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고대 로마의 작가들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3. 3. 15:45

     

    고대의 건축물과 미술품 유적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중요한 것이 바로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문저 유적들이다. 이 문서들은 가장 절대적인 의미에서 모든 인식의 원천으로 여겨졌다. 당시 위대한 발견의 시대의 문헌들에 대해서는 자주 서술된 바 있다. 여기서는 그 동안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던 것들 몇 가지만 덧붙히기로 하자. 

    서적 수집가들과 도서관

    고대 작가들의 영향력은 오래 전부터, 특히 14세기에 이탈리아에서는 대단히 강력한 것이었고, 옛날부터 알려진 책들은 새로 발견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손에 퍼져 있었다. 가장 잘 알려진 라틴어 시인들, 역사가, 연설가들의 글들과 서간문, 그리고 라틴어 번역서들은 아리스토텔레스, 플루타르크, 그 밖에 몇몇 그리스 사람들의 책 다음으로 보카치오와 페트라르카 세대가 열광한 책들이었다. 페트라르카는 그리스어로 된 호메로스의 책 한 권을 읽지도 못하면서 보관하고 아꼈다. 보카치오는 칼라브리아 지방에 사는 그리스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의 라틴어 번역본을 최초로 그럭저럭 완성하였다. 15세기가 되면서 새로운 발견들 상당수가 필사본으로 만들어져 도서관에 체계적으로 비치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리스어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이 활기를 띄었다.

    당시 극단적인 정도까지 열을 올리던 몇몇 수집가들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지금까지 전승된 그리스 작가들 중 극히 일부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교황 니콜라우스 5세는 수도사 시절에 이미 사본들을 사들이고 베끼기 위해 빚을 졌다. 당시에 그는 공개적으로 르네상스의 가장 위대한 두 가지 정열, 곧 책과 건축물에 대한 정열을 고백하였다. 교황이 되자 그는 약속을 지켰다. 그를 위해서 필사가들은 책을 베끼고 정탐꾼들은 세계를 절반이나 뒤졌다...교황은 바티칸 1층에 자리잡은, 모든 교황청 직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정해진 도서관에서 5천 권의 책을, 혹은 헤아리기에 따라서는 9천 권의 책을 남겼다. 궁전에도 가장 고귀한 장식품으로서 도서관을 세울 예정이었다. 마치 그 옛날 알렉산드리아에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푸스가 세웠던 도서관처럼 말이다. 그는 페스트를 피해서 궁정을 파브리아로 옮길 때도, 고전 번역자들과 편집자들이 질병에 희생된느 것을 막기 위해 그들도 데리고 갔다. 

    피렌체 사람 니콜로 니콜리는 코시모 메디치 주변에 모여들었던 학자 친구들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자신의 전재산을 책을 사는 데 썼다. 마침내 돈이 한푼도 남지 않게 되자 메디치 가문은 그에게 필요로 하는 돈을 대주었다. 암미아누스 마르첼리누스, 웅변가 키케로 등의 책이 완전히 보존된 것은 그의 덕이다. 매우 관대한 신뢰를 품고서 그는 사람들에게 책을 빌려주거나 원하는 만큼 자기 집에서 책을 보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읽은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수집품은 800권으로 금화 6천 굴덴의 가치를 가진 것이었는데, 그가 죽은 다음 코시모의 주선으로 일반에 공개한다는 조건으로 성 마르코 수도원에 기증되었다. 

     

    Niccolo Niccoli / Manuscript

     

    고대에 대한 충성심에서 저 유명한 그리스 사람 베싸리온 추기경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이교도의 책과 기독교적인 내용이 담긴 6백 권의 사본을 모았다. 그리고 이 책들을 보관할 만한 장소를 물색하였다. 불행한 조국이 언젠가 다시 자유를 얻게 되면 잃어버린 문헌들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베네치아 원로원은 건물을 짓겠다고 약속하였고, 오늘날에도 마르코 도서관은 이 보물의 일부를 보관하고 있다. 

    유명한 메디치 도서관의 설립은 특별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 그것을 상세히 다룰 수 없다. 로렌조 일 마니피코를 위한 주요 수집가는 요하네스 라스카리스였다. 1494년 약탈이 있은 다음에 수집품은 하나씩 다시 추기경 조반나 메디치(레오 10세)가 모아들였다. 오늘날 바티칸에 있는 우르비노 도서관은 위대한 페데리코 몬테펠트로가 건립한 것이다. 그는 소년 시절에 이미 수집을 시작하였다. 뒷날 그를 위해 30~40명의 문헌 필사가들이 각지에서 활동하였다. 그동안 그는 3만 두카토의 돈을 이들을 위해 지출하였다. 문헌 수집은 주로 베스파시아노의 도움으로 완전히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완성되었다. 베스파시아노가 이에 대해 보고하고 있는 것은 당시 도서관의 이상형으로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예를 들면 우르비노에는 바티칸 도서관, 피렌체의 성 마르코 도서관, 파비아의 비스콘티 도서관, 심지어는 옥스퍼드 도서관의 목록까지 가지고 있었다. 

    인문주의자들의 책

    당시 필사본과 도서관 문서들이 생겨난 방식에 관해서 우리는 몇 가지 답변을 가지고 있다. 고대 저자의 완전한, 혹은 유일하게 현존하는 고문서를 사들이는 일은 물론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행운이었으므로 거의 계산에 넣지 않았다. 필사본을 만드는 사람들 중에서 그리스어를 해독하는 사람들은 일급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그들은 문사Scrittori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얻었다. 그들은 수가 많지 않았으므로 높은 보수를 받았다. 나버지 중의 일부는 생계를 유지하는 노동자들이었고, 일부는 부수입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학자들이었다. 

    필사본은 이 시대의 책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줄 정도로 아름다운 것으로서 새 이탈리아어로 된 것들이다. 그 시작은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황 니콜라우스 5세, 포지오, 잔노쪼 마네티, 니콜로 니콜리와 다른 유명한 학자들은 타고난 서예가들로서 아름다운 것만을 원했고, 아름다운 것만을 견딜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머지 장식들 또한 세밀화를 넣지 않더라도 극히 세련된 취향을 가진 것들이다. 특히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의 필사본들이 보여주는 가벼운 선을 이룬 시작 글자와 끝글자의장식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높은 신분의 사람들을 위해서 씌어진 경우에 책의 재료는 언제나 양피지였다.

     

    Cecco d'Ascoli L'Acerba , La Vaine gloire, Florence, Biblioteca Medicea Laurenziana (1275-1325)

     

    바티칸과 우르비노 도서관의 단행본들은 은을 박아 놓은 진홍색 비단으로 되어 있다. 갑작스럽게 생겨난 인쇄본 책들이 책의 내용에 대한 존경심을 가능한 한 고귀한 장식들 통해서 보여주려고 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처음에 불쾌감을 얻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우르비노의 페데리고는 인쇄본 책을 소장하는 것을 부끄러워 했다고 한다. 

    로마 작가들과 이어서 그리스 작가들의 작품을 대량으로 복제하기 위해서 인쇄술은 곧장 그리고 오랫동안 이탈리아의 도서관에서 활용되었지만 책에 대한 전체적인 열광을 생각해볼 때 기대할 만한 속도로 빨리 퍼지지는 않았다.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자 작가와 출판사 사이에 현대적인 관계들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알렉산더 6세에 검열이 생겨났다. 이제는 책 하나를 없애는 일이 예전에 코시모가 필렐포에게 요구하면 가능하던 시절처럼 그렇게 쉽게 가능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어 연구

    언어와 고대 연구가 발전하면서 점차 텍스트 비평이 발전해나간 과정은 학문의 역사이기 때문에 이 책의 대상은 아니다. 우리의 주제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지식 자체가 아니라 문학과 삶에서 고대의 재생산이다. 그렇지만 연구 자체에 대해서 잠깐만 언급하기로 하자. 

    그리스 학문은 본질적으로 피렌체에, 그리고 15세기에서 16세기 초에 집중되어 있었다.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가 자극했던 것은 몇몇 열렬한 딜레탕트들이 참여하는 수준을 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 밖에는 그리스에서 망명한 학자들의 죽음과 더불어 그리스어 연구도 1520년대에 시들어버렸다. 북부 유럽인들(에라스무스, 에스티엔 일가, 바데우스 등)이 그사이 그리스어를 익혔다는 것은 진짜 행운이었다...

    레오 10세의 죽음과 더불어 일반적으로 그리스어 연구가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정신적인 방향이 변화한 것과, 사람들이 고전 문학의 내용에 상대적으로 물리기 시작한 데에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시기적으로 그리스 학자들의 죽음과 일치한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만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스어 연구는 1500년경을 기준으로 잡아보면 상당히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리스어를 배운 사람들은 50년이 지난 다음 노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리스어를 말할 수 있었다. 

    피렌체말고는 로마와 파도바가 거의 언제나, 그리고 볼로냐, 페라라, 베네치아, 페루자, 파비아 등이 때때로 그리스어 학자들을 고용한 도시들이었다. 그리스어 연구는 베네치아의 알도 마누치의 인쇄소에 끝도 없는 덕을 입었다. 그곳에서는 가장 중요하고 폭넓은 작가들이 처음으로 그리스어로 인쇄되었다. 알도 마누치는 자신의 재산을 거기에 걸었다. 그는 전세계에서 극히 드문 편집자이며 출판자였다.

    피코 델라 미란돌라

    여기서 고전 연구와 나란히 동양(아랍 지역) 연구도 상당한 정도의 폭을 얻었다는 사실을 적어도 언급 정도는 해야 할 것이다. 피렌체의 위대한 학자이자 정치가인 잔노쪼 마네티는 처음으로 유대인들에 반대하는 교리 논쟁을 히브리어 및 유대 학문의 습득과 연결시킨 사람이다. 그의 아들 아뇰로는 어린 시절부터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배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교황 니콜라우스 5세는 당시 문헌학자들이 불가타 성서(공인 라틴어 성서)를 포기하려고 하였으므로 잔노쪼 마네티에게 성서 전체를 새로 번역하도록 했다. 로이흘린이 나오기 훨씬 이전에 몇 명의 인문주의자가 히브리어를 자신의 연구에 받아들였다. 피코 델라 미란돌라는 유대학자로서 탈무드 지식과 철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랍어에 대해서는 의학 분야에서 맨 먼저 접근하였다. 의학 분야는 위대한 아랍 의사들의 옛날 라틴어 번역본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동양에 자리잡은 베네치아 영사관이 그에 대한 외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영사관은 이탈리아 의사들을 지원해주었다. 베네치아의 의사인 히에로니모 라무지오는 아랍 서적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한 사람이다. 

     

    Young Pico della Mirandola

     

    인문주의의 전체적인 영향으로 넘어가기 앞서 잠시 더 피코를 논해야겠다. 그는 고전적인 고대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에 분명하게 반대하고 모든 시대의 학문과 진실을 옹호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베로에스와 유대인 연구자들뿐 아니라 중세의 스콜라철학자들도 각기 내용에 알맞게 평가하였다. 그는 그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영원히 살 것이다. 자구에 얽매이는 학파 속이 아니라 현자들의 모임 안에서 안드로마케의 어머니나 니오베의 아들들에 대해서 토론하는 곳이 아니라, 신과 인간적인 사물의 더욱 깊은 근원에 대해 토론하는 곳에서. 그곳으로 가까이 오는 사람은 야만인들도 혀가 아닌 가슴 속에 정신을 가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강력하고도 아름다운 라틴어와 명료한 묘사를 통해서 그는 현학적인 순수주의와 남에게서 빌린 형식을 지나치게 평가하는 일을 조롱하였다. 특히 그런 지나친 평가가 일방적으로 사태의 위대한 진실을 희생시킬 경우에 더욱 그러했다. 반종교개혁의 물결이 더 높은 정신적 삶을 교란시키지 않았더라면, 이탈리아 철학이 얼마나 위대한 전환을 맞이했을 것인가를 그를 통해 알 수 있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이.탈.리.아 역사 > 르네상스 rinascimento' 카테고리의 다른 글

    르네상스의 궁정예술  (0) 2020.03.05
    14세기의 인문주의  (0) 2020.03.04
    유적지 로마  (0) 2020.03.03
    고대의 부활  (0) 2020.03.02
    현대적인 조롱과 재치  (0) 2020.03.02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