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인간의 발견 : 문학에 나타난 정신의 묘사 III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4. 17. 18:52

     

    서사시 

    그렇다면 연극이 못한 일을 서사시에 기대해도 좋을 것인가, 그러나 이탈리아 영웅시는 인물의 태도와 표현에 가장 취약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다른 장점들은 논란의 여지 없이 이탈리아 편이다. 특히 서사시가 350년 전부터 실제로 읽히고 거듭 인쇄되어 왔다는 것은 가장 큰 장점이다. 반면 다른 민족의 서사시는 단순히 문학사의 관심 영역에만 속하였다. 아니면 이탈리아 독자들이 북유럽과는 다른 것을 요구하고 인정한 것일까? 어쨌든 북유럽 사람이 이탈리아 문학의 독특한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이탈리아인의 관점을 부분만이라도 익혀야 하는데, 매우 탁월한 사람들도 그것은 시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선언하였다. 풀치, 보이아르도, 아리오스토, 베르니의 서사시 작품들을 순수하게 사유 내용에만 국한시켜서 분석하는 것은 대상을 너무 축소시켜서 다루는 것이 된다. 그들은 확고하고 주도적인 예술적인 국민을 위해 작품을 쓴, 가장 독특한 종류의 예술가들이기 때문이다.

    기사 문학이 점차 시들어가고 난 다음 중세의 설화들은 일부는 운율을 넣어 개작한 형태와 수집품의 형태로, 일부는 산문소설의 형태로 계속 살아남았다. 산문소설은 14세기 이탈리아에 나타난 형태였다. 그러나 방금 깨어난 고대에 대한 관심이 너무나 거대해서 중세의 상상적인 모습들은 곧 거대한 그림자 속에 가리게 되었다. 예를 들어 보카치오는 <사랑스러운 환상Visiona amorosa> 중 마법 궁전에서 서술되는 영웅을 몇 명에게 트리스탄, 아르투스, 갈레오토 등 이름을 붙여주기는 했지만 마치 그들을 부끄럽게 여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주 짧게만 언급한다. 그 뒤로 오는 온갖 종류의 문필가들은 중세 영웅들의 이름을 아예 부르지 않거나 고작 농담조로만 부른다. 그러나 민중은 그들을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 중세 영웅들은 민중의 손으로부터 15세기 작가들에게 넘겨진다. 15세기 작가들은 자신들의 소재를 완전히 새롭고 자유롭게 느끼고 묘사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 이상을 행한다. 곧 거기에 새로운 요소를 첨가하거나 아니면 아예 대부분을 새로 창안해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그들에게 기대해서는 안된다. 즉 그들이 그렇게 전승된 소재를 이전 시대와 같은 존경심으로 다룰 것이라는 기대 말이다. 새로운 유럽 전체가 15세기의 작가들이 특정한 환상 세계와 국민의 관심을 결합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에게 선망의 눈길을 보낼 수는 있겠지만, 그들이  이 환상 세계를 신화로 여겨 숭배했다면 그들은 분명 위선자였을 것이다.

    그 대신에 그들은 예술시를 위해 새로 획득한 분야에서 자유롭게 움직였다. 그들의 주요 목적은 낭송할 때에 개별적인 노래들이 가능하면 아릅답고 밝은 효과를 내도록 하는 일이었던 것 같다. 이 시들을 한 토막씩 훌륭하게, 목소리와 몸짓에 가볍게 코믹한 요소를 넣어 낭송하는 것을 들으면 대단히 특별한 효과를 내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격 묘사가 더욱 깊고 완성된 것이라 해도 이 효과를 높이는 데 특별히 기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읽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원했을지 모르지만 듣는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언제나 일부만을 듣기 때문이다.

    앞에서 서술한 중세의 인물들과 관련해서 시인의 감정은 이중적인 것이었다. 시인의 인문주의적 교양은 이 인물들이 가지는 중세적인 본질에 저항감을 느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싸움은 당시 유행하던 마상 창시합과 전투의 옆모습 격이라, 가능한 온갖 지식과 시적인 헌신을 요구했다. 동시에 낭송할 때에 빛나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래서 풀치Luigi Pulci 도 기사도에 대한 패러디로 넘어가지는 않았다. 

     

    Luigi Pulci by Filippino Lippi .

     

    비록 샤를마뉴 대제의 12기사들의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거친 말투가 어느 정도 그런 인상을 주기는 하지만. 그와 나란히 그는 싸움을 좋아하는 이상적 전형으로 익살스럽고 선량한 모르간테Morgante를 내세웠다. 모르간테는 종의 추를 가지고 군대 전체를 통제하였다. 작가는 어리석고도 대단히 주목을 끄는 괴물 마르구테를 그에게 맞세움으로써 다시금 모르간테를 상대적으로 정화시킨다. 그러나 풀치는 이들 거칠고 기운찬 두 인물에게 특별한 무게들 두지 않는다. 이들 두 사람이 이야기에서 사라져 버리고 난 다음에도 그의 이야기는 기이한 방식으로 계속 진행된다. 보이아르도 또한 완전한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인물들 위에 군림하면서, 자기 좋을 대로 진지하거나 우스꽝스럽게 그들을 이용했다. 악마적인 존재들까지도 이용해서 재미를 느꼈으며 때로는 그들을 일부러 무례한 존재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그가 풀치처럼 진지하게 여겼던 예술적 과제는 없었다. 즉 모든 과정을 극단적으로 생동적이고 기술적으로 정밀하게 묘사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풀치는 시 작품이 하나 완성되면 곧장 로렌조 일 마니피코의 주변 모임에서 낭송했다. 그리고 보이아르도는 자신의 시를 페라라의 에르콜레 궁정에서 낭송했다. 그러므로 여기서 어떤 종류의 이점을 노렸을지, 그리고 정밀한 인물 묘사가 얼마나 감사를 얻지 못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작품 자체도 이런 상황에서는 완결된 전체를 이루지 못하고, 원래의 절반 길이나 두 배 길이로 만들어질 수도 있었다. 그들의 서사시 작품의 구성은 위대한 역사적 상像의 구성이 아니라, 띠 장식 구성이거나 아니면 다양한 인물들이 주변에 장식된 화려한 꽃줄 장식 구성이었다. 띠 장식의 모양과 덩굴에서 세밀한 개인적 형식, 깊은 전망, 다양한 구상 등을 요구하거나 허용하지 않듯이 이런 작품들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특히 보이아르도가 계속 새로이 만들어내는 놀랍도록 다양한 창안들은, 서사시의 본질에 대해서 우리 시대에 타당한 모든 학교식 정의를 비웃는다. 당시로서는 그것이 고대의 열광에서 벗어나는 가장 쾌적한 방식이었다. 독자적인 이야기 문학에 도달하려고 한다면 그것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출구였다. 고대의 이야기를 서사시로 만드는 것은, 페트라르카가 라틴어 6운각 형식으로 쓴<아프리카>에서 경험한 저 잘못된 좁은 길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150년 뒤에 트리시노가 <고트족에게서 해방된 이탈리아>에서 한 것처럼 무운 11운각 시행을 쓰는 방식이 있었다. 이것은 흠잡을 데 없는 언어와 시행을 가진 엄청난 규모의 서사시였지만, 다만 이 불행한 결합에서 어느 쪽이 더 손실을 입었는지, 이야기인지 아니면 시인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단테는 자신을 모방하는 사람들을 어디로 잘못 인도했던가? 페트라르카의 환상적인 <트리온피>는 전혀 고급 취향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작품이다. 보카치오의 <사랑스러운 환상>은 알레고리 범주에 따라 역사적, 우화적 인물을 단순히 나열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외의 사람들은 무엇인가 내놓으려고 하면 단테가 처음으로 만들어낸 작품의 바로크식 모방으로 시작했다. 그들은 단테에서 베리길리우스가 차지한 알레고리 동반자를 취하였다. 우베르티는 지리학적인 내용의 운문 <디타몬도>를 위해서 솔리누스를 동반자로 선택했고, 조반니 산티는 우르비노의 페데리고를 찬양하는 시에서 플루타르크를 선택했다. 한동안은 풀치와 보이아르도가 대표하던 서사문학만이 이런 잘못된 여행에서 벗어나 있었다. 사람들이 그들의 작품에 대해 보인 열망과 경탄은 - 아마도 서사시의 마지막 날까지 다시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 이 일이 얼마나 필요한 것이었나를 잘 증언해준다. 오늘날 우리 세기에 호메로스와 <니벨룽겐>에서 이끌어낸 참된 영웅문학의 이상이 이 창작품들에 실현되어 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기 시대의 이상을 실현하였다. 우리에게는 가장 피곤하게 여겨지는 대규모 전투의 서술들을 통해서 그들은 우리로서는 제대로 상상하기 힘든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을 충족시켰다. 생생한 순간 묘사에 대한 높은 평가 자체가 우리에게 잘 이해되지는 않지만. 

    아리오스토

    마찬가지로 아리오스토의 <분노한 오를란도>를 읽으면서 인물 성격을 따르는 것보다 더 잘못된 척도도 없다. 그런 묘사는 여기저기 등장하고 때로는 애정을 가지고 다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시 작품은 단 한순간도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 있으며, 그것을 드러내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아진다. 이런 인물의 성격에 대한 요구는 더욱 보편적인 열망과 연관된 것인데 아리오스토는 우리 시대의 감각으로 보면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즉 오늘날 사람들은 그토록 재능이 풍부하고 유명한 작가에게서 오를란도의 모험과는 전혀 다른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위대한 작품에서 인간 심정의 가장 깊은 갈등, 신과 인간의 일에 대한 시대의 가장 높은 관점들을,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신곡>이나 파우스트가 보여주는 것 같은 완결된 세계상을 하나 제시해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렇게 하는 대신에 아리오스토는 당시의 조형 예술가들처럼 작업했다. 그는 오늘날 우리의 감각으로 생각하는 독창성에서 벗어나, 잘 알려진 인물 유형을 계속 이용하고, 심지어는 이미 묘사된 디테일도 쓸모가 있으면 한 번 더 이용함으로써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이렇게 작업해서 도대체 어떤 이점들을 얻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은 예술가적 소질이 없는 사람들로서는, 아무리 학식이 풍부하고 재치가 있다 하더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아리오스토의 예술적 목표는 광채가 나도록 생생한  '사건'이다. 그것을 위해서 그는 더욱 깊은 인물 묘사만이 아니라, 훨씬 엄격한 사건 맥락도 배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린 실마리를 자기가 원하는 곳에서 다시 연결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의 인물들은 더욱 깊은 개성적 본질 때문이 아니라, 작품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등장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물론 겉보기에 비합리적이고 제멋대로인 이런 구성 방식 안에서 그는 나름대로 법칙에 맞는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그는 서술 안으로 완전히 몰입하는 일이 없다. 언제나 사건의 진행과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는 만큼만 장면과 인물을 묘사하였다. 대화나 독백 속으로 몰입해서 자신을 잊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도입된 대화는 다시 이야기가 되곤 한다. 그는 모든 것을 생생한 과정으로 형상화하는, 진정한 서사시의 대가적인 특권을 유지하였다. 그의 경우에 열정은 절대로 말 속에 있지 않았다. 오를란도의 분노를 서술한 저 유명한 23번과 24번 노래조차도 완전히 열정을 담은 것이 아니다. 영웅 서사시에서 사랑 이야기가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이점이 된다. 때때로 사랑 이야기들은 그것들을 둘러싼 온갖 마법이나 기사도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진실성과 현실성을 지녀서, 이 이야기들 안에서 시인 자신의 경험을 본다고 믿을 정도이다. 그는 자신의 대가적인 능력을 완전히 의식한 상태에서 수많은 현실의 사건들을 위대한 작품 안에 주저없이 엮어 넣었다. 그리고 에스테 가문의 명성을 현상과 예언의 모습으로 작품 안에 끼워 넣었다. 그의 8행시들의 경이로운 흐름은 이 모든 것을 적절한 동작으로 앞으로 몰아간다.

    기사도에 대한 패러디

    테오필로 폴렝고, 혹은 그가 스스로를 지칭하듯이 리메르노 피토코와 더불어 기사도 전체에 대한 패러디가 정당성을 얻게 된다. 그러나 희극 및 희극적 사실주의와 함께 필연적으로 더 엄격한 성격 묘사도 나타난다. 로마시대, 시골 도시 수트리의 사나운 부랑아들이 때리고 돌을 던지고 하는 가운데 <작은 오를란도Orlandino>는 용감한 영웅으로, 수도사들의 적이자 수다쟁이로 성장한다. 풀치 이후로 형성되어, 서사시의 틀로 여겨지던 관습적인 환상 세계가 여기서 갑자기 산산조각나고 만다. 12기사의 출신과 본질은 자주 비웃음을 당한다. 예를 들면 <작은 오를란도> 2번 노래에 나오는 나귀 무술 시합 같은 것을 통해서다. 여기서 기사들은 이상한 갑옷과 무기를 들고 나온다. 시인은 때때로 가노 폰 마잍츠의 가족들 사이에서 보통으로 나타나는 설명할 길 없는 불충 행위에 대해서 희극적인 유감을 표현한다. 그는 우스꽝스러운 발상, 에피소드, 돌발적인 사건들(그것들 중에는 6장의 마지막처럼 아주 아름다운 것들도 있다). 음담패설 등을 위해서 전통적인 것들을 이용한다. 그 모든 것과 아울러 마지막에는 아리오스토에 대한 조롱도 슬며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작은 오를란도>가 루터파 이단 사상으로 인해서 상당히 일찌감치 종교재판의 손에 떨어졌다가 곧 이어서 예술적으로 망각되고 말았다는 것이 <분노한 오를란도>에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콜론나 가문이 오를란도의 후손이고, 오르시니 가문이 리날도의 후손이며, 에스테 가문이 -아리오스토에 의하면-루지에로의 후손이라고 하는 판이니, 그렇다면 곤차가 가문은 12기사 중 하나인 귀도네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면 여기서 진짜 패러디를 볼 수 있다. 어저면 시인의 후원자였던 페란테 곤차가는 에스테 가문에 대한 이런 비꼬는 말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타소Torquato Tasso의 <해방된 예루살렘>에서 인물의 성격이 이 시인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의 하나였다는 사실은, 그의 사고 방식이 약 50년 전에 지배적이던 사고 방식에서 얼마나 멀리 벗어나 있는가를 입증해준다. 경탄할 만한 그의 작품은 본질적으로 그사이 완성된 반종교개혁과 그 경향의 기념비가 되는 것이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