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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탈리아의 자연과학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3. 23. 20:40

     

    자연과학 분야에서 차지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특별한 전문서적들을 지적해야 한다. 이 서적 중에는 리브리Libri의 너무나도 간단하고 독단적인 작품만이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특정한 발견을 누가 했는가 하는 우선권에 대한 다툼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사전 지식이 대단히 부족한 상황에서 저항할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경험의 영역으로 자신을 던져 넣고, 타고난 재능으로 가장 놀라운 발전을 이룩하는 사람은 어떤 시대, 어떤 문화 민족에게도 가능하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랭스의 제르베르와 로저 베이컨이 그런 사람들이었다...일반적인 미신과 망상의 껍질이 벗겨지고, 전통과 책들에 대한 굴종, 자연을 두려워하는 생각들이 극복되자마자 그들 눈앞에는 해결을 기다리는 수많은 과제들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어떤 국민 전체가 자연 관찰과 탐구를 다른 국민들보다 특히 좋아하면서 더 일찍 익힌다면, 그리고 발견자들이 위협을 받거나 무시당하지 않고, 같은 정신을 가진 사람들의 환영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이탈리아가 그랬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이탈리아 자연 탐구가들은 어느 정도 자부심을 지니고 <신곡>에 나오는 단테의 경험적 자연 탐구의 증거와 일치점을 추적하였다. 그들이 말하듯이 어떤 발견이나 언급이 과연 단테의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단테의 묘사들이나 비교에 나오는, 외부 세계에 대한 관찰의 풍부함만은 문외한의 눈에도 금방 띄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이 되었든 사람의 삶이 되었든 그는 그 어떤 근대 시인보다도 더 많은 비교와 관찰을 현실에서 얻었다. 그는 그런 것을 단순한 장식품으로서가 아니라 자기가 말하는 것에 대하여 가장 적절한 표상을 일깨우기 위해 필요로 했다. 그가 치중했던 전문 분야는 천문학이었다. 물론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 위대한 작품에서 언급된 많은 천문학적 지식들이 상당한 학식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단테는 자신의 학식과는 별도로, 당시에 인기 있던 별자리 지식에도 의존하고 있는데, 뱃사람이었던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은 고대인들과 이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별들이 뜨고 지는 것에 관한 지식은 근대에 이르러 시계와 달력으로 대체되었고, 그와 더불어 한때 사람들 사이에 천문학적 관심으로 발전되었던 것도 사라져버렸다. 오늘 날에는 친절한 안내서들과 학교 수업이 있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은 아이들도 아는 일이지만 - 단테는 몰랐었다 - 전공학자들만 빼놓으면 이 학문에 대한 관심은 완전히 사라졌다.

     

     

    별에 의존하였던 망상 학문(점성술)은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의 경험적 감각과 대치되는 점이 없었다. 다만 미래를 알고자 하는 정열과 소망이 그들의 경험적 감각을 압도해버렸다. 

     

    교회와 자연과학

    교회는 이런저런 잘못된 학문에 대해서 거의 언제나 관용적이었다.. 그리고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이단이면서 강신술을 한다는 고발이 있을 경우에만 자연 탐구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점은 과연 도미니크회 종교재판이 (프란체스코회 종교재판도)이탈리아에서 거짓고발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처형을 한 적이 있는가, 그리고 있다면 어떤 경우들이었는가를 조사하는 일이다. 그 이유가 피고의 적들을 묵인해준 탓이든, 아니면 자연 관찰 자체, 특히 실험에 대한 은밀한 미움에서이든 간에 말이다. 실험은 분명히 있었던 일이지만 증명할 수는 없다. 북유럽에서 그러한 박해의 원인이 되었던 일, 곧 스콜라 철학자들이 받아들이고 공식적인 입장이 된 자연과학 체계가 근대적인 자연과학자들에 대해 보인 반발은 이탈리아에서는 거의 관찰되지 않는 것 같다. 피에트로 아바노는 14세기 초에 동료 의사의 질투심의 제물로 쓰러졌다. 동료의사하나가 종교재판측에 이단과 마법이라는 죄목으로 그를 고발하였던 것이다. 동시대 사람인 파도바의 조반니노 신귀나치의 경우에도 비슷한 동기가 추정된다. 의사로서 새로운 것을 임상에 도입했기 때문이다. 그는 추방당하는 것으로 그 일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되는 점은 이탈리아의 종교재판관인 도미니크회 수도사들의 힘은 북쪽에서보다는 훨씬 고르지 못하게 행사되었다는 점이다. 14세기에만 해도 전제군주들이나 자유국가들 모두가 수도사 계급 전체에 대해 상당한 경멸감을 보여서 단순한 자연 탐구와는 전혀 다른 일들도 전혀 벌을 받지 않을 정도였다. 15세기가 되면서 고대가 강력하게 전면에 부상하게 되자, 옛날 체계 안에 생겨난 틈은 세속적인 탐구에 유리하도록, 아주 보편적인 틈이 되었다. 물론 인문주의가 가장 우수한 두뇌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였고, 그럼으로써 경험적 자연 탐구에 손실을 입혔다. 그 사이에도 여전히 여기저기서 종교재판들이 벌어지고, 의사들은 비방꾼에게 주술사로 찍혀서 벌을 받거나 화형을 당했다. 그 과정 에서 이런 처형의 진짜 동기가 무엇인지는 제대로 탐구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탈리아는 15세기 말에 파올로 토스카넬리, 루카 파치올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의 인물들로 인해 수학과 자연과학 분야에서 아예 비교 상대도 없이 유럽 제일의 국민으로 부상하였다. 모든 나라의 학자들은 이탈리아인의 제자라고 고백하였으며, 레기오몬타누스와 코페르니쿠스도 마찬가지였다. 

     

    Da Vinci Female Anatomical Study, 1507

     

    정원과 동물들

    일찌감치 나타난 동식물 수집욕과 비교 관찰 욕구는 자연사적인 관심이 일반적으로 확대된 것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지가 된다. 이탈리아는 가장 먼저 식물원을 만든 것을 자랑삼지만 여기서는 실용적인 목적이 압도적이었던 것 같고, 정말 가장 먼저인가 하는 점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영주들과 부유한 일반인들이 정원을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가능한 한 많은 종류의 식물들과 종들, 그리고 그 변종들을 수집하려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래서 15세기에 메디치가의 별장 카레지의 화려한 정원에는 수많은 나무들과 관목들이 있어서 오늘 우리에게는 거의 식물원처럼 느껴진다. 16세기 초에 추기경 트리울지오의 별장은 티볼리 방향을 향하여 로마 평원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수많은 종류의 장미 울타리와 온작 종류의 나무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다양한 과일나무들도 있었다. 20종의 포도나무가 있었고, 커다란 채소밭도 딸려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서양의 전지역을 통해서 어떤 성이나 수도원의 정원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수십 종의 유명한 약초들 말고 다른 것들이 있었다. 가장 섬세한 디저트용 과일을 재배하겠다는 생각과 나란히 모습이 특이한 식물 자체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고 있다. 미술사는 우리에게 얼마나 뒷날에야 비로소 정원들이 이런 수집욕에서 벗어나서 위대한 건축적, 미술적 시설이 되는가를 가르쳐 준다. 

    이국적 동물을 기르는 것도, 관찰에 대한 더 높은 관심과 연결시키지 않을 수 없다. 지중해 남부와 동부의 항구로부터 운송이 쉽다는 점, 이탈리아 기후의 이점 등으로 인해서 남쪽의 큰 동물들을 사들이거나 술탄에게서 선물로 받는 일이 가능하였다. 특히 도시들과 전제군주들은 살아 있는 사자를 좋아하였다. 피렌체의 경우처럼 사자가 문장 동물이 아닐 경우에도 그랬다. 페루자나 피렌체 같은 곳에는 궁전 안이나 그 근처에 사자굴이 있었다. 로마의 사자굴은 카피톨 언덕 경사면에 있었다. 이 동물들은 때로는 정치적 판결의 집행자로 쓰였고, 국민들 사이에 일정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15세기 말 여러 궁정에는 영주 신분에 걸맞는 사치품으로 진짜 동물원이 있었다. 마타라초는 이렇게 말한다. "말, 개, 노새, 매와 새들, 어릿광대, 가수, 이방의 동물들이 영주의 화려함에 어울린다" 페란테 치하에서 나폴리의 동물원에는 기린과 얼룩말이 있었다.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값비싼 영국산 개들 뿐만 아니라 표범도 가지고 있었다. 포르투갈 임마누엘 대황은 교황 레오 10세에게 코끼리 한 마리와 코뿔소 한 마리를 보내면서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이에 학술적인 동물원과 식물원을 위한 기초가 만들어졌다. 

    동물학의 실용적 측면은 종마소에서 발전하였다. 그중 프란체스코 곤차가 치하의 만토바 종마소는 유럽 최초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말의 종자를 비교 평가하는 일은 승마만큼이나 오래 된 일이다. 그리고 인위적으로 종자를 혼합시키는 일은 십자군전쟁 이후로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는 모든 중요한 도시들의 승마 경주에서 승리를 하려는 것이 빠른 말을 길러내려는 가장 강한 동인이었다. 만토바 종마소에서는 경주의 우승마들을 키워냈고, 그 밖에도 가장 고귀한 전투마들, 가장 훌륭한 말들을 길러냈다. 프란체스코 곤차가는 에스파냐, 아일랜드, 아프리카, 트라키아, 시칠리아 등에서 종마들과 암말들을 들여왔다. 여기서는 가장 훌륭한 종자를 생산하기 위해서 온갖 가능한 실험들이 행해졌다. 

    인간 동물원도 없지 않았다. 느무르의 공작 줄리아노의 사생아인 유명한 추기경 이폴리토 메디치는 자신의 기이한 궁정에 한 떼의 야만인을 두었다. 그들은 스무 개 이상의 다른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로서, 각자 자신의 종족에서 빼어난 사람들이었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구글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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