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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네상스의 아틀리에 활동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4. 9. 12:24

     

    도제들의 수련과정은 아직도 중세의 전통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처음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온갖 궂은일, 예컨대 색채의 조합, 화필의 수선과 정리, 그림의 초벌칠 등을 하는 데에서 시작하여 그후는 화고의 여러 구도들을 화면에 옮기는 일, 착의의 여러 부분과 중요하지 않은 인체의 부분들을 그리는 일을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장인의 스케치나 지시를 바탕으로 화면 전체를 그려내는 일까지 하였다. 이런 식으로 해서 도제는 점차 어느정도 독자적으로 일할 수 있는 조수가 되는데, 물론 이러한 조수는 일반적으로 제자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한 장인의 조수라고 해서 모두 다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고, 또 모든 제자가 다 언제나 스승 옆에서 조수 노릇만 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조수가 자기 스승과 맞먹는 예술가일 수도 있었고, 때로는 아틀리에의 주인으로부터 사역만 당하고 그야말로 비인격적인 도구 역할 밖에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같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결합 가능성과 또 장인, 조수, 도제들이 자주 같은 작품을 두고 함께 일을 하기 때문에 때로는 매우 분석하기 힘들 정도의 양식 혼합이 생겨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로 인해 개인적인 차이가 실질적으로 융화된 하나의 공동 형식을 낳으며 이러한 공동 형식에서는 무엇보다도 수공업적 전통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전기를 통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건 - 실제이든 허구이든 간에 - 즉 제자가 자신의 경지를 휠씬 뛰어넘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 예술을 포기하는 경우 (치마부에와 지오토, 베로키오와 다빈치, 프란치아와 라파엘로)는 작업공동체가 이미 해체되어가고 있는 좀더 후기의 발전단계를 나타내는 것이거나, 아니면 베로키오와 다빈치의 예처럼 그러한 일화가 말해주는 것보다 휠씬 더 현실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베로키오가 그림그리기를 그만두고 조각에만 전념한 것은 아마 다 빈치만한 조수라면 그림 그리는 일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The Baptism of Christ 1470-1475 ca / 왼쪽 천사가 도제시절 다 빈치의 작품 

     

    초기 르네상스 예술가 아틀리에는 아직도 수공업자 조합이나 길드의 작업장이 지녔던 공동체 의식에 의해 운영되었다. 말하자면 예술품은 아직도 독자성과 특성을 강조하거나 아니면 외부적인 요소를 일체 배격하는 어떤 한 개인의 표현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일이 끝날 때까지 혼자서만 작품을 완성하고자 하고 제자와 조수들과는 도저히 같이 일할 수 없다는 생각은 미켈란젤로에 와서야 비로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 점에서도 미켈란젤로는 최초의 현대적인 예술가인 셈이다. 15세기 말엽에 이르기까지 미술품의 제작과정은 아직도 순전히 집단적 형태를 띠고 있었다. 광범위한, 그중에서도 특히 대규모 조각품을 만드는 사업을 감당해내기 위해서 사람들은 많은 조수와 잡역부를 쓰는 공장 비슷한 조직을 만들었다. 콰트로첸토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예술사업이었던 피렌체 세례당의 문을 만드는 일을 할 당시 기베르티의 아틀리에는 무려 20여 명의 조수를 기용하였다. 거대한 벽화를 완성할 때도 길란다이오와 벤투리키오는 많은 수의 화가와 조수로 구성된 스태프를 거느리고 있었다. 특히 자기의 형제들과 처남이 상임조수로 있던 길란다이오의 작업장은 폴라이우올로의 아틀리에 및 델라 롭비아의 아틀리에와 더불어 15세기에 가장 규모가 큰 가족기업의 하나였다. 그밖에도 예술가라기보다는 기업가로서 아틀리에를 소유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주문만 받아서는 적당한 예술가에게 시켜 완성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으로는 한때 여러 예술가와 함께 다 빈치까지 고용했던 밀라노의 에반젤리스타 다 프레디스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기업의 성격을 띤 공동체 작업 형태 이외에도 콰트로첸토에 볼 수 있는 것은 대체로 아직도 나이가 젊은 예술가가 독자적인 아틀리에를 경영할 경제적 능력이 없기 때문에 두 사람이 힘을 합쳐 동지적 관계에서 하나의 작업장을 만드는 경우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예컨대 도나텔로와 미켈로초, 프라 바르텔로메오와 알베르티넬리, 사르토와 프란치아비지오는 공동으로 작업을 하였다. 이렇게 우리는 어디서나 예술적 노력의 개별화를 막는 초개인적인 작업 형태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정신적인 공동체로의 이러한 일반적 경향은 평면적으로뿐만 아니라 수직적으로도 작용하고 있다. 당대의 대표적인 예술가들은 스승과 제자라는 일련의 긴 계보를 이루고 있는데, 예컨대 프라 안젤리코 - 베노초 고촐리 - 코시모 로셀리 - 삐에로 디 코시모 - 안드레아 델 사르토 - 폰토르모 - 브론치노로 이어지는 계보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계보에 의해서 일관된 예술형식의 전통이 이어지며, 또 이와같은 전통 속에서 발전의 주류가 뚜렷이 부각되는 것이다. 

    콰트로첸토를 지배한 수공업적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예술가의 아틀리에가 순전히 공예적인 성격의 자잘한 주문들을 자주 받았다는 사실이다. 일거리가 아주 많았던 한 화가의 아틀리에에서 얼마나 많은 수공업적 작품이 제작되었는가를 우리는 네리 디 비치가 남긴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의 아틀리에에서는 그림말고도 문장과 깃대, 상점의 간판, 상감세공, 채색목조, 카펫공이나 자수공을 위한 모형, 축제를 위한 장식품 등 수많은 물건들이 제작되었다. 이미 명망있는 화가이자 조각가였던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까지도 여전히 금은세공 작업장을 경영했고, 그의 아틀리에에서는 조각품과 금은세공 이외에도 태피스트리와 동판화를 위한 모형을 그렸다. 베로키오 역시 그가 예술가로서 정점에 다다랐을 당시에도 아직 갖가지의 테라코타 세공이나 목조일을 떠맡았으며 도나텔로도 자신의 후원자인 마르텔리를 위해서 그의 유명한 문장뿐만 아니라 심지어 은으로 된 거울까지 만들었다. 루카 델라 로비아는 교회와 개인 저택을 위해서 도제 타일을 만들었고, 보티첼리는 자수의 모형을 만들었으며, 스쿠아르치오네는 자수작업장의 주인이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일을 얘기할 때, 역사적인 발전단계나 예술가 각자의 위치를 감안하여 구분을 지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길란다이오와 보티첼리 같은 예술가가 동네 골목 어귀에 있는 빵집이나 푸줏간의 간판을 그려주었다고 생각한다면 곤란하다. 이들 예술가 작업장에서는 더이상 이러한 주문품을 제작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길드의 기나 혼례용 장롱, 탄생명을 만드는 일은 초기 르네상스가 끝날 때까지 예술가의 품의를 떨어뜨리는 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보티첼리, 필리피노 리피, 피에로 디 코시모는 친퀘첸토(16세기)에 들어와서도 장롱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활약하였다. 예술적 작업의 질을 판단하는 기준이 근본적으로 확연히 바뀌기 시작하는 것은 미켈란젤로에 와서이다. 바사리는 수공업적 일감의 주문을 받는 것이 더이상 예술가의 자존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발전단계는 동시에 길드에 대한 예술가들의 의존관계가 종말에 이르렀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노바 화가 길드는 화가 지오바니 바티스타 포지가 길드에 의해 규정된 7년간의 견습기간을 다 채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가 제노바에서 화가로 활동하는 것을 금지하려는 소송을 제기했는데, 이 소송이야말로 예술가와 길드 간의 변화하는 관계에 대해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이 소송을 통해 공적인 작업장을 차리지 않은 예술가에게는 더이상 길드의 규정이 법적 구속력을 가질 수 없다는 원칙이 결정된 1590년이라는 해는 이미 거의 200여년에 걸쳐 진행되어온 발전과정을 드디어 마무리지은 것이었다.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갤러리아 우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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