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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네상스의 궁정예술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3. 5. 09:31

     

    15세기에 이르러 시에나는 예술사에서의 주도적 역할을 상실한다. 그리고 이때부터는 경제적 번영이 정점에 다다른 피렌체가 또다시 전면에 나타난다. 피렌체의 이러한 경제적 위치만으로는 거장들의 존재와 그들 예술의 특징을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러한 경제적 번영으로 피렌체에서 예술작품의 주문이 끊이지 않았고 거장들이 배출될 수 있는 정신적 경쟁의 풍토가 조성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때부터 피렌체는 결코 전형적이라고 할 수 없는 독자적인 발전을 하고 있던 베네치아를 빼고는, 진보적인 예술활동의 유일한 중심지가 되었다. 피렌체의 이러한 예술활동은 대체로 서구의 중세 후기적 궁정양식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독자적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시민적인 문화가 우세했던 피렌체에서는 북이탈리아의 궁정을 통하여 수입된 프랑스의 기사문학에 대해서는 매우 제한된 관심을 보였을 따름이다. 북이탈리아 지역은 본래 지리적으로 서구와 가깝고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지역과 인접해 있다. 이로 인해 북 이탈리아에서는 13세기 후반에 이미 프랑스의 기사소설이 보급되었고, 다를 유럽국가들처럼 이들 기사소설을 단순히 번역,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프랑스어로 직접 써서 계속 발전시켰다. 사람들은 프랑스어로 서사시를 썼다. 물론 이탈리아 중부에 위치한 상업도시들 역시 북쪽과 서쪽의 여러 나라와 소통을 했고 이곳 상인들은 프랑스 및 플랑드르와 교역을 했으며, 이를 통해 기사적 문화를 토스카나로 전달하기는 했지만, 독자적인 기사적 서사시나 낭만적, 궁정적, 기사적 스타일로 그려진 스케일이 큰 회화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포Po 강 유역의 밀라노, 베로나, 파도바, 라벤나와 그밖의 중소도시에서와 같이 군주나 독재자들이 그들이 생활을 엄격하게 프랑스 모델에 맞추어 영위하던 궁정에서의 회화할동은 기사소설의 삽화에만 한정되지 않고 벽의 장식에까지 확대되고 있는데 이런 벽 장식에는 모티프의 묘사, 혹은 전쟁과 무술시합, 수렵과 기마행렬, 유희,무용장면, 신화, 성경, 역사에 나오는 이야기, 영웅들의 초상, 기독교의 기본 도덕과 '일곱가지 학예'(중세 대학의 기본 교과인 문법, 수사학, 논리, 산술, 기하, 음악, 천문)그리고 무엇보다 연애를 나타내는 알레고리가 다양한 형태와 뉘앙스로 그려졌다. 이런 회화는 대체로 장식용 벽걸이로 사용되던 태피스트리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이러한 벽화의 근원은 십중팔구 태피스트리라는 장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벽화는 태피스트리의 그림처럼 축제 분위기와 화려한 인상을 나타내려 하는데, 이는 주로 의상의 화려함과 인물들의 도식적인 거동 묘사를 통해서이다. 화면의 인물들은 재래적인 포즈로 그려져 있으나 비교적 잘 관찰되고 상당히 능숙한 솜씨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러한 점은 중세 말기의 시민적 예술도 바로 고딕의 자연주의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보면 한층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Bolzano - Castel Roncolo. Sala del Torneo,  14c

     

    르네상스의 자연주의가 신록의 배경과 신선하게 관찰, 묘사된 동식물을 담은 이런 벽화들에 얼마나 힘입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피자넬로의 예만으로도 충분하다. 최초의 궁정적 장식화에 영향을 입은 그림 중에서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는 얼마 안되는 그림들은 아마 15세기 초기에 만들어진 것인 듯 한데, 좀더 오래된 14세기 그림도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현존하는 이런 장식화는 삐에디몬테와 롬바르디아 평원에 있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는 살루초의 라 만타 성과 밀라노의 보로메오 궁에서 볼 수 있다. 동시대인의 기록에 의하면, 그밖에도 북이탈리아의 많은 영주 저택이 매우 수준 높은 장식화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베로나의 칸그란데 성이나 파도바의 카라라성이 대표적인 예이다. 

     

    The ball game, scene from the Games cycle, ca 1445-1450, fresco, Palazzo Borromeo

     

    트레첸토의 도시공화국 예술은 궁정미술과 달리 주로 교회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15세기에 이르러서야 그들의 정신세계와 양식은 하나의 변화를 겪게 되는데 이때부터 도시공화국의 예술은 새로운 개인적인 예술에 대한 욕구와 일반적인 합리화 과정에 부응해서 세속적인 성격을 띠기 시작한다. 역사화나 초상화 등 새로운 세속적 유형이 등장할 뿐 아니라 종교적인 그림도 이제는 점차 세속적인 모티프로 채워지게 된다. 물론 부르주아 예술은 아직도 궁정예술보다 더 많은 점에서 교회 및 종교와 관련을 맺고 있었고, 적어도 이러한 면에서만은 시민계급이 궁정사회 사람들보다도 더 보수적이었다. 궁정적, 기사적 예술의 특징은 15세기 중엽부터 도시 시민계급의 예술, 특히 피렌체 예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음유시인들이 전파한 기사소설이 이제 사회의 하층민에까지 침투하여 대중적인 형태를 띠게 되고 토스카나 지방의 도시들에까지 파급되었는데, 물론 이러한 대중화 과정에서 기사소설이 그 본래의 이상주의적 성격을 잃어버리고 단순히 오락문학으로 전락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사문학은 무엇보다도 이탈리아 국내 화가들이 낭만적 소재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는데, 여기에는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와 도메니코 베네치아노 처럼 자기 고향인 북이탈리아의 궁정예술 취향을 피렌체에 보급시킨 화가들의 직접적인 영향도 없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부유하고 영향력이 커진 상류층의 시민계급도 궁정사회의 생활양식을 몸에 익히기 시작했고 기사적, 낭만적 주제에서 이국취미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본받아야 할 포본 같은 것을 찾으려 하게 되었다. 

     

    Adoration of the Magi, Gentile da fabriano (1423) 

     

    The Coronation of the Virgin, Gentile da fabriano,1422 until 1425

     

     

    Madonna and Child. Domenico Veneziano, between 1435 and 1437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야후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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