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14세기의 인문주의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3. 4. 22:36

     

    그렇다면 높이 존경하는 고대를 현대에 소개하고 처음으로 고대를 현대적 교양의 주요 내용으로 승화시킨 사람들은 누구였던가?

    그들은 오늘은 이얼굴, 내일은 저 얼굴을 보여주는 1백가지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시대도 그들 자신도 자기들이 시민 사회의 새로운 요소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선구자로는 아마 12세기 방랑 수도사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이미 그들의 시를 이야기한 바 있는 사람들. 그들의 불안정한 생활 방식, 대단히 자유로운 인생관, 그리고 고대를 흉내내는 시문학 등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성직자들이 담당하던,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중세의 교양 전체에 맞서서 이제 새로운 교양이 나타나게 되었으니, 그것은 특히 중세 저편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이 새로운 교양의 활동적인 담당자들은 중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고대 사람들이 알았던 것을 알았고, 고대 사람들이 썼던 방식으로 글을 쓰려고 하였으며, 고대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낀 방식대로 생각하고 느끼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을 다 바쳐서 일군 전통은 수많은 곳에서 모방된다. 

    인문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적 비판

    1300년경 피렌체에 나타난, 비할 바 없이 독자적이고 본질적으로 이탈리아적인 것으로 보이던 교양의 시작이 나중에 인문주의자들에 의해서 완전히 뒤덮이고 말았다는 탄식이 자주 등장하곤하였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누구든 글을 읽을 줄 알았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나귀 몰이꾼도 단테의 시들을 노래했으며, 현존하는 이탈리아 최고의 필사본들은 원래 피렌체의 수공업자들이 말하는 것을 적은 것이라고 했다. 당시 부루네토 라티니의 <테조로Tesoro>같은 인기 있는 백과사전이 생겨나는 것이 가능했으며, 이 모든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유용성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이다. 국사에 참여하고, 무역과 여행을 하고, 특히 피렌체에서 모든 게으름을 체계적으로 제거함으로써 꽃피어났던 그런 보편적 유용성 말이다. 당시 피렌체 사람들은 전세계로부터 존경받고 쓸모가 있었으며,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가 피렌체 사람들을 가리켜 다섯 번째 원소라고 말한 것도 공연한 일만은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1400년 이후로 인문주의가 더욱 강하게 밀려들면서 피렌체의 토착적인 성향은 성장을 멈추고 그때부터는 모든 문제의 해결을 고대에서 찾게 되었으며 그 때문에 단순한 인용에 열중하는 문헌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또한 피렌체에서 자유(공화정)가 붕괴된 것도 이것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학문이 권위에 종속되었고, 로마의 권리를 위해 도시의 권리가 희생되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전제군주의 은총을 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탄식은 앞으로도 여기저기서 우리를 사로잡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진정한 의미를 논하고, 잃은 것에 대하여 얻은 것은 무엇인지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다만 여기서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해두어야 할 것은 강력한 14세기의 문화는 필연적으로 인문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향해 나아갔다는 사실, 특히 이탈리아 정신의 영역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 15세기의 끝모르는 고대 숭배에 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고대의 옹호

    우선 단테를 보자. 단테 정도 되는 천재들이 줄을 이어서 이탈리아 문화를 계속 이끌어갈 수 있었더라면 이탈리아 문화가 고대의 요소들로 가득 채워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아주 독자적인 국민적 인상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서양 전체는 단테같은 사람을 두 번 다시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맨 처음으로 고대를 분명하게 문화 생활의 전면으로 끌어들인 사람으로 남게 되었다. <신곡> 에서 그는 고대 세계와 기독교 세계를 대등하게 다루지는 않지만 계속 평행하게 다룬다. 그 이전의 중세가 구약과 신약의 역사에서 유형과 반대 유형들을 모아놓았듯 그는 규칙적으로 동일한 사실에 대해서 기독교의 예와 이교도의 예를 하나로 합친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기독교적 상상의 세계와 역사는 낯익은 것이요, 그에 반해서 고대의 그것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것, 많은 것을 약속해주는 것이며, 자극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단테같은 사람이 균형을 강조하지 않게 되었을 때 일반인의 관심에서는 필연적으로 고대 세계가 강세를 갖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페트라르카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위대한 이탈리아 작가로 남아 있다. 그에 반해 동시대 사람들 사이에서의 명성은 그가 고대를 자기 개인 안에 구현했다는 것, 고대 라틴어 문학의 모든 장르를 모방했다는 사실에서 얻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편지를 썼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이 편지들은 고대의 개별적 대상들을 다룬 일종의 논문으로서 우리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지만 안내서가 없던 당시에는 극히 소중한 가치를 지닌 것들이었다. 

    보카치오의 경우에도 비슷했다. 그는 알프스 이북에서 그의 <데카메론>에 대해 제대로 알기도 전에 이미 2백년 동안이나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얻었다. 그가 라틴어로 쓴 신화학적이고 지지학적이고 전기적인 편찬서 때문이었다. 그 중 하나인 <신들의 계보>는 제14권과 제15권에 특이한 부록이 붙어 있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의 세기에 최신 인문주의가 가지는 위치를 언급하고 있다. 그가 계속해서 오로지 '문학'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는 사실에 속아서는 안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은 그가 시인, 문헌학자의 정신적 활동 전체를 뜻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는 이런 활동의 반대자들에 맞서 싸웠다...이어서 알레고리적인 깊은 의미를 가지는 문학에 대한 적극적 옹호와 찬양이 뒤따른다. 그는 문학에 한상 나타나는 알레고리적 의미와 또한 무지한 자들의 둔한 감각에 두려운 경고를 줄 수 있도록 잘 계산된 어둠을 찬양하였다. 마지막으로 보카치오는 이교 일반에 대한 자기 시대의 새로운 관계를 자신의 학술적 적업과 관련하여 분명하게 옹호하고 있다. 초대 교회는 이교도에 대항하여 자신을 지켜야 했으므로 옛날은 지금과 사정이 달랐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참된 종교는 강해졌고 모든 이교를 물리쳤으며 승리에 넘친 교회는 적의 진영을 장악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이교를 아무 위험도 없이 관찰하고 다룰 수가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 사조를 이끌어갔던 것은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사물들이었다. 이 새로운 사물이 승리의 행진 한가운데서 멈추어 서서 일부러 자신을 제한하고 순수하게 민족적인 것이 우위를 차지하도록 만들어야 했을까를 두고 논쟁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고대가 이탈리아 민족의 최고 명예라는 것보다 더 강한 확신은 없었다.

    계관시인의 대관식

     

    Coronation as Poet Laureate by Pinturicchio 

     

    제1세대 문인, 문헌학자들에게 본질적으로 상징적인 의식이었던 것이 15~16세기에도 죽지않고 살아남았지만, 그 높은 파토스는 사라졌다. 그것은 월계관 대관식이었다. 중세의 기원은 확실하지가 않다. 그리고 대관식은 고정된 의식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문학적 명성의 공개적인 시위였고 눈에 보이는 발현이었다. 그런 이유만으로 대관식은 고정될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단테는 이에 대해 절반쯤은 종교적인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수많은 피렌체의 어린이들처럼 자기도 세례를 받았던 성 조반니 교회의 세례반 위에서 자기 머리에 스스로 관을 쓰고 싶어했다. 전기 작가가 전하는 바로는 그는 명성을 얻었기에 어디서라도 월계관을 받을 수 있었지만 고향에서 말고 다른 곳에서 받을 생각이 없었고, 그래서 끝내 월계관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 관습이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 그리스 사람들로부터 옛 로마인들에게 전해진 것으로 여겨졌다는 설명을 듣게 된다. 르네상스 시인들이 다음으로 생각해낸 것은 그리스의 모범에 따라 만들어진 카피톨 언덕에서의 시합이었다. 이것은 키타라 연주자들, 시인들, 그외의 예술가들이 벌이는 시합으로서 도미티아누스 황제 이후 5년마다 열렸고, 로마제곡이 멸망한 다음에도 얼마 동안 계속되었던 행사였다. 그러나 단테처럼 스스로의 머리에 관을 씌우는 일을 감히 바라지 못한다면 누가 관을 씌워주느냐 하는 질문이 나타났다. 알베르티누스 무싸투스는 1310년 파도바에서 주교와 대학교 학장에게 관을 받았다. 페트라르카의 대관식(1341) 을 놓고는 피렌체 사람이 학장으로 있던 파리대학교와 로마시 당국이 다투었다. 그가 스스로 선택한 시험관인 앙주의 로베르 왕은 이 의식을 나폴리로 가져가고 싶었겠지만 페트라르카는 카피톨 언덕에서 로마 원로원 의원에 의한 대관식을 선택했다. 한동안 이것은 명예욕의 목적이었다...

    피렌체에서는 유명한 인문주의자들에게 관을 씌우기는 하지만 그가 죽은 다음에 한다는 분별을 보였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이.탈.리.아 역사 > 르네상스 rinascimento'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학과 학교들  (0) 2020.03.05
    르네상스의 궁정예술  (0) 2020.03.05
    고대 로마의 작가들  (0) 2020.03.03
    유적지 로마  (0) 2020.03.03
    고대의 부활  (0) 2020.03.02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