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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네상스의 궁정문화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3. 25. 23:10

     

    콰트로첸토(1400년대)에는 세기 말엽까지 이탈리아의 가장 중요한 예술중심지였던 피렌체 이외에 예술을 보호, 육성시킨 페라라, 만투아(만토바), 우르비노의 궁정들과 같은 새로운 예술중심지가 생겨났다. 이들 궁정은 14세기 북이탈리아의 궁정을 모범으로 삼았는데, 이들 궁정에서의 기사적, 낭만적 이상이나 비시민적, 형식적인 생활양식의 전통은 그러한 모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민계급의 정신, 즉 능률과 성과를 목표로 하고 과거의 전통에서 해방되어가는 합리주의 정신, 즉 능률과 성과를 목표로 하고 과거의 전통에서 해방되어가는 합리주의 정신이 궁정생활에도 영향을 안 끼칠 수는 없었다. 아직도 기사소설을 읽고는 있지만, 사람들은 기사소설에 대해 이미 거리감을 갖고 다분히 아이러니컬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부르주아적인 피렌체의 루이지 풀치뿐만 아니라 궁정적이었던 페라라의 보이아르도도 기사적 소재를 반쯤은 농담조의 새로운 태도로 심각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 영주의 성이나 저택의 벽화는 아직도 지난 세기부터 익히 알려진 분위기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고 고대의 신화나 역사에서 따온 주제, 기본 미덕과 일곱 가지 학예의 알레고리, 지배자 가문의 가족이나 궁중생활의 장면등을 즐겨 묘사하고 있으나, 기사소설의 내용은 더이상 소재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 회화는 기사소설의 내용을 아이러니로 처리하는 데 적합하지 못했던 것이다. 

    1400년대의 궁정예술에서 많은 것을 시사하는 기념비적 작품을 우리는 두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페라라의 스키파노이아 궁전에 있는 프란체스코 코싸의 벽화이고, 하나는 만토바에 있는 만테냐의 벽화이다.

     

    Allegory of March: Triumph of Minerva (detail), 1476 and 1484, by Francesco Cossa, Palazzo Schifanoia

     

    Francesco Cossa, Palazzo Schifanoia

    *스키파노이아 궁전의 프란체스코 코싸의 그림 링크:https://www.pinterest.co.kr/SourceOfLight/palazzo-schifanoia-francesco-del-cossa-1430-1477-c/

     

    Andrea Mantegna Camera degli Sposi (Camera Picta), 1465-1474

     

    Andrea Mantegna Camera degli Sposi (Camera Picta), 1465-1474

     

     페라라의 경우에는 고딕 후기의 프랑스 예술과, 만토바의 경우에는 국내의 자연주의와 더 깊은 관련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예술형식에서 동시대 브루주아적 예술과 차이가 난다기보다는 오히려 작품 주제에서 차이가 난다. 코싸의 예술형식은 페젤리노와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고, 만테냐는 예컨대 길란다이오가 피렌체의 도시 명문의 생활을 그린 것과 다름없는 직접적인 자연주의 수법으로 로도비코 곤자가의 궁정생활을 그린 것이다. 요컨대 이 두 유파의 예술적 취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서로 조정되어 많은 공통점을 갖게 된다. 

    궁정생활의 사회적 기능은 인심을 모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르네상스의 왕후와 군주들은 국민들을 현혹시킬 뿐만 아니라 귀족들에게도 위압감을 주어 그들을 궁정에 묶어두려고 했다. 그렇다고 르네상스의 군주들이 꼭 귀족들의 봉사나 사교에 의존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누구든 쓸모가 있다고 생각되면 출신성분을 불문하고 사람들을 기용할 수 있었고 또 기용하려고 했다. 따라서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궁정은 그 구성원으로 보아도 이미 중세의 궁정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탈리아 궁정은 온갖 부류의 사람들, 즉 요행으로 출세한 모험가와 벼락부자가 된 상인, 서민출신 인문주의자와 교양없는 예술가들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다. 궁정기사들의 배타적인 도덕적 공동체와는 대조적으로 르네상스의 궁정에서는 비교적 자유스럽고 근본적으로 이지적인 살롱풍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는데, 이러한 살롱풍의 분위기는 한편으로는 <데카메론>이나 <알베르티의 낙원>에서 묘사된 바와 같은 시민계급의 문예애호적 사교문화의 계승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17세기와 18세기의 유럽 정신생활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할 문학살롱의 준비적 단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여자들은 처음부터 문학적 사교생활에 참여하고는 있지만, 르네상스의 궁정적 살롱에서는 아직 중심적 존재는 못되었다. 뒤에 가서 브루주아화된 살롱의 시대에 기사시대의 여성들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그들은 중심적인 존재가 될 것이었다. 르네상스에서의 여성들의 문화적 중요성이라는 것도 결국은 르네상스의 합리주의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었다. 합리주의 정신은 여성을 남성과 정신적으로 같은 위치에 나란히 두고 있지만, 결코 남성 위에 올려놓고 있지는 않다. "남자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여자도 이해할 수 있다" 라고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는 <정신론>에서 쓰고 있지만 그가 궁정 신하들에게 요구한, 부인들에 대한 상냥하고 정중한 태도는 중세 기사들이 하던 여성봉사와는 큰 관련이 없는 것이다. 르네상스는 남성들의 시대였다. 네피Nepi궁정에 군림했던 루크레치아 보르지아 또는 페라라와 만투아에서 궁정의 중심을 이루면서 주위의 시인들을 보호, 격려했을 뿐더러 조형예술의 이해자로서도 뛰어난 것으로 보이는 이사벨라 데스테 같은 여성들은 예외에 지나지 않는다. 주도적인 예술보호자, 예술애호가들은 어디서나 거의가 남성이었다.

    예술감상자의 여러 계층

    중세 기사제도하의 궁정예술은 새로운 도덕체계, 영웅주의와 인도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상들을 창조하였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궁정들은 그들의 목적을 그렇게 높이 세우지는 않았다. 그들이 사교적 문화에 기여한 것은 고상한 품위라는 개념에 한정되어 있었던바, 이는 16세기에 이르러 에스파냐의 영향 아래 한층 세련되어 프랑스로 건너감으로써 드디어는 전유럽 궁정문화의 기초와 모범이 되었다. 예술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콰트로첸토의 궁정은 거의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않았다. 이 시대의 군주들에 힘입어 만들어진 예술은 질적으로 도시의 시민계급이 산출한 예술보다 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예술가의 선택은 패트런의 개인적 취향보다는 오히려 지역적 사정에 따라 결정되는 수가 많았다. 여기서 언급하고 지나가야 할 것은 르네상스에서 가장 무자비한 폭군이었던 시지스몬도 말라테스타가 당대 최대의 화가였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를 고용했고, 다음 세대의 가장 중요한 화가였던 만테냐는 저 위대한 로렌조 메디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조그만 공국의 군주였던 로도비코 곤자가를 위해 일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군주들이 반드시 높은 안목을 지닌 예술 이해자라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소장했던 예술품 중에는 시민계급 예술애호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류, 삼류에 속하는 작품도 많이 들어있다. 르네상스의 모든 사람들이 예술이해의 수준이 높았다는 명제는 당시 예술품이 모두 하나같이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는 주장처럼 자세히 따져보면 하나의 전설에 불과하다. 사회의 하급계층은 말할 것도 없고 상층계급에서조차 균형 잡힌 예술취미의 원리가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의 지배적인 예술취미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멋스럽기는 하나 다분히 틀에 박힌 일을 했던 장식화가 핀투리키오가 당대에 가장 일거리가 많은 예술가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르네상스를 두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얘기하듯이 과연 르세상스인들은 모두가 다 보편적으로 예술에 관심을 가졌다고 얘기해도 좋을 것인가? 과연 당시 사람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미술관계의 사업에 참여했는가?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만들 때 과연 '도시전체'가 이 계획에 열광했는가? 하나의 미술품이 완성된다는 것이 과연 '전 도시인을 위한 대사건'이었는가? 예의 '도시주민'이란 어떤 계층이었을까? 굶주린 노동자들도 거기에 포함되었을까?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시민계급은? 아마 그랬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예술적인 사건에 대한 광범위한 대중의 관심이란 진정한 예술적 관심이라기 보다는 종교적, 향토애적 관심이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당시의 공식적인 행사가 대부분 거리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공개된 다 빈치의 화고를 보기 위해 이틀 동안이나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고 하는데, 사실 당시 사람들은 사육제의 행렬이나 외국 귀빈의 환영행사나 장례식에도 이에 못지않게 관심을 보였을 것이다. 예술의 질과 예술의 인가의 간격이라는 것이 오늘날처럼 크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당시 사람들 대부분은 다 빈치와 그와 동시대 다른 예술가들 사이의 질적 차이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질과 인기의 간격이 이때부터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다만 아직은 그다지 크지 않았기 때문에 때로는 메워질 수가 있었다. 다시 말하면 예술적으로 가치있는 작품은 아직도 몇몇 정통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이 꽤 많은 인기를 누렸음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다. 당시 세간에 퍼져 있던 예술가들에 대한 수많은 신변일화가 이를 증명해준다. 그러나 단지 예술가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그러한 인기를 누린 것이 아니라 공적인 일에 종사하고 공개경쟁에 참가하며 작품을 전시하고 길드 위원회의 일을 맡고 또한 그들의 '천재적'인 특성으로 인해 사람들의 눈에 띄는 인물로서 누리는 인기였던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와 시에나 같은 도시에서 예술에 대한 수요가 비교적 컸음에도 불구하고 르네상스 예술을 당시의 종교적인 찬미가나 이른바 신성한 표현, 또는 당시의 기사소설이 전락해버린 속요 같은 민중적인 문학과 동일한 의미에서 민중적인 예술이라고는 할 수 없다. 물론 당시에는 농민예술도 있었고 민중을 상대로 한 엉터리 작품들이 널리 보급되기는 했지만, 진정한 예술작품들은 그렇게 비싼 가격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당시 대다수 민중들이 구입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1428년 시에나에 자기 작업장을 가지고 있던 32명의 화가중에서 이름을 알 만한 화가는 9명에 불과하다. 화가들 대부분은 아무런 개인적 특성이 없는 평범한 인물이었던 것 같고, 네리 디 비치의 경우처럼 주로 대중을 상대로 한 대량생산에 의해 생업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예술수요자들의 일반적인 예술감식안은 후대 사람들이 칭찬하듯이 그렇게 믿을 만한 것이 못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술수요자의 대부분은 별로 가치가 없는 미술품을 구입했다. 르세상스에 대한 교과서적 지식에 따른다면 미술품을 소장한다는 것이 당시에는 미풍양속에 속하고 부유한 시민가정에서는 적어도 몇점의 미술품을 소요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통칙이지만, 실제의 양상을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16세기 후반의 예술이론가 지오바니 바티스타 아르메니니에 의하면, 볼만한 그림이 한 점도 없는 유족한 집들이 수두룩했다고 한다.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야후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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