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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연주의의 변모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3. 9. 10:10

     

    1400년대 예술의 기본 경향을 이룬 자연주의는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여러차례 방향을 바꾸었다. 웅장함과 반고딕적인 단순함, 무엇보다도 공간관계의 명확성과 비율을 존중하는 마사치오의 자연주의와 고쫄리의 예술에 나타나는 풍부한 내용의 풍속화, 그리고 산드로 보티첼리의 심리학적 감수성은 바로 단순한 상태에서 금융귀족으로 성장해간 시민계급 발전사의 각기 다른 세 단계를 반영하고 있다.

    브란카치Brancacci 예배당에 그려진 마사치오의 세례도에 나오는 <추위에 떨고 있는 남자>의 경우와 같이 생활에서 직접 따온 주제는 1400년대 초기에는 아직도 진귀한 예에 속하는 것이지만, 중반에 이르러서는 일반적인 일이 되었다. 

     

    Baptism of the Neophytes , by  Masaccio,  1425 to 1427

     

    이때부터 처음으로 개인적이고 개성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전면으로 부각된다. 이때 비로소 '자잘한 진실들이 합쳐져서 형성된 세계상' 이라는 이념이 생겨났는데, 이는 지금까지의 예술사에서 아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던 것이었다. 

    매일매일의 일상적인 시민생활에서 나오는 삽화적 사건들, 거리의 풍경, 집 내부, 성경에서 주제를 딴 산실과 약혼 장면, 성모 마리아의 탄생과 강탄제 풍경, 중산층 가정의 환경 속에 그려진 성 히에로니무스의 상, 바쁜 도시생활 속에 그려진 성자의 생활 등이 새로운 자연주의적 예술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들이 '성자 역시 한 인간에 불과하다' 는 의미로 그려졌다든가 부르주아지의 일상생활을 즐겨 그리는 것이 당시 시민계급의 분수를 지킬 줄 아는 의식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일 것이다. 실제로는 이와 반대로 시민계급은 이러한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그림의 부분부분에서 자기만족감과 대단한 자부심을 느꼈던 것이다. 예술애호가로 새로이 등장한 부유한 시민계급들은 실제 생활에서는 그들이 차지하는 사회적 위치를 잘 인식하고 있었지만 예술에서만큼은 실제 자신의 사회적 위치보다 더 돋보이려고 노력했다. 

    15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야 비로소 변화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삐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이미 장중한 정면성과 의식적인 형식을 즐겨 쓰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에게 예술품을 주문한 사람은 대다수가 영주나 귀족들이었고 그의 예술은 궁정적 전통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있다. 그러나 피렌체에서는 15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예술이 -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장식적이 되고 고아하고 섬세한 것을 추구하기는 하였지만 - 대체적으로 관습이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아무튼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보티첼리와 도메니코 길란다이오의 예술을 감상하던 사람들은 마사치오와 젊은 도나텔로의 발주자였던 초기의 청교도적 시민계급과는 아무런 공통점을 발견할 수 없을 정도였다. 

     

     

    Masaccio self portrait in the Brancacci chapel, Santa Maria del Carmine

     

    코지모 메디치와 로렌조 메디치 사이의 대조, 그들이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고 사생활을 영위하던 원칙의 차이는 두 사람의 세대를 갈라놓는 현격한 거리를 잘 나타내고 있다. 코시모 시대의 정권은 비록 외관상으로나마 민주적 공화국이라는 형태를 띄었던 반면, 로렌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인 공국군주정치로 이행하고 '제1시민'과 그 추종자들은 신하를 거느리는 군주로 바뀌었듯이 한때 너무나 근면하고 검소하던 시민계급은 이제는 노동과 돈 버는 것을 경멸하고 그 대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향유하면서 취미생활에 전념하려는 금리생활자 계급으로 변했다. 코시모 메디치만 해도 아직은 사업정신에 투철한 사업가였다. 물론 그는 예술과 철학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집과 별장을 짓게 했으며, 예술가와 학자에 둘러싸여 있었고, 필요하다고 느낄 때는 격식과 위용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생활중심은 언제나 은행과 사무실이었다. 이에 반해 로렌조 메디치는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들이 하던 사업에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가문의 사업을 보살피지 않고 아랫사람들에게 맡겨버렸다.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오로지 국가 정무, 유럽 군주들과의 외교, 궁정의 경영,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역할, 주변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과 미술 아카데미, 자신의 시작 취미와 예술보호자로서의 역할이었다.

    물론 이러한 일은 모두 외부적으로는 아직도 시민적 가장이라는 형식아래 행해졌다. 로렌조 메디치는 자신과 자기 집안을 공식적인 예찬 및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집안식구들의 초상화는 당시의 다른 상류층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언제나 사적인 목적에서만 사용했고, 백년 후의 대공들이 세운 입상처럼 공식적 용도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야후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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