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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학과 학교들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3. 5. 12:30

     

    여기서 논의하는 고대가 당시의 교양에 미친 영향은, 인문주의가 대학들을 장악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도로 영향력을 갖지는 못했다.

    학자들의 지위

    이탈리아에서 대부분의 대학들은 13세기와 14세기가 경과하면서 처음으로 생겨났다. 생활이 점차 부유해지면서 교양에 대한 생각이 차츰 엄격해지던 시기였다. 처음에 대학들은 대개 교수직이 세 가지뿐이었다. 종교법과 세속법, 그리고 의학 교수직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수사학, 철학, 천문학 교수직이 덧붙여졌다. 천문학자는 언제나는 아니었지만 대개는 점성가와 동일시되었다. 봉급은 극단적인 차이를 보였다. 때로는 한 재산이 선물되는 경우도 있었다. 교양 수준이 높아지면서 경쟁이 생겨났다. 그래서 대학들은 유명한 선생들을 묶어두려고 하였다. 그런 사정 속에서 볼로냐는 한동안 국가 수입(2만 두카토)의 절반을 대학에 쏟아부었다고 한다. 강의들은 보통 일시적으로만. 때로는 몇 학기만 지속되었으므로 선생들은 배우처럼 떠돌이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평생 강의들도 있었다. 때로는 한 곳에서 강의한 것을 다른 곳에서는 강의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밖에도 봉급을 받지 않는 자발적인 선생들도 있었다. 

    위에서 말한 자리들 중에서 수사학 교수직이 인문주의자들의 주요 목표였다. 그러나 인문주의자가 고대에 대한 전문 지식을 얼마나 쌓았는가에 따라서 법학자, 의학자, 철학자 혹은 천문학자 노릇을 할 수도 있었다. 학문의 내적인 사정과 선생들의 외적인 사정은 매우 유동적이었다. 어쨌든 몇몇 법학자와 의학자들이 최고 봉급을 받았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다. 법학자들은 자기들을 고용한 국가의 대고문관으로서 자신의 요구와 소송의 대가로 많은 돈을 받았다. 파도바에서는 15세기에 연간 1천 두카토의 봉급을 받는 법학자가 있었고, 유명한 의사 한 사람을 2천 두카토에 불러들여서 그에게 개업의 권리도 주겠다고 제안한 적도 있었다...의학과 법학 분야에 대한 이런 평가를 보면 중요한 문헌학자들이 법학자와 의학자 노릇을 하려 들었다는 사실이 이해가 된다. 한편 어느 한 분야에서 두드러지고자 하는 사람은 강한 인문주의 색채를 지니지 않을 수 없었다...

    문헌학자들의 고용은 개별적인 경우에는 상당히 높은 봉급 및 부수입들과 결합된 것이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일시적인 고용이었다. 그래서 동일한 사람이 여러 곳에서 강의를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분명히 변화를 좋아했고 모두에게 새로운 것을 기대하였다. 이제 생성 중에 있는, 그리고 주로 사람들의 개성에 의해 좌우되는 학문의 경우 이것은 쉽게 이해가 되는 일이다. 고대의 작가들에 대해서 강의를 하는 사람이 정말로 해당 도시의 대학에만 소속돼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오고 가기도 쉽고 강의를 할 수 있는 장소들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수도원 같은 곳) 사적인 고용도 충분했다. 15세기의 처음 몇십 년 간 피렌체의 대학이 최고 영광에 도달하고,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와 마르티누스 5세의 궁정인들이 대학 강의실에 모여들던 시절, 그리고 카를로 아레티노와 필렐포가 서로 경쟁적으로 강의를 하던 시절에 성 스피리토 수도원의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사들 사이에 학자 연합도 있었고, 존경받는 개인들이 한데 모이거나 아니면 개별적으로 애를 써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특별한 문헌학 또는 철학 강의를 개설하는 경우도 있었다. 로마에서 문헌학 강의와 고대학 강의는 대학과는 거의 무관했다. 일부는 교황과 고위 성직자들의 특별한 개인적 후원에 의존했고, 다른 일부는 교황청에서 개설한 것이었다. 레오 10세 치하에서 비로소 사피엔짜 대학의 대대적인 재정비가 이루어졌다. 88명의 선생들 가운데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들이 끼어서 고전학 강의를 맡았다. 그러나 이 새로운 광채는 잠시뿐이었다...개인의 교류와 논쟁, 라틴어를 사용하는 것, 그리고 적지 않게 그리스어도 사용하는 것, 선생을 빈번하게 바꾼 것, 책들이 많지 않았던 사정 등은 당시의 대학 공부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었음을 말해준다.

    모든 유명한 도시들에는 라틴어 학교들이 있었다. 그것은 대학 공부를 하기 위한 사전 준비 과정이었을 뿐 아니라, 라틴어 지식이 당시에는 읽기, 쓰기, 셈하기 다음으로 가장 필요한 공부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논리학이 중요했다. 라틴어 학교들은 교회가 아니라 시 행정부에 속해 있었다. 많은 학교들은 사립학교였다. 

     

    왼쪽 scuola platonica fiorentina의 교장 Basilio Bessarione, 가운데 Marsilio Ficino (라고 알려져있음) by Piero della Francesca 1452

     

    영주들의 궁정학교

    개별적으로 뛰어난 인문주의자들의 인도 아래 이런 학교 제도는 위대한 합리적 완성에 도달했을 뿐 아니라 더욱 수준 높은 교육이 이루어졌다. 북부 이탈리아의 두 영주 가문에서 자녀들의 교육을 위하여 유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생겨났다. 만토바의 조반 프란체스코 곤자가 (재위 1407~1444) 궁정에 저 위대한 비토리노 다 펠트레Vittorino da Feltre (1373 or 1378  1446)가 등장했다. 그는 자신의 전존재를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바치고, 자기 목표를 위해서 최고의 힘과 통찰력으로 무장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처음에는 영주 가문의 아들과 딸을 교육하였다. 딸들 중 하나는 진정한 학자의 영역까지 끌어갔다. 그러나 그의 명성이 이탈리아 전지역으로 퍼져나가자 가깝고 먼 지역의 부유한 가문에서 학생들이 찾아왔다. 조반 프란체스코 곤자가는 자기 아이들의 가정교사가 다른 가문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허용했을 뿐 아니라 자기 궁정이 귀족 세계의 교육 장소라는 사실을 만토바의 영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여기서 처음으로 학문적 수업과 나란히 체조와 고급 신체 훈련도 학교 수업을 위해 동등한 무게를 가지게 되었다. 그 밖에 비토리노는 전혀 다른 집안 아이들도 가르쳤다. 즉 가난하지만 재능이 풍부한 아이들이었다. 그는 그들의 교육을 자기 생애 최고의 목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그들을 자기 집에 유숙시키면서 '신의 사랑으로'가르쳤다. 

     

    Vittorino da Feltre

     

    그곳에는 고귀한 신분의 아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이곳에서 재능만을 가진 아이들과 한 지붕에서 사는 법을 익히게 되었다. 조반 프란체스코 곤자가는 그에게 원래 연간 금화 300굴덴을 지불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때로 동일한 액수에 이르는 손실액 전부도 감당해 주었다. 그는 비토리노가 자신을 위해서는 한푼도 떼어놓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 놀라운 인물이 자기 궁정에서 봉사하는 데에는 재산이 없는 아이들도 함께 교육한다는 것이 암묵적인 조건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채고 있었다. 비토리노의 집안 살림은 그 어떤 수도원에 못지 않게 엄격하고 종교적인 것이었다. 

    베로나의 과리노Guarino da Verona의 경우에는 학문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1429년 에스테 가문의 니콜로가 아들 리오넬로의 교육을 위해서 페라라로 초빙했던 인물이다. 학생이 거의 어른이 된 1436년 이후로 그는 수사학과 두 고전어 교수로서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는 리오넬로와 함께 여러 지역의 수많은 아이들도 가르쳤고, 선별된 상당수의 가난한 집 아이들도 자신의 집에서 가르쳤다. 그는 그들을 부분적으로 혹은 전적으로 부양하였다. 늦은 저녁 시간을 그는 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보냈다. 이곳도 엄격한 종교와 도덕성의 장소였다. 과리노와 비토리노가 자기들 세기의 대부분의 인문주의자들로부터 거의 찬양을 받지 못한 것은 그들의 탓은 아니었다. 

     

    Guarino da Verona 기념메달. c. 1446

     

    그 밖에도 이탈리아 대부분의 궁정에서 영주 자녀들의 교육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그리고 일정 기간 동안 인문주의자들 손에 맡겨졌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궁정인들의 세계 속으로 한 발을 들여 놓았다. 왕자의 교육에 관한 논문 작성은 전에는 신학자들의 일이었는데 이제는 인문주의자의 일이 되었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야후 이탈리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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