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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의 발견 : 문학에 나타난 정신의 묘사 II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4. 13. 11:14

     

    소네트 형식

    그와 나란히, 13세기 전반에 훨씬 더 엄격한 시 형식이 만들어 진다. 유럽 전체가 만들어낸 형식으로 이탈리아에서 지배적인 형식이 되었으니, 곧 소네트이다. 처음 1백년 동안에는 운율과 시행의 숫자도 고정되지 않았다가 페트라르카가 현재의 형식을 정착시켰다. 이 형식으로 처음에는 더 고상한 서정시와 명상적 내용이, 나중에는 온갖 내용의 시들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마드리갈, 6행시, 심지어는 칸초네까지 뒤로 밀렸다. 후세의 이탈리아 사람들은 때로는 농담조로 때로는 불쾌한 심정으로 이 형식을 탄식하였다. 그것은 감정과 사상을 14행에 맞추는,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식의 시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바로 이 형식에 대단히 만족하였다. 그러면서 이 형식을 수없이 이용하여 온갖 추억을 담거나 아니면 전혀 진지하지도 않고 아무런 필연성도 없는 한가로운 노래를 만들곤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소네트도 많지만 형편없는 소네트도 많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소네트는 이탈리아 시문학에 엄청난 축복이었다. 그 형식의 분명함과 명료함, 더욱 생동적으로 구성된 후반부에 내용을 강화시키라는 요구, 그리고 외우기가 쉽다는 점 등은 위대한 거장들에게 언제나 거듭 사랑받고 소중한 형식으로 취급되는 이유였다. 소네트의 높은 가치를 확신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오늘날까지 그것을 유지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들 대가들은 극히 다양한 다른 시 형식들도 동일한 힘을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소네트를 서정시의 주요 형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제한된 재능을 가진 작가들, 더 큰 형식에서라면 재능을 펴지 못했을 작가들도 자신들의 감정을 이 형식 안에 집중시키게 되었다. 소네트는 다른 어떤 근대적인 국민도 갖지 못한 사상과 감정의 응축 장치였다. 

    그리하여 이탈리아의 감정 세계는 명확하고 집중되고 간결한 형식에서 극히 효과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다른 국민들도 이러한 종류의 전통적인 표현 형식을 가졌다면 우리는 아마도 그들의 내면 세계에 대해서도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적, 외적 상황의 묘사들과 기질이 반영된 그림들을 가졌을 것이고, 14세기와 15세기의 명칭만의 서정시에 의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경우에 소네트의 발전 과정은 거의 그 탄생 순간부터 알려져 있다. 최근에 명칭이 붙여진 대로 '변화하는 음유시인들'은 13세기 후반부에 음유시인에서 고대의 영향을 받은 시인으로의 이행 과정을 겪는다. 소네트와 다른 시 형식들에 나타난 단순하고 강한 감정, 강화된 상황 묘사, 정확한 표현과 종결 등은 단테 같은 시인이 나타날 것을 예고한다. 교황당과 황제당의 당파 소네트들은(1260~1270) 단테의 정열과 같은 방식의 음조를 드러내고, 다른 것들은 그의 서정시의 가장 달콤한 요소를 생각나게 한다. 

    시인 단테

    단테 자신이 소네트를 이론적으로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의 저서인 <이탈리아어에 대하여De Vulgari Eloquentia>의 마지막 책들에서 발라드와 소네트 형식을 다룰 생각이었는데, 이 부분을 쓰지 않았거나 아니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가장 훌륭한 내적 체험의 묘사들을 소네트와 칸초네 형식에 담아놓았다. 그것도 어떤 틀 안에 그것들을 담았던가! 

     

    Botticelli, Vergil and Dante

     

    <새로운 생활Vita nuova>에서 그는 모든 시 형식의 기원을 밝히고 있는데 여기 씌어진 산문은 운문만큼이나 경이롭고, 산문과 운문이 한데 어울려서 가장 깊은 광채로 채워진 전체를 형성한다. 영혼에 대해 거의 냉혹한 태도로 그는 영혼의 즐거움과 고통의 온갖 명암들을 확인하고, 이 모든 것을 확고한 의지력으로 가장 엄격한 예술 형식으로 표현한다. 이 소네트와 칸초네들, 그 사이로 그의 젊은 시절의 일상을 기록한 이 경이로운 파편들을 조심스럽게 읽으면, 마치 중세 전체를 통해서 모든 시인들이 자기자신을 피해온 것처럼, 그리고 그가 처음으로 자신을 찾으려 애쓴 것처럼 느껴진다. 그 이전에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예술적인 시련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단테야말로 처음으로 완전한 의미에서의 예술가이다. 그가 의식적으로 불멸의 내용을 불멸의 형식 안에 담아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관적인 서정시는 완전히 객관적인 위대함을 지닌다. 이 작품들은 대부분이 아주 철저한 작업을 거친 것이어서 모든 시대 모든 민족이 그것을 익히고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객관적으로 시를 써서 자기감정의 힘을 오로지 자기 밖에 있는 사정들만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도록 만든 것들, 즉 <매우 고상한> 혹은 <분명하게 본다> 등과 같은 위대한 소네트들에서 아직도 자신이 변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그의 시편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 여기 속한다. 바로 <오, 깊은 생각에 잠겨 걷는 순례자들이여> 등이다. 

    <신곡>이 없었더라도 단테는 젊은 시절의 시만으로도 벌써 중세와 현대의 이정표가 되었을 것이다. 정신과 영혼이 여기서 갑작스럽게 그 비밀스러운 내면의 인식을 향하여 큰 걸음을 옮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편들에 뒤이어서 <신곡>이 어떤 계시들을 포함하고 있는가는 이루 다 측량할 수 없을 정도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위대한 작품의 가치를 완전히 밝히기 위해서는 노래를 하나하나 다 읽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럴 필요는 없다. <신곡>은 이미 오래 전부터 모든 유럽 국민들 사이에 일용할 양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작품의 성향과 기본 사상은 중세에 속하고, 우리의 의식에는 오로지 역사적인 것으로만 여겨진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근본적으로, 모든 단계, 모든 변화 과정에 있는 인간에 대한 묘사의 풍부함과 그 높은 조형적인 힘 때문에 모든 현대시가 시작되는 곳이다. 

    그 이후로 시문학은 계속적으로 흔들리는 운명을 맞이하다가 반세기 뒤에는 이른바 퇴행을 보인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시에서 더욱 높은 생명의 원칙은 영원히 구원되었고, 14,15세기와 16세기 초에 이탈리아에서 깊고도 독창적인 정신이 시문학에 자신을 바치던 시기에, 이 정신은 이탈리아 밖의 다른 어떤 시인보다도 근본적으로 더 높은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재능이 똑같다고 전제를 할 경우에 말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경우 다른 모든 일에서도 교양이 조형 예술보다 먼저 나타난다. 교양이 결정적인 자극을 해주어야만 조형 예술이 나타나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단테 이후 1백 년도 더 지나서야 단테에게서 나타나는 정도의 정신적인 요소, 내적인 삶 등이 조각과 회화 작품에도 등장한다. 이런 사정이 다른 국민의 예술 발전에서 어느 정도나 타당한지, 그리고 이런 질문이 전체적으로 얼마나 가치 있는 질문인지는 여기서 논할 바가 아니다. 이탈리아 문화에서 그것은 결정적인 무게를 지닌다. 

    시인 페트라르카

    이런 맥락에서 페트라르카가 어떤 지위를 차지할 것인지는 광범위한 독자층을 확보한 이 시인의 독자들이 결정해야 할 것이다. 심판관의 의도를 가지고 그에게 접근해서, 인간 페트라르카와 시인 페트라르카 사이의 모순, 입증된 애정 행각들, 그 밖에도 다른 약점들을 부지런히 탐색하는 사람들이라면, 어느 정도 노력을 하고나면 실제로 그의 소네트에 대한 즐거움을 완전히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시적인 즐거움 대신 인간을 '총체적'으로 알게될 것이다. 다만 유감인 것은 페트라르카의 편지들이 아비뇽의 소문을 거의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한 작가가 어떻게, 그리고 어떠한 싸움을 해서 자기 주변과 자신의 가련한 삶에서 불멸성을 확보했는지를 탐구할 필요가 없다면 하늘에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감사하는 대신에 - 아마도 페트라르카 자신을 위해서이겠지만 - 이런 종류의 얼마 안 되는 '유품'들에 고발장처럼 보이는, 그의 삶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그 밖에도 시인은 다음과 같은 말로 스스로를 위안할지도 모른다. 유명한 사람들이 교환한 편지를 인쇄하고 가공하는 일이 도이칠란드와 영국에서 50년만 더 계속된다면, 자기가 앉혀진 사형수 의자는 앞으로도 가장 고귀한 사람들을 더 많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페트라르카가 단순히 모방을 했던 곳에서, 그리고 자기 식으로 시를 쓴 곳에서 나타나는 인공적이고 억지로 만들어진 많은 요소들을 놓치지 않고서도, 우리는 그에게서 영적인 표현들의 풍부함, 자기 자신의 것이 분명한 행복하고 불행한 순간들의 묘사 등을 보면서 경탄하게 된다. 그 이전에는 누구도 그런 표현들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런 표현들은 자기 국민과 세계 앞에서 그의 가치가 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표현은 어디서나 고르게 분명한 것은 아니다. 드물지 않게 가장 아름다운 표현과 우리에게 낯선 표현이 뒤섞여 있고, 알레고리식의 장난과 재치있는 궤변이 뒤섞여 있다. 다만 탁월한 부분이 훨씬 더 우세하다. 

    시인 보카치오

    보카치오도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그의 소네트 작품들에서 때때로 자기 감정을 훌륭하게 표현하였다. 사랑을 통해서 성스럽게 된 장소를 다시 방문하는 것(소네트 22번), 봄의 우수(소네트 33번), 나이 들어가는 시인의 우울한 심경(소네트 65번) 등은 그가 아주 훌륭하게 노래한 것들이다. 

    그 밖에도 보카치오는 <아메토 요정 이야기>에서 고귀하게 순화시키는 사랑의 힘을 묘사하였는데, 이것은 <데카메론>을 쓴 작가에게서 기대하기 힘든 방식이다. 그의 <피암메타>는 고르게 균형잡히지도 않았고, 구절에 따라서는 화려한 울림을 보이는 문구를 향한 애착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가장 깊은 관찰로 가득 찬 위대한 영혼의 그림이다. 불행하게도 신화와 고대도 때때로 여기에 섞여든다. 필자가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니라면 <피암메타>는 단테의 <새로운 생활>에 대한 여성적 짝이거나 아니면 어쨌든 어느 정도 이것의 자극을 받고 만들어진 것이다. 

    고대의 시인들, 특히 비가 시인들, 그리고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아스 이야기>의 제4권 등이 이들 시인들과 그 이후의 이탈리아 시인들에게 영향이 없지는 않았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감정의 원천은 그들 내면에서 충분히 강력하게 솟구쳐 나왔다. 이러한 특성을 놓고 그들과 이탈리아 밖의 동시대 사람들을 비교해본다면, 이들 이탈리아인들에게서 현대 유럽의 감정 세계가 가장 일찍 완전하게 표현된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는 다른 민족의 탁월한 사람들이 그들과 똑같이 깊고도 아름다운 느낌을 가졌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맨 먼저 영혼의 움직임에 대해 가장 풍부한 지식을 보였느냐를 말하는 것이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크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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