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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00년대 후기의 미술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3. 9. 18:28

     

    어떤 사람들은 꽈트로첸토(1400년대) 후기의 예술을 '제2세대'의 문학, 즉 버릇없이 자란 아들과 부유한 상속인들이 지배한 세대의 문화로 규정하면서, 이 세대의 문화는 15세기 전반의 문화와는 너무 현저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의도적인 고딕으로의 복귀, 즉 일종의 '반 르네상스'라고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의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고딕으로의 복귀라고 규정할 수 있는 이러한 경향이란 15세기 후반에 와서 비로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초기 르네상스에서부터 이미 예술사조의 저변에 끊임없이 흐르고 있던 하나의 경향임을 적절히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1400년대 예술에 중세적 전통이 아무리 그대로 남아있고 그 예술에서 시민계급의 정신과 고딕의 이념이 끊임없이 서로 암투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이 뚜렷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정확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 세기의 중엽에 이르기까지는 반 고딕적이고 반 낭만적이요 사실적이며 비 긍정적, 자유주의적인 경향이 시민계급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정신주의, 인습주의, 보수주의의 경향 등은 로렌조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우위를 주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우리는 부르주아 정신의 동적이고 변증법적인 구조가 갑자기 그리고 완전히 하나의 정적인 구조로 변화 - 발전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15세기 초반의 지배적인 요소가 진보적, 자유주의적, 시민적, 사실주의적 정신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수적, 정신주의적, 기사적, 궁정적 요소가 1400년대 후반기를 지배했다는 사실 역시 결코 부인할 수 없다. 1400년대 초기의 진보적인 집단들과 나란히 전체적인 발전에 역행하는 반동적인 집단들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1400년대 후기의 보수적인 집단들 틈에서도 진보적인 요소들이 어디서나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 발달의 끊임없는 리듬을 이루는 것은 사회계층의 변화이다. 부의 포화상태에 이른 사회계층이 적극적인 경제생활의 일선에서 물러나고, 지금까지 영리경제에 참가하지 못했던 계층이 새로이 생긴 경제적 틈바구니에 끼어들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산 계층이 유산 계층으로 올라가고, 유산층은 귀족적인 계층으로 다시 상승하는 것이다. 어제까지 진보적인 의식을 가지고 문화를 담당하던 계층이 오늘은 보수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새로운 이념에 맞추어 문화를 완전히 재정립할 수 있기 전에,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문화 영역에서 소외되었고 또 한 세대가 지난 뒤에는 그들 자신이 발전을 저해하는 세력이 되어 또 다른 새로운 진보세력에게 자리를 물려주게 될 집단이 역동적인 새로운 계층으로서 문화수단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1400년대 후반에 보수적 요소들이 피렌체 예술을 압도했던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지만 사회계층의 변화가 정지상태에 이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 시기에도 언제나 상당한 동적인 사회적 세력이 작용해서 예술이 궁정적인 지나친 섬세함이나 기독교주의적, 보수주의적으로 경직되어 가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비록 이 시기의 예술에 매너리즘적인 섬세함이나 때로는 내용 없는 우아함으로 빠져들어가는 경향이 농후하지만, 이러한 경향에 대항하는 새로운 자연주의적 노력도 나타나고 있다. 이 예술이 아무리 궁정적인 특징을 지니고 형식주의적, 기교주의적으로 될지라도, 그렇다고 자신의 세계상을 수정하고 확대하려는 노력을 완전히 외면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현실에 대해 적극적이고 모든 새로운 경험에 문호를 개방하는 예술, 다시 말하면 좀 점잔을 빼고 까다롭기는 하지만 새로운 자극을 결코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사회의 표현 형식인 것이다. 자연주의와 인습, 합리주의와 낭만주의의 이러한 혼합은 길란다이오의 부르주아적인 점잖음과 데지데리오 다 쎄띠냐노Desiderio da settignano의 귀족적인 섬세함, 베로키오Verrocchio의 건강한 현실감각과 피에로 디 코시모Piero di Cosimo의 시적 몽환성, 페젤리노 Pesellino의 쾌활하고 참신한 매력과 보티첼리의 여성적인 우수를 동시에 낳고 있다. 

     

     Desiderio da settignano, cardinale diacono di sant'Eustachio, 1455-1460

     

     

     Andrea del Verrocchio, Madonna with Sts John the Baptist and Donatus,1475 - 1483

     

     

    Piero di Cosimo, Simonetta Vespucci, C.1480

     

     

    Francesco Pesellino, Madonna and Child with Six Saints, 1450-1455

     

     

    Botticelli, Detail of Primavera, 1482

     

    세기 중엽에서부터 예술양식이 변화하게 된 사회적인 근거를 우리는 부분적으로는 예술 애호가들의 수가 갑자기 줄어든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메디치가는 그들의 통치를 위하여 과중한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국민의 경제생활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고, 많은 기업가들은 피렌체를 떠나 다른 도시로 사업을 옮겨야만 했다. 노동자의 타지방으로의 진출과 생산의 저조 등 산업 쇠퇴의 징후는 이미 코시모 메디치의 생전에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부가 몇 사람의 손에 집중됨으로써 15세기 초반기에 광범위한 계층을 포괄해가고 있던 민간 측의 예술 구매층은 점점 엷어져 가고, 예술품을 주문하는 사람은 이제 주로 메디치가와 그 밖의 몇몇 가문에 한정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의 결과 예술품 생산은 더욱 배타적인 성격과 까다로운 취향을 갖게 되었다. 

    이탈리아 자유도시에서 이때까지 2세기 동안 교회의 건축사업이나 예술품 주문은 교회당국이 아니라 교회의 이익을 대표하는 시민 측 대리인이나 행정책임자, 다시 말해서 한편으로는 자치도시, 큰 길드 및 교단들이,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인 헌납자나 부유하고 명망 있는 가문이 담당하였다. 자치도시에 의한 이러한 건축, 예술활동은 최초의 도시경제 번영기인 14세기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 이때의 시민계급의 야망은 아직도 집단적인 형태로 나타났으며 그것이 개인적인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이탈리아 자치도시는 왕년의 그리스 도시국가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예술활동을 위하여 국고를 거의 탕진하다시피 돈을 쏟아부었다. 피렌체와 시에나뿐만 아니라 피사와 루카 같은 그보다 작은 도시들도 이러한 예술활동을 벌였고, 건축주가 되어 뽐내고 싶은 그들의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막대한 재정적 출혈을 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새로이 권력에 오른 자치도시의 지배자들은 도시 자체가 이미 하고 있던 건축 예술 활동을 스스로 떠맡았으며, 때로는 더 많은 돈을 들여서 지금까지의 규모를 더 능가하기도 했다. 그들은 시민들에게 예술품을 선사함으로써 시민들의 허영심에 영합하고, 또 이를 그들 자신과 자기네 정부를 위한 가장 효과적 선전수단으로 삼았는데, 대부분의 경우 여기에 드는 비용은 선물을 받은 시민이 지불하게 마련이었다. 예컨대 파비아의 체르토사 건축비는 비스콘티가와 스포르차가의 사재에서 충당되었는데 반해 밀라노 대성당의 건축은 순전히 시민들의 비용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야후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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