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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적지 로마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3. 3. 09:40

     

    옛 로마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에서 무엇보다도 유적지로서의 도시 로마가, '로마의 기적'과 맘스버리의 윌리엄(1143년경 죽음)의 역사서가 씌어진 시대와는 다른 경건함을 누렸다. 마법을 믿는 사람이나 보물을 찾는 사람이나 경건한 순례자의 상상력은 기록들에 나타난 역사가와 애국자의 상상력과 나란히 세워놓고 보면 빛이 바래고 만다. 이런 의미에서, 로마 성벽의 돌들은 경외심을 얻을 만하고, 도시가 세워졌던 땅은 사람들의 말보다 더욱 가치있다는 단테의 말이 이해가 갈 것이다...페트라르카는 우리에게 고전적인 고대와 기독교적인 고대로 나위어진 분위기에 대한 지식을 전해준다 조반니 콜론나와 함께 디오클레티아누스 Diocletianus 목욕탕의 거대한 아치 위로 얼마나 자주 올라갔던가를 이야기한다. 

     

    Baths of Diocletian

     

    이곳의 신선한 공기와 깊은 정적 속에서 탁 트인 사방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었다...사방으로 흩어진 잔재들을 바라보면서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여기서 페트라르카는 고전적인 고대를, 조반니는 기독교적인 고대를 주로 말했다. 그리고 철학에 대해, 예술의 창안자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 이후로 기번과 나부어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자주 이 폐허는 역사적인 명상들을 일깨웠던가...

    아비뇽과 로마로 분열된 교황들의 로마는 고대의 유적들과 관련해서는 몇 세대 이전의 그 로마가 이미 아니었다. 아직 남아 있던 가장 중요한 몇몇 건물들에서 그 특성을 빼앗아 가버렸던 치명적인 유린은 1258년경 원로원 의원인 브랑칼레오네가 로마 귀족들의 집 140채를 파괴한 사건이었다. 지금은 벽돌로 된 뼈대만 남아있는 곳에서도 당시에는 많은 폐허들이 여전히 훌륭한 외관과 대리석 껍질, 기둥들과 다른 장식품들을 보존하고 있었다. 이런 사정에서 옛 도시에 대한 진지한 지방학topographie 이 시작되었다. 

    포지오의 로마 순례에서 처음으로 유적 연구는 고대 작가 연구 및 묘비명 연구와 결합되었다. 공상은 뒤로 물러나고 기독교적 로마에 대한 생각이 의도적으로 분리되었다. 포지오의 작업이 더욱 확대되고 그림이 덧붙여졌더라면! 그는 80년 뒤의 라파엘로보다 휠씬 더 많은 유적들을 만났다. 대리석은 불에 타서 쉽게 석회로 변화되는 불행한 특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교황 니콜라우스 5세(재위 1447~1455)는 르네상스에 독특하고 새로운 기념비적인 정신을 보여준다. 로마시를 다시 중요하게 만들고 아름답게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유적들에 위협이 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의 명성에 걸맞은 유적에 대한 배려도 나타났다. 피우스 2세는 골동품에 관심이 많았다. 고대 로마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지만 그 대신에 나머지 이탈리아 전체의 유적들로 관심을 돌렸고 시 주변에 있는 광범위한 유적들을 처음으로 정확하게 알아보고 묘사하였다. 성직자로서 그리고 지학자로서 고대 기념비들과 기독교의 기념비들과 자연계의 경이로움이 똑같이 그의 관심을 끌었다...그의 정신은 분명하게 자연과 고대에 대한 학자로서의 관심, 기념비들에 대한 염려, 삶에 대한 관찰등에 더 많이 기울어졌다. 그는 말년에도 산과 골짜기를 넘어서 투스쿨룸, 알바, 티부르, 오스티아, 팔레리, 오크리쿨룸 등지를 돌아다니곤 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본 것을 모두 기록했다. 그는 옛날 로마 가도와 수도관을 따라가보고, 로마 주변에서 옛 종족들의 경계선을 찾아보기도 했다...

    이 시기에 물론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로마의 유적에 대한 시샘이 생겨났다. 보카치오가 벌써 바이아의 유적지(고대 캄파냐의 도시)를 "오래된 폐허,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 마음에도 여전히 새로운 곳"이라고 말했다. 그 이후로 이곳은 나폴리 지역의 가장 중요한 명소가 되었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유적지를 모아놓은 책들이 나타났다.

     

    Statue of Mercury, Archaeological park of Baiae, Baia

     

    로마의 발굴

    그 사이에 발굴을 통해서 고대 로마에 대한 실질적인 지식이 늘어났다. 알렉산더 6세 시대(재위: 1492년 8월 11일 - 1503년 8월 18일)에 사람들은 이른바 그로테스크한 것 , 즉 고대인들이 벽과 아치에 장식한 것들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포르토 단조Porto d'Anzo에서 벨베데레의 아폴론상을 찾아냈다. 율리우스 2세 치하에서는 라오콘 군상, 바티칸의 베누스, 클레오파트라의 토르소 등이 발견되었다. 큰 가문들과 추기경의 궁전들도 고대의 조각상과 부서진 파편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레오 10세를 위해서 라파엘로는 고대 도시 전체를 이상적으로 복원하는 사업을 벌였다. 그의(아니면 카스틸리오네의) 유명한 편지가 그것을 말해준다. 아직도 진행되고 있으며, 특히 율리우스 2세 치하에서 이루어진 파괴에 대해 탄식을 한 다음, 그는 레오 교황에게 저 신적인 고대 영혼들의 위대함과 힘을 지금껏 증언하고 있는 유적들을 보호해줄 것을 청원하고 있다. 더 높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아직도 그것을 열렬히 기린다고도 했다. 놀라울 정도로 날카로운 판단력으로 그는 비교 미술사의 기초를 세웠다. 그리고 마지막에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도면작성'의 개념을 확립하고 있다. 그는 각각의 유적에 대해 설계도, 투시도, 단면도 등을 따로따로 작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시대 이후로 고고학이, 특별히 신성시되는 이 세계 도시 및 그것의 지지학과 관련해서 특별한 학문으로 발전했다는 것, 그리고 비루투비우스 아카데미가 엄청난 프로그램을 했던 것 등에 대해서는 여기서 상세하게 말할 수 없다. 

     

     

    Aphrodite of Knidos by Praxiteles in the 4th century B.C. from fine marble

     

    여기서 우리는 잠시 레오 10세를 이야기해야 하리라. 그의 치하에서 고대 찬양은 온갖 다른 즐거움들과 함께 로마에서의 생활에 축복이 되었던 경이로운 인상을 만들어냈다. 바티칸은 노래와 현악기 소리로 넘쳐났다. 삶의 즐거움을 향한 기도문처럼 이 음악은 로마를 넘어서 퍼져나갔다. 파올로 조비오가 기술한 레오 10세 치하 로마의 영광스러운 모습에서 우리는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다. 출세하려는 사람들의 예속 상태, 빚을 지고 있으면서도 신분에 맞는 생활을 해야 하는 고위 성직자들의 은밀한 고민, 복권 당첨같이 우연스럽고 변덕스러운 교황의 문학 후원 방식, 그리고 완전히 엉망인 재정 분제 등 이 시대의 어두운 측면들이 아주 잘 증언되어 있는데도 그렇다. 이 일들을 그토록 잘 알고 비웃었던 아리오스토는 그래도 여전히 여섯 번째 풍자시에서, 자신과 함께 폐허의 도시를 순방하는 교양 높은 시인들과의 교류, 자신의 작품을 위해 그 자신이 생각해낸 자문단, 그리고 바티칸 도서관에 있는 보물들을 그리움에 가득 차서 그려내고 있다.

    로마의 유적들은 로마 안팎에서 고고학적인 열의와 장엄한 애국적 감정뿐만 아니라 비가적, 감상적 감정도 일깨웠다.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에게서 이미 이런 종류의 탄식을 볼 수가 있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야후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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