을 위해서는 쉬토니우스의 부록으로 알려져 있는 문법학자, 수사학자, 시인들이 생애 서술이 중요한 모범 노릇을 하였다. 그 밖에도 도나투스가 쓴 베르길리우스의 생애도 역시 모범이 되었다. 

    전기 모음들, 유명한 남자들의 생애, 유명한 여자들의 생애를 모아놓은 책들이 14세기에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하는 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동시대 사람들을 묘사하지 않는 경우에 그들은 물론 옛날의 작가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였다. 최초로 중요한 자유로운 업적은 보카치오가 쓴 단테의 생애였다. 가볍고 수사적으로 쓰여지고, 보카치오의 자의성이 풍부한 이 책은 단테의 본질에 들어 있는 비범한 요소들에 대한 생생한 감정을 전달한다. 그런 다음 14세기 말에 필리포 빌라니가 쓴 탁월한 피렌체 사람들의 <전기vite> 가 나온다. 여기에는 모든 영역의 사람들이 들어 있다. 시인, 법률가, 의사, 문헌학자, 예술가, 정치가, 전사 등이 있었고 그 중에는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기서 피렌체는 재능 있는 집안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집안의 정신을 특별히 잘 구현하고 있는 후손들을 기록해두는 집안처럼 말이다. 인물 묘사는 짧지만 특성을 찾아내는 진정한 재능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특기할 만한 것은 외면의 묘사와 내면의 묘사를 결합시켰다는 점이다. 이후로 토스카나 사람들은 인물 묘사를 특수한 능력의 영역으로 간주하게 되었으며, 우리는 15세기와 16세기 이탈리아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성격 묘사를 주로 이들 토스카나 사람들에게서 얻고 있다. 조반니 카발칸티는 1450년 이전에 자신의 <피렌체 역사>에 붙인 부록에서 시민적인 탁월함과 희생정신, 정치적 이해심, 군인의 용감성 등의 예를 모아 놓았다. 모두가 피렌체 사람들이었다. 교황 피우스 2세는 <주석>에서 유명한 동시대 사람들의 가치 있는 삶의 초상화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전에 쓴 특별한 저서도 새로 인쇄되었다. 그것은 이 초상화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전에 쓴 특별한 저서도 새로 인쇄되었다. 그것은 이 초상화들을 위한 사전 작업이었지만 나름대로 독특한 특성과 색채를 지닌 것이었다. 볼테라의 야코포Jacopo von Volterra 는 피우스 이후 로마 교황들의 날카로운 초상화를 보여준다. 베스파시아노 피오렌티노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명을 하였다. 그의 책은 우리가 가진 가장 중요한 원전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의 성격 묘사 재능은 마키아벨리, 니콜로 발로리, 귀치아르디니, 바르키, 프란체스코 베토리 등의 그것과 견줄 수는 없다. 이들은 이런 방식의 유럽 역사 서술에서 고대인들만큼이나 뚜렷한 영향을 남겼다. 그리고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이들 저술가들의 많은 작품들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일찍부터 북유럽으로 전파되었다는 점이다. 아레쪼의 조르지오 바사리와 비할 바 없이 중요한 그의 작품이 없었다면 오늘날 유럽의 예술사(미술사)자체가 없을 것이다.

    15세기 북부 이탈리아인들 중에서는 (스페치아의)바르톨로메오 파치오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크레모나에서 태어난 플라티나는 <파울루스 2세의 생애>로 이미 풍자적인 전기를 대표한다. 그러나 피에르칸디도 데쳄브리오가 쓴 마지막 비스콘티 '필리포 마리아'에 대한 묘사는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쉬토니우스를 확장해서 모방한 위대한 작품이다. 시스몬디는 그런 인물을 위해 그토록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다고 아쉬워했다. 더 위대한 사람을 위해서는 힘이 미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필리포 마리아의 혼합적인 성격과, 그가 행한 특별한 방식의 전제정치의 전제, 형식, 결론을 놀라울 정도로 정밀하게 묘사해내고 있다. 대상의 특성을 가장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그려낸 단 하나뿐인 이 독특한 전기가 없이는 15세기의 전체적인 모습은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뒷날 밀라노의 역사가 코리오는 중요한 초상화가였으며, 이어서 코모 출신의 파올로 조비오가 나오는데 그의 가장 위대한 전기들과 규모가 작은<엘로지아>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모든 나라의 후계자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수많은 곳에서 조비오의 경박함과 부정직함을 입증하기는 쉽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인간에게서 진지하고 더 높은 의도란 어차피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세기의 숨결이 그의 페이지들 사이로 불어간다. 그가 그려낸 레오, 알폰소, 폼페오 콜론나 등은 우리 눈앞에서 완전한 진실성과 필연성을 가지고 살아 움직인다. 비록 여기서 그들의 더욱 깊은 본질을 알아낼 수는 없지만 말이다. 

    나폴리 사람들 중에서는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한 트리스탄 카라치올로가 의문의 여지 없이 일급이다. 그의 의도는 엄격한 의미에서의 전기를 쓰겠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인물들 속에는 죄악과 운명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기 때문에 그를 의식하지 않은 비극 작가라고 부를 만하다. 당시 무대에서는 전혀 자리가 허용되어 있지 않던 진짜 비극들이 궁전들, 길거리, 광장들을 통하여 강력한 걸음으로 걸어갔다. 안토니오 파노르미타가 알폰소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쓴 <알폰소 대왕의 언행록>은 최초로 그런 일화들을 모은 책으로 재치 있는 말들을 보여준다.

    나머지 유럽은 정신적인 특성 묘사라는 점에서 아주 천천히 이탈리아의 업적을 뒤쫓아갔다. 여기서도 이미 위대한 정치적, 종교적 움직임을 담은 책들이 나왔고, 정신적 활동을 부추기는 수많은 책들이 나와 있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아 당시 유럽 세계의 가장 중요한 인물에 대해 우리에게 가상 중요한 정보원은 이탈리아 사람들이다. 문필가나 외교관 양쪽 모두 그렇다. 새로운 시대에 얼마나 재빨리, 그리고 반론의 여지 없이 16,17세기 베네치아 대사들의 보고서가 인물 묘사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가.

    자서전

    자서전도 역시 이탈리아 사람들 사이에서 깊이와 폭에 강력한 비약을 얻고, 극히 다양한 외적 생활과 나란히 내면도 깊이있게 묘사되었다. 다른 민족들의 경우, 심지어는 종교개혁 시대 도이치 사람들의 경우에도 자서전은 특이할 정도로 외적인 운명들만을 다루고 있으며, 정신은 오직 서술 방식에서 유추해낼 수밖에 없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경우는 마치 단테의 <새로운 생활>이 냉혹한 진실성을 가지고서 자기 민족에게 이 길을 지시하기라도 한 것 같다. 

    14,15세기에 나온 가문의 역사들이 이것을 시작하였다. 이런 책들은 필사본으로 피렌체 도서관에 많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부오나코르소 피티의 책이 그렇듯이 집안과 집필자 자신의 이해에 따라서 씌어진 생애 서술들이었다. 

    더욱 깊은 자기 반성은 피우스 2세의 <주석>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다. 여기서 인간으로서의 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첫눈에도 벌써 그렇지만 그가 자신의 경력을 어떻게 만들어갔는가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좀더 광범위하게 생각하면 이 특이한 책에 대해서 다르게 판단하게 될지도 모른다. 본질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반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의 신념, 그들의 내적인 투쟁, 더욱 깊은 삶의 결론 등이 대체 무엇이었을까 자문해보는 것은 그들에게 적절하지 못한 일이다. 에네아스 실비우스(피우스 2세)는 그 어떤 도덕적인 갈등으로 특별히 자신을 괴롭히는 일 없이 자신의 길을 갔다. 그의 카톨릭 정통 신앙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필요한 만큼 그에게 답변을 주었다. 그는 자기 세기를 사로잡았던 온갖 지적인 질문들에 동참하고, 적어도 하나 이상의 질문을 던졌지만, 생애 마지막에도 여전히 성질이 남아 있어서 터키 사람들에 맞서 십자군전쟁을 계획하다가, 그것이 수포로 돌아가자 상심해서 죽었다. 

    첼리니의 자서전

    벤베누토 첼리니의 자서전도 자기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이 책은 부분적으로는 의지에 반해서 감동적인 진실성과 풍부함으로 한 인간 전체를 묘사하고 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작업들은 단순히 구상으로만 남아 있다가 사라져서, 남아있는 작품들만 놓고 볼 때 많은 위대한 동시대 인물들에 비해 뒤로 밀려난 채 예술가로서는 우리에게 작은 장식품 영역에서만 알려져 있는 이 사람이 한 인간으로서는 최후의 날 까지 인류의 관심을 사로잡는다는 것은 절대로 작은 일이 아니다. 독자들이 그가 거짓말을 했을 거라고, 사건을 과장했을 거라고 짐작을 해도 그에게는 그다지 해가 되지않는다. 왜냐하면 강력한 에너지와 완전히 일관된 천성이라는 인상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그와 나란히 세워놓고 보면, 북유럽의 자서전들은 성향과 도덕적인 본질이 때로는 훨씬 더 높다는 점을 인정하게 될 지는 모르지만 묘사라는 측면에서는 비할 바 없이 불완전하다. 그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감행하고, 자기 자신 안에 자신의 척도를 지닌 인간이었던 것이다.

     

     

    카르다노의 자서전

    진실성이라는 측면에서 언제나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는 또 다른 사람을 여기서 꼽을 수 있다. 밀라노의 지롤라모 카르다노이다. 그의 작은 책자 <내 삶에 대하여>는 자연과학과 철학의 역사에서 그가 남긴 기억을 넘어선다. 벤베누토 첼리니의 자서전이 그의 작품을 능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이 저술의 가치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기는 하지만, 카르다노는 의사로서 손수 자신이 맥박을 재서, 자신의 신체적, 지적, 도덕적 성품을 그것들이 발전한 전제 조건들과 함께 가능한 한 정직하고 객관적으로 서술했다. 그는 자기가 모범이라고 제시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자서전을 이런 의미에서 능가하고 있다. 그 어떤 스토아적인 미덕에도 사로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생애 서술은 어머니가 태아를 낙태시키려다가 실패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가 자신의 탄생시를 지배하던 별자리에서 오직 자신의 운명과 지적인 특성만을 거론하고 도덕적인 특성을 거론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그 밖에도 그는 40세에서 45세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점성술 예언이 젊은 날 자신을 대단히 괴롭혔노라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러나 이렇게 널리 퍼져서 거의 모든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책을 계속 인용하는 일은 의미가 없는 일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은 마지막까지 책을 놓지 못할 것이다. 카르다노는 자신이 도박판에서 속임수를 썼다는 것, 복수욕에 넘쳐 있고, 후회에 대하여 무감각하고, 의도적으로 악의를 품은 말을 한다는 것 등을 고백한다. 그는 뻔뻔스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경건한 참회에도 빠지지 않고서 이 모든 것을 고백해놓았다. 그것으로 자기 책을 재미있게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라, 자연과학자의 감각으로 단순하고 객관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가장 냉혹하게 여겨지는 것은 이 76세의 노인이, 자기 아들이 바람피운 아내를 독살한 죄목으로 처형을 당한 일 같은 끔찍한 경험을 하고 난 다음에도 인간에 대한 진정한 신뢰를 품고서 상당히 행복감을 느낀다는 점이다. 아직도 손자가 하나 있고, 그 자신은 엄청난 지식을 소유하고 있고, 자신의 작품들로 인해 명성을 얻었고, 상당한 재산과 지위와 존경을 얻었으며, 막강한 친구들과 많은 비밀스러운 지식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것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자기 입 안에 남은 치아를 세어보고 아직 15개나 남아있다고 썼다. 

    카르다노가 이 글을 썼을 때 이탈리아에서는 종교재판과 에스파냐 사람들이 이미 이런 종류의 인간이 아예 형성될 수 없도록 하거나 아니면 어떤 방법을 써서든 죽이고 있었다. 그래서 카르다노의 자서전에서 알피에리의 자서전 사이에는 커다란 공백이 있다.

    코르나로의 자서전

    주목할 만한 데다 행복하기도 했던 사람 하나를 언급하지 않고 자서전 항목을 끝낸다면 부당한 일이 될 것이다. 그는 유명한 생의 철학자 루이지 코르나로이다. 파도바에 있는 그의 집은 고전적인 건축물로서 모든 뮤즈들의 고향이기도 했다. 그의 유명한 논문 <소박한 삶>에서 그는 우선 엄격한 식이요법을 강조한다. 그는 어린 시절 병약한 사람이었으나 엄격한 식이요법을 통해서 건강을 얻고 장수하여 83세에 이르렀다. 그는 65세 이상의 노년이란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다고 탄식하는 사람들에게 답변을 한다. 자신의 삶은 대단한 생명력에 넘쳐 있고, 전혀 죽은 것이 아니라고 증명한다. "와서 한번 내 건강함을 보시라.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말에 올라타고 계단과 낮은 산에 오르는 것을, 내가 얼마나 즐겁고 만족하는지를. 그리고 온갖 마음의 고민과 지겨운 생각들에서 벗어나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기쁨과 평화가 나를 떠나지 않는다...나는 신분이 높고, 지혜롭고, 학식 있고, 탁월한 사람들과 교류한다.

     

    Portrait of Luigi Cornaro by Tintoretto

     

    그리고 이들이 곁에 없으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럼으로써 힘 닿는 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한다. 이 모든 일을 나는 온갖  건축술을 이용하여 여름과 겨울에 알맞도록 지어졌고 흐르는 물가에 정원이 있는, 파도바에서 가장 좋은 장소에 자리잡은 나의 아름다운 집에서 알맞은 시간에 편안하게 행한다. 봄과 가을에는 며칠간 유가네아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 자리잡은, 샘과 정원들이 딸린 편안하고 아름다운 거처로 간다. 그곳에서 내 나이에 알맞은 가볍고 만족스러운 사냥에도 동참한다. 그 다음에는 얼마 동안 평지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별장에서 보낸다. 그곳에서는 모든 길이 하나의 광장으로 모이는데, 광장 한가운데는 아름다운 교회가 서 있다. 브렌타강의 커다란 지류 하나가 아주 비옥하고 잘 경작된 들판 가운데를 통과하며 흐른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전에는 늪지대에다 공기도 나빠서 사람보다는 뱀들이 사는 지역이었다. 내가 이 물줄기를 돌려놓았다. 그러자 공기도 좋아지고, 사람들이 하나 둘 살기 시작하더니 점차 불어나서, 오늘날 보는 것처럼 완전한 경작지로 변했다. 그래서 나는 진심으로 이 장소에 신을 위해 하나의 제단과 사원과, 그분을 예배할 영혼들을 바쳤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이곳에 올 때마다 내가 느끼는 위안과 행복이다. 봄과 가을이면 근처에 있는 도시들을 방문하고 친구들과 만나 이야기하고, 그들을 통해 다른 훌륭한 사람들을 사귄다. 건축가, 화가, 조각가, 음악가, 농업 연구자 등이다. 그들이 새로 만들어낸 것을 관찰하기도 하고, 전부터 있었던 것들을 다시 관찰하기도 하면서 내게 쓸모 있는 많은 것들 을 배운다. 궁전, 정원, 골동품, 도시의 공공 시설들, 교회, 요새 등지를 다시 보는 것이다. 여행 중에 무엇보다도 나를 매혹시키는 것은 장소와 지역의 아름다움이다. 평지에, 산지에, 강가나 시냇가에 자리잡은 지역들, 시골집들과 사방으로 둘러싼 정원들의 아름다움이다. 이런 나의 즐거움은 눈이나 귀의 기능이 나빠지는 일로 해서 줄어들지는 않았다. 신께 감사드리는 바이지만 내 모든 감각은 완전히 좋은 상태이고, 내가 먹는 얼마 안되는 단순한 음식은 예전에 불규칙하게 살던 시절에 먹던 맛있는 것들보다 오히려 맛이 더 좋으니 입맛도 아주 좋은 편이다."

    그는 이어서 베네치아 공화국을 위해서 자신이 수행한 소택지 개간사업과 자신이 꾸준히 제안한 해안 보존 계획을 언급하고 난 다음에 이렇게 글을 끝맺고 있다. "이것은 신의 도우심으로 많은 젊은이들과 또 많은 병든 노인들이 받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서 벗어난 건강한 노년의 진정한 즐거움이다. 그리고 위대한 것에 하찮은 것을, 진지한 것에 농담을 덧붙여도 괜찮다면 내 소박한 삶의 열매는, 지금 83세의 나이인데도 예의바른 농담으로 가득 찬 즐거운 희극을 썼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보통은 젊은이가 할 일이다. 비극이 노인의 일이듯이 말이다. 저 유명한 그리스 사람이 73세에 비극을 썼다는 것이 그의 명예가 된다면, 나는 열 살이나 더 많으면서도 그 사람보다 훨씬 더 젊고 명랑한 것이 아니겠는가? 내 노년의 풍요로움에 위안이 부족하지 않도록 나는 후손들의 모습에서 일종의 살아 있는 불멸성을 눈앞에 본다. 집에 돌아오면 열한명이나 되는 손자들이 늘어선 것을 보게 된다. 두 살에서 열여덟 살 사이로, 그들 모두가 한 아버지,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이다. 모두들 아주 건강하고, (지금까지 본 바로는)교양과 좋은 도덕을 위한 재주와 성향을 가졌다. 꼬마들 중 하나를 언제나 재롱둥이 삼아 데리고 다닌다. 세 살에서 다섯 살 까지의 아이들은 타고난 부포네buffone(재담꾼)들이기 때문이다. 큰 아이들은 점잖게 대접해준다. 그들이 훌륭한 목소리를 가진 것이 기쁘다. 그들이 노래하고, 여러 가지 악기들을 연주하는 것을 들으면 참으로 즐겁다. 나 자신도 함께 노래하곤 하는데, 나는 전보다 더 맑고 잘 울리는 목소리를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내 노년의 기쁨이다. 내 삶은 살아 있는 것이지 죽은 것이 아니며, 나는 내 노년을 정열에 사로잡힌 젊음과 바꾸고 싶지 않다. "

    코르나로가 훨씬 뒷날, 95세의 나이에 덧붙힌 '경고'에서 자신의 즐거움에 한 가지를 덧붙였으니 자신의 논문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는 파도바에서 거의 1백세가 다 된 1565년에 죽었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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