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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탈리아 사람들의 여행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3. 18. 12:10

     

    다른 유럽 지역의 발전을 가로막던 수많은 제약에서 자유로워지고, 개인적으로 높은 발전 단계에 도달하고, 고대를 통해서 수업을 받은 이탈리아 정신은 바깥 세상의 발견을 향해 관심을 돌리고 그것을 말과 형식으로 묘사하려고 시도한다. 

    발견자들

    이탈리아 사람들이 이탈리아 바깥의 먼 지역으로 여행한 것에 대해 여기서는 몇 가지 일반적인 관찰만을 하기로 한다. 십자군 전쟁들은 모든 유럽인들의 마음에 멀리 떨어진 곳에 대한 관심을 열어 놓았고, 사방에서 모험적인 방랑 충동을 일깨웠다. 이 방랑 충동이 어느 지점에서 지식욕과 결합되었는지, 혹은 완전히 지식욕의 하인이 되었는지를 말하기는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어려운 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이탈리아 사람들 사이에서 맨 먼저 그리고 가장 완벽한 형태로 일어났다. 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십자군전쟁에 참여하였다. 당시 그들은 벌써 동양에 함대와 무역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지중해는 내륙 지방과는 다른 방식으로 주민들을 키웠다. 그리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북유럽적 의미의 모험가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이 지중해 동부에 있는 모든 항구를 자기 집처럼 느끼게 되었을 때 그들 중 가장 모험적인 사람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모여드는 회교도들의 장대한 방랑 생활에 합류하였다. 지구의 대부분이 이미 발견된 채로 그들 앞에 있었다. 아니면 그들은 베니치아의 마르코 폴로처럼 파도를 타고 몽골 셰계 속으로 들어가서 위대한 칸의 옥좌 계단까지 안내를 받기도 하였다.

     

    Mosaic of Marco Polo displayed in the Palazzo Doria-Tursi, in  Genoa , Italy

     

    그리고 이탈리아의 개인들이 일찌감치 대서양에서 발견자들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13세기 제노바 사람들은 이미 카나리아 제도를 발견하였다. 기독교 세계의 동쪽 끝인 프톨레마이스 Ptolemais를 잃어버린 1291년에 제노바 사람들은 다시 동인도를 향한 바닷길을 찾아내려는 그 유명한 시도를 처음으로 하였다. 콜롬버스는 서양 사람들을 위해서 먼 바다로 여행을 떠난 수많은 이탈리아 사람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일 뿐이다. 진정한 발견자는 우연히 맨 먼저 어느 곳에 가게 된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찾아다니다가 발견한 사람들을 뜻한다. 그런 사람만이 선구자들의 생각과 관심이 통하는 맥락 속에 서게 되고, 그가 내놓은 답변만이 답변으로 인정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 해안이나 저 해안에 맨 먼저 도착한 사람으로 꼽히지는 않더라도, 여전히 중세 후기에 가장 뛰어난 의미에서의 현대적인 발견자들이었다. 

    이 명제에 대하여 더욱 상세한 근거를 제시하는 일은 발견의 역사라는 특수 영역의 과제이다. 그러나 바다 저편에 있는 새로운 대륙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찾아 헤매고 발견한 다음, "세계는 그렇게 넓지가 않군" 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위대한 제노바 사람들의 고귀한 모습에 대해서는 언제나 새롭게 경탄이 생겨난다. 에스파냐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알렉산더 6세를 보냈다면 이탈리아는 에스파냐 사람들에게 콜럼버스를 보냈다. 교황이 죽기 몇 주 전에(1503년 7월 7일) 콜럼버스는 자메이카에서 감사할 줄 모르는 카톨릭 왕들에게 보낸 그 자랑스러운 편지에 날짜를 적어 넣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 편지를 강한 흥분 없이는 읽지 못한다. 그의 유언장에 붙여진, 1506년 3월 4일자 발라돌리드라고 적힌 보충서에서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고국 제노바 공화국에, 알렉산더 교황이 자신에게 가장 큰 위안이 되었던 그 책"을 남긴다고 적었다. 마치 그로 인해 보르자라는 끔찍한 이름에 은총과 선의의 마지막 희미한 빛이 비추는 것 같다. 

    코스모그라피

    이탈리아 사람들의 여행 이야기와 지리적 서술의 발전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사람들이 세계지(世界誌 Kosmographie)에 기여한 부분도 잠깐 살펴보자. 유럽의 다른 국민들의 업적과 그들의 업적을 슬쩍 비교만 해보아도 이탈리아 사람들이 초기에 눈에 띄게 우세한 것을 알 수 있다. 15세기 중엽에 이탈리아 말고 그 어디서 에네아스 실비우스 가 한 것처럼 지리적, 통계적, 역사적 지식을 결합시킨 경우를 찾아보 수 있겠는가? 어디서 그렇듯 균형잡힌 묘사를 찾을 수 있는가? 그는 이런 세계지 작품에서뿐만 아니라 편지와 주석들에서도 똑같이 위대한 필치로 풍경, 도시들, 관습, 산업, 생산품, 정치 상황과 나라법 등을 직접 보거나 증인들의 증언을 듣고 서술하였다. 책만 보고 서술한 부분은 당연히 훨씬 적다. 그는 한동안 티롤 지역 알프스 골짜기에서 프리디리히 3세로부터 봉록을 받았는데, 이 지역에 대한 짧은 스케치만 해도 모든 본질적인 생활 조건들을 건드리고 있으며, 고대인들을 통해 훈련을 받은 콜럼버스의 동향인만이 할 수 있는 객관적 관찰과 비교의 재능을 보여준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보았던 것들을 보았고, 그가 알았던 것을 적어도 일부만이라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에 대한 묘사를 할 출동을 느끼지 않았으며, 세계가 그런 묘사를 요구한다는 의식을 갖지 않았다. 

     

    Pope Pius II (Aeneas Silvius / Enea Silvio Piccolomini)

     

    세계지 분야에서도, 어디까지가 고대인들에 대한 탐구의 덕이고, 어디까지가 이탈리아 사람들 자신의 재능인지 정확하게 구별하려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들은 고대인들을 잘 알게 되기 전에도 이미 이 세상의 사물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다루었다. 그들 자신이 이미 절반은 고대 종족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의 정치 상태가 그것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대의 지지학자들이 길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지지학 분야에서 그토록 빨리 성숙에 도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미 존재하고 있던 이탈리아의 세계지들이 여행자들과 발견자들의 정신과 성향에 미친 영향은 도저히 계산할 수가 없다. 앞의 경우에 에네아스 실비우스를 아주 낮게 평가해서 딜레탕트라고 보더라도, 그런 사람조차도 이 분야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을 확대시켰다. 이런 일반적인 관심은 새로운 모험자들에게 지배적인 의견이라는 기반과 유리한 선입견이라는 꼭 필요한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모든 분야에서 진정한 발견자들은 자기들이 그런 중간 역할을 해준 사람들에게서 얼마나 많은 덕을 입고 있는지 잘 안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야후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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