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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경의 아름다움을 발견함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4. 6. 10:37

     

    탐구해서 아는 것 말고 자연에 가까이 가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그것도 아주 특별한 의미에서 자연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현대인들 중에서 가장 먼저 풍경의 모습을 아름다운 것으로 지각하고 즐겼던 사람들이다. 

    이런 능력은 오랜 시간의 복잡한 문화 과정의 결과이며, 그 시작을 알아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런 종류의 감추어진 감정은 문학과 그림에 등장하고 그럼으로써 스스로 의식하기 오래 전부터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고대인들의 경우에 예술과 문학은 인간의 삶의 묘사를 어느 정도 완성한 다음에야 풍경 묘사로 넘어갔다. 다른 한편 호메로스 이후로는 자연이 인간에게 미친 강렬한 인상이 수많은 말들과 시구로 만들어져 나왔다. 이후 로마제국의 폐허에 지배권을 구축한 게르만 종족들은 천성적으로 가장 높은 의미에서 자연 풍경 속에 있는 정신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한동안 기독교가 그들로 하여금, 이때껏 존경하던 샘들과 산들, 호수와 숲에서 거짓된 악마의 얼굴을 보도록 하였지만, 이런 과도기는 금방 지나갔다. 중세 전성기인 1200년경에는 다시 외부 세계를 즐기는 완전히 소박한 자세가 존재하게 된다. 여러 민족의 연가시인들에게서 그것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이 사람들은 봄과 봄의 꽃들, 녹색 초원과 숲 같은 극히 단순한 현상에 대해서도 강한 공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것은 원근법이 없는 전면일 뿐이다. 멀리까지 여행한 십자군 참가자들 경우에도 의상과 무기에 대해서는 아주 상세한 묘사를 하는 서사시도 장소의 묘사에서는 스케치 수준일 뿐이다. 위대한 볼프람 폰 에센바흐도 인물들이 움직이는 배경장면을 충분히 그려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방랑 수도사들의 라틴어 시들에도 배경과 풍경을 보는 눈길이 없다. 그러나 때로 가까운 주변은 어떤 연가시인도 표현해 본 적이 없는 빛나는 색채로 그려지고 있다. 다음의 시를 보자. 이 12세기 이탈리아 작가가 보여준 것 같은 사랑의 숲의 묘사가 또 있을까?

    그곳에선 누구나 

    불사의 존재가 된다. 

    거기선 나무마다

    열매가 가득 매달리고

    길들은 몰약, 계피,

    향초 냄새로 향기롭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자연은 이미 오래 전부터 죄가 없고, 악마의 온갖 간섭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아시지의 성 프란체스코는 태양 찬가에서 전혀 해롭지 않게, 주님께서 천상의 빛들과 4원소를 창조하신 것을 찬양한다.

     

    풍경을 느낌 : 페트라르카

    위대한 자연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감정에 불러일으키는 깊은 작용에 대한 확고한 증거는 단테에게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는 몇 줄의 시 안에, 부드럽게 찰랑이는 바다의 떨리는 빛을 머금은 아침 공기, 숲의 폭풍 등을 설득력 있게 묘사할 뿐만 아니라 단지 먼곳의 경치를 즐길 생각으로 높은 산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어쩌면 고대 이후로 이런 일을 맨 처음으로 행한 사람들 중에 하나일 것이다. 보카치오는 그가 묘사했던 것 이상으로 풍경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음을 짐작케 해준다. 그의 목동 소설에서는 적어도 그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자연 풍경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가장 최초의 완전한 현대인의 한 사람인 페트라르카는 감흥받기 쉬운 영혼에 풍경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완전하고도 확고한 태도로 증언한다. 온갖 문학 작품들에 나타난 그림같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향한 감각의 시작과 발전을 요약하고, <자연의 여러 모습>에서 스스로 자연 묘사의 최고 걸작품을 완성한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페트라르카를 완전히 정리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위대한 추수꾼이 지나간 자리에도 주울 이삭 몇 가닥이 남았다. 

    페트라르카는 중요한 지리학자이자 지도학자였을 뿐 아니라 - 이탈리아 최초의 지도는 그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한다 - 고대인들이 말한 것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직접 느꼈다. 그에게 자연을 즐기는 것은 모든 정신적인 활동에 따르는 가장 바람직한 동반자였다. 그는 정기적으로 시대와 세상에서 도망쳐 보클뤼즈와 그 밖의 장소에서 공부하면서 은둔 생활을 했는데, 이 생활은 두 가지, 곧 정신적 활동과 자연을 즐기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의 자연 묘사 능력이 아직도 모자라고 그다지 발전되지 못한 것을 감정의 결핍 탓으로 돌린다면 공평하지 못한 일이다. 예를 들어 그때까지 고대인이나 근대인 그 누구도 그런 것을 노래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페트라르카는 암벽 풍경의 아름다움을 잘 알고 있었고, 풍경의 아름다움의 중요성을 그 실용성과 구분할 줄 알았다. 레지오의 숲에서 머물 때 위대한 풍경의 갑작스러운 모습이 강렬한 인상을 주자 그는 오래 전에 중단했던 시를 계속 쓰게 된다. 

    그러나 아비뇽에서 멀지 않은 방투 산에 올라갔을 때 가장 참되고 깊은 자극이 일어났다. 광범위한 전망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욕망이 내면에 솟구쳐 오르고 있을 때 그는 리비우스가 쓴 구절, 즉 로마의 적인 필립왕이 하이무스산에 올라서 결정을 내리는 구절을 읽었다.

     

    Ventoux mountains

     

    그는 이 글을 보고, 나이 든 왕이 이런 일을 하고 비난을 받지 않는다면 개인 신분의 젊은이가 같은 일을 해도 용서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당시 상황에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산에 오르는 것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일이었던 것이다. 페트라르카는 동생과 시골 사람 둘을 데려갔다. 그들은 말할 수 없이 고생을 하면서 산을 올랐다. 마침내 구름이 발 아래 떠다니고 그들은 정상에 도달했다...

    몇십 년 뒤인 1360년에 파치오 델리 우베르티는 운을 맞추어 쓴 세계지 책에서 알베르니아 산에서 본 광범위한 전망을 지질학자 겸 고대학자로서의 관심만으로 서술하였다. 분명히 그는 자기가 정말 본 것을 적었다. 그러나 그는 그보다 훨씬 높이 올라가 본 것이 확실하다. 해발 3,300미터 이상이 되어야 나타나는 현상들, 고산병 징후들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15세기에 갑자기 플랑드르 유파의 거장들, 곧 후베르트와 얀 반 아이크가 가 자연을 그림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의 풍경화는 현실이라는 인상을 불러일으키려는 노력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대단히 편파적인 것이긴 하지만 이미 독립적이고 시적인 내용, 곧 영혼을 지닌 것이었다. 서양 미술 전체에 미친 그들의 영향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고, 이탈리아의 풍경화들도 그 영향을 전혀 안 받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교양있는 이탈리아인들의 자연 풍경에 대한 독특한 관심은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에네아스 실비우스의 자연에 대한 감정

    학술적인 세계지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이 분야에서도 에네아스 실비우스는 이 시대의 중요한 목소리들 중의 하나이다. 에네아스 실비우스이외의 어떤 사람도 시대와 정신 문화의 상을 그토록 완벽하고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는 경우가 드물고, 다른 어떤 사람도 초기 르네상스의 평범한 인간에 그토록 가까이 접근한 예가 드물다. 그는 이탈리아 풍경의 장엄함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세부에 이르기까지 열광적으로 서술한 최초의 사람으로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교황국 로마와 남 토스카나(그의 고향) 지방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교황이 되자(피우스 2세) 좋은 계절이면 여가 시간을 소풍과 시골에 머무는 것으로 보냈다. 그는 <주석>에 쓴 아름답고 생생한 라틴어로 아무 거리낌 없이 자기 행복의 증언을 기록하였다. 

    그의 안목은 현대인의 그것처럼 다양한 훈련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알반 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카보 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전망의 위대한 파노라마를 황홀경에 빠져 바라보았다...

     

    Alban mountains

    그는 종종 추기경 회의와 외교관 알현을 오래된 커다란 밤나무나 올리브나무 아래에서, 아니면 초원이나 솟아나는 샘물 옆에서 열었다. 점점 좁아지는 숲의 협곡 위에 대담하게 아치를 이룬 다리가 놓인 풍경을 보면 그는 곧장 거기서 높은 의미를 찾아냈다. 세세한 부분들까지도 아름다운, 혹은 완벽하게 구성된 특징적인 모습에서 그는 기쁨을 얻었다. 녹색 물결을 이룬 아마밭들, 언덕을 뒤덮은 노란색 가시금작화, 그리고 심지어는 온갖 종류의 야생 관목과 각각의 화려한 나무와 샘물들, 이 모든 것이 그에게는 자연의 기적처럼 보였다. 

    1462년 여름 흑사병과 더위가 저지대에서 기승을 부릴 동안 그는 아미아타 산에 피신해 있으면서 풍경 탐닉의 절정에 도달한다...이것은 본질적으로 현대적인 즐거움이요, 고대인들도 비슷한 것을 느꼈을테지만 이런 즐거움에 대해 표현한 것은 많지 않았고, 그러므로 고대인들의 발언이 그의 내면에 이런 열광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인문주의자들의 풍경시

    뒤이어 15세기말과 16세기 초에 라틴어 문학과 나란히 나타난 이탈리아어 문학의 두 번째 전성기에는 주변 풍경이 인간의 심성에 미친 강한 작용에 대한 증거들이 풍부하다. 그것은 당시 서정시인들을 잠깐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위대한 풍경들을 묘사한 것은 이 시대에도 드물다. 이 정력적인 시기에 서정시, 서사시, 단편소설 등은 다른 곳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이아르도와 아리오스토는 자연 풍경을 대단히 훌륭하게 묘사하였지만 가능한 한 짧게 했기 때문에 먼 곳과 원대한 배경을 통해서 분위기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분위기는 오로지 인물들과 사건들에 의해서만 결정되었다. 점점 커지고 있던 자연에 대한 감정을 위해서는 명상적인 대화 서술자와 편지 작가들이 시인들보다 더욱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마테오 반델로는 자신의 문학 장르의 법칙을 정립하였다. 그는 소설을 쓸 때 자연 환경에 대해서는 꼭 필요한 것 이외에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야기에 앞서서 나타나는 헌사에서는 자연 묘사가 대화와 사교를 위한 무대 배경으로 나타난다. 편지작가들 중에서는 아레티노가 처음으로 화려한 저녁빛과 구름의 효과를 언어로 바꾼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시인들 중에서도 이따금 자신의 감정과, 장르에 맞게 서술된 자연 풍경을 특이하게 뒤섞은 경우들이 나타난다...사실주의와 더불어 성장한 화가가 현실 묘사를 덧붙여 넣는 것과, 이상과 신화로 자신을 꾸민 작가가 내면의 충동을 느껴서 현실로 내려 서는 일은 서로 완전히 다른 일이다. 그 밖에도 시기적으로 앞섰다는 점, 시골 생활의 서술이라는 점에서 이탈리아 시인들이 유리하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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