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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네상스 문화의 엘리트층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3. 26. 18:24

     

    르네상스는 소상인이나 수공업자의 문화도 아니었고 큰 교양이 없는 시민계급의 문화도 아니었다. 르네상스는 오히려 다른 계층을 완전히 배제하면서 문화를 독점하려고 했던 비민중적이고 라틴화도니 교양 엘리트의 문화였다. 르네상스 문화의 주역을 담당한 계층은 당시의 인문주의적, 신플라톤주의적 정신조류와 관련된 계층, 즉 대체로 동일한 사고방식과 단일성을 지닌 지식인 계층으로서, 이러한 단일성은 전체적으로는 중세의 성직자 집단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르네상스의 중요한 예술품들은 이러한 계층을 대상으로 만들어졌다. 광범위한 대중들은 당시의 중요한 예술품을 전혀 알지도 못했고 아는 경우에도 이러한 예술을 감상하는 데 부적합한 비예술적인 의미로 이해했으며, 자신들의 심미적 감정은 질이 훨씬 떨어지는 작품들로 충족시켰던 것이다. 이때부터 앞으로의 예술발전에서 근간을 이루게 될 교양있는 소수집단과 그렇지 못한 다수 대중간에 메울 수 없는 깊은 간격이 생기게 되는데, 이러한 격차는 지금까지의 유럽예술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중세의 문화 역시 평준화된 공동체 문화는 아니었고,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문화 담당 계층은 그들의 문화가 대중과 유리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중세에든 그리스 로마에서든 어느 시기에도 간간이 등장했던 예외적인 소집단을 빼고는 르네상스에서처럼 대중이 전혀 접근할 수 없는 배타적 엘리트 문화를 계획적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은 바로 르네상스에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중세의 교회문화가 라틴어를 공용어로 사용한 것은 교회가 로마 후기의 문명과 연속적,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인데,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이 라틴어를 사용한 것은 지역에 따라 상이한 언어를 통해 표현된 중세문화의 민중적 전통을 단절시키고 일종의 새로운 성직자 집단으로서 자신의 문화적 독점을 확립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이러한 계층의 비호하에 있었고 또한 정신적으로 그들의 후견 아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예술가들은 교회와 길드의 권위에서 해방되는 순간부터 인문주의자로 구성된 새로운 권위에 종속되는데, 이 엘리트층은 지금까지 교회와 길드가 나누어 가졌던 권한을 도맡아서 행사하려고 하였다. 인문주의자들은 이제 역사적, 신화적 주제의 그림에 대한 해석문제에서만 절대적인 권위로 자처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 예술기법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도 전문가로 발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종전에는 오로지 전통과 명문화된 길드의 규칙에 의해 죄우되었고 속인들은 아무도 간섭할 수 없었던 문제에서조차 예술가는 인문주의자들의 판단을 따르 수밖에 없는 상태로까지 발전하였다. 예술가들은 교회와 길드로부터 독립하고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의 향상 및 세간의 갈채와 명성을 얻는 대신에 결국 인문주의자들을 예술문제의 심판자로 인정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물론 이들 인문주의자들 모두가 본격적인 비평가나 예술감식가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예술품의 가치에 대해 일가견이 있고 또 예술작품을 순전히 미학적 관점에서 판단하는 능력을 지닌 최초의 세속인들이 그들 사이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와같이 실질적인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의 일부로 대두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예술감상자층이 탄생한 것이다. 

     

    The School of Athens  (1509–1511),  Raphael

     

    르네상스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

    르네상스의 증대된 예술수요는 예술가들의 사회적 위치를 소시민적인 수공업자로부터 자유로운 정신노동자로 끌어올려놓았는데, 지금까지 전혀 사회적 기반이 없던 이들 정신노동자들은 이때부터 비록 계급적으로는 하나의 통일된 집단을 형성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미 경제적으로 보장되고 사회적으로도 안정된 하나의 계층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초기 1400년대의 예술가만해도 아직 하찮은 신분에 불과했다. 고작해야 그들은 기술이 좀 나은 숙련공 정도로 인정받았을 뿐, 출신성분에서나 교육수준에서나 길드의 소시민적 구성원들과 비교해서 전혀 다를바가 없었다.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는 농민의 아들이었고, 파올로 우첼로는 이발사 아들, 필리포 리피는 정육정집 아들, 폴라이우올로 형제들은 양계장 집 아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아버지 직업이나 출생지 아니면 스승의 이름에 따라 붙여졌으며, 사람들은 마치 급사를 대하듯이 그들에게 반말을 했다. 그들은 길드의 규약에 복종해야 했고, 예술가로서의 직분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도 그들의 재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길드 규약에 의한 일정한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나야 부여받을 수 있었다. 그들의 교육은 보통 장인과 똑같은 교과과정에 따라 행해졌고, 학교가 아니라 작업장에서, 이론 수업이 아니라 실제적 훈련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읽기, 쓰기, 셈본 등의 기본 지식을 습득하고 난 후, 어린 나이로 장인의 문하에 도제로 들어가 대부분 여러 해를 그 밑에서 보냈다. 페루지노, 안드레아 델 사르토, 프라 바르톨로메오 만 해도 8년에서 10년의 수업기간을 거쳤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Portrait of a young man - Pietro Perugino 1495

     

    Portrait of a Young Man, Andrea del Sarto C1517

     

    St. John the Baptist, fresco on tile, Fra' Bartolomeo

     

    초기 르네상스의 대부분의 예술가들,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기베르티, 우첼로,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 베로키오, 길란다이오, 보티첼리, 프란체스코 프란치아 등은 흔히 15세기 미술학교라고 불리는 금은세공소 출신이다. 많은 조각가들 역시 처음에는 그들의 선배들이 중세에 그랬던 것처럼 채석장이나 장식조각가 밑에서 일을 했다. 도나텔로가 산 루카 길드에 가입할 때만해도, 그는 아직 금은세공사 겸 석공으로 불리었고, 도나텔로 자신까지도 예술과 공예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는 그의 만년에 제작된 가장 중요한 예술작품 중의 하나인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군상이 팔라쪼 리카르디 궁정의 분수대 조각으로 설계되었다는 사실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초기 르네상스의 중요한 예술가의 작업장은 비록 근본적으로는 수공업적 조직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미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교수방법을 도입하고 있었다. 특히 피렌체의 베로키오, 폴라이우올로, 길란다이오의 작업장, 파두아의 프란체스코 스콰르지오네의 작업장, 베네치아의 벨리니의 작업장 등이 다들 그러했는데, 이러한 작업장의 최고책임자는 예술가였을 뿐만 아니라 중요하고 명망있는 교사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도제들도 이때부터는 옛날처럼 좋다는 아무 작업장에서나 배우려 하지 않았고 어느 특정한 장인을 골라 그의 문하에서 배우려 했으며, 유명한 예술가일수록 그 문하에 더 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나이 어린 소년들이었던 이들 도제들은 물론 가장 좋은 노동력은 못되었지만 아무튼 가장 값싼 노동력을 제공해주었다. 따라서 이때부터 좀더 집중적으로 예술가 교육이 이루어졌는데, 그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이러한 값싼 노동력을 활용한 덕분이지 결코 훌륭한 교사가 되고자하는 장인들의 야망 때문은 아니었다.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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