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인간의 발견 : 르네상스의 연극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4. 14. 10:18

     

    어째서 르네상스의 이탈리아인들은 비극 분야에서 우수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 것일까? 이 분야는 사람들의 성장과 싸움과 패배 과정의 수많은 형식들로 인물, 정신, 정열 등을 보여주는 영역이다. 다른 말로 하면 어째서 이탈리아는 세익스피어를 배출하지 못했는가 하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이탈리아인들은 16,17세기의 나머지 북유럽 연극들은 능가한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극을 놓고 에스파냐와는 경쟁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종교적 광신주의에 사로잡히지 않았으며 절대적 명예 관념은 형식적으로만 가지고 있었고, 자신들의 불법적인 군주들을 경배하고 찬양하기에는 너무 영리하고 자부심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탈리아 연극은 영국 연극의 짧은 전성기하고만 비교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는 유럽 전체가 하늘의 드문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 밖에도 이탈리아 연극이 막 꽃피어나기 시작했을 때 반종교개혁이 시작되었고, (나폴리와 밀라노,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거의 이탈리아 전역에) 에스파냐가 들어와 지배하면서 이탈리아 정신의 가장 훌륭한 꽃들이 꺾이거나 시들게 되었다. 에스파냐의 섭정 통치 하에서나 로마의 종교재판을 옆에 두고 - 아니면 영국이라고 해도 몇십 년 뒤 영국 종교개혁의 시기라면 - 세익스피어가 나올 수 있었겠는가를 생각해 보라. 가장 완성된 형태의 연극은 모든 문화 발전에서 가장 늦게 나타나는 법이고, 그것은 또한 적절한 시기와 행운을 가져야 나타나는 것이다. 

    이 기회에 이탈리아에서 연극이 더 높은 꽃을 피우기 어렵게 만들었거나 아니면 그것을 지연시킨 몇 가지 사정들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구경을 좋아하는 호기심이 다른 것에 열중해 있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처음에는 신비극과 다른 종교극에 관심이 쏠렸다. 유럽 전체에서 연극의 기원은 연극으로 만들어진 성서 이야기나 전설들이다. 그러나 다음에 이야기하게 되겠지만, 이탈리아는 예술적으로 장식적인 화려한 감각을 가지고 신비극에 빠져 있었고, 이런 사정은 연극적 요소의 발전에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수많은 화려한 공연들에서 칼데론과 다른 에스파냐 작가들이 쓴 성사극같은 시적인 예술 장르가 발전되어 나오지 못했고, 하물며 세속적인 연극을 위한 이점이나 기반은 더더욱 되지 못했다. 

    세속적인 연극은 생겨나자마자 있는 힘을 다해 화려한 장치에 치중했다. 그것은 신비극에 익숙해진 버릇이었다. 이탈리아에서 무대 장치가 얼마나 풍부하고 화려한 것이었는지는 깜짝 놀랄 정도이다. 북부 유럽에서는 극히 단순하게 장소만을 암시하는 정도로 만족하던 시절에 말이다. 그러나 공연은 한편으로는 의상의 화려함을 통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다채로은 막간극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래서 연극이 시적인 내용으로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Teatro Olimpico, Vicenza, Italy; designed by Andrea Palladio and completed by Vincenzo Scamozzi, 1585.

     

     

    수많은 장소에서, 그 중에서도 특히 로마와 페라라에서 플라우투스와 테렌티우스, 그리고 고대 비극 작가의 작품들이 때로는 라틴어로 때로는 이탈리아어로 공연되었다는 것, 아카데미들이 주로 이 공연을 맡았다는 것, 그리고 르네상스 작가들이 희곡을 쓰면서 고전적 모범들에 필요 이상으로 종속되었다는 것 등이 이탈리아 연극에 수십 년 간 불리하게 작용햐였지만, 나로서는 이런 사정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반종교개혁과 외국인 지배가 끼어들지만 않았더라면, 그런 불리함을 꼭 필요한 과도적 단계로 삼아 발전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1520년 이후로 인문주의자들의 엄청난 실망에도 불구하고 희극과 비극에서 이탈리아어의 승리는 확정되다시피 했다. 유럽에서 가장 발전했던 이 국민은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어떤 장애도 물리치고 연극을 가장 고귀한 뜻 그대로, 인간의 삶의 정신적인 묘사로 승격시켰을 것이다. 종교재판관들과 에스파냐 사람들이 이탈리아 사람들을 움추러들게 만들어서, 가장 참되고 위대한 갈등의 극적인 묘사를, 특히 국민적인 기억의 의상을 입은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연극 발전을 가로막은 요인으로서, 관객이 관심을 분산시켰던 막간극을 좀더 상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막간극과 창작 비극

    페라라의 공작 알폰소가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와 결혼했을 때 에르콜레 공작은 고귀한 손님들에게 다섯개의 플라우투스 희극 공연에 쓰일 의상 110벌을 손수 보여주었다. 같은 옷이 두 번 쓰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호박직과 낙타직으로 만들어진 이 호사품도 플라우투스 희극의 막간극으로 공연될 춤과 팬터마임 장비들과 비교해본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플라우투스 희극이 이사벨라 곤차가 같은 젊은 숙녀에게 지루하게 여겨졌다는 사실, 그리고 누구나 연극이 공연되는 동안 막간극만을 고대했다는 사실 등은, 막간극에 쓰이는 장비들의 화려함을 생각해본다면 이해가 되는 일이다. 막간극에는 로마 전사들의 싸움이 있었다. 그들은 고대의 무기를 음악의 박자에 맞추어 기가 막히게 움직였다. 그리고 무어 사람들의 횃불 춤도 있었다. 그것은 풍요의 뿔을 쓴 남자들의 춤으로, 뿔에서는 불길이 솟아나왔다. 이런 춤들은 하나의 팬터마임을 이루는데, 그것은 용들에게서 한 소녀를 구출해내는 내용이었다. 다음으로는 풀치넬라 의상을 입은 어릿광대들이 춤을 추면서 돼지 방광으로 서로를 때렸다.

     

     

    페라라 궁정에서 모든 희극이 '각자의' 츰판moresca를 가진다는 것은 공인된 사실이었다. 1491년, 알폰소가 안나 스포르짜와 처음 결혼할 때 이루어진 플라우투스의 <암피트루오Amphitruo>공연을 생각해본다면 그것이 연극이라기보다는 음악을 동반한 팬터마임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여전히 남는다. 어쨌든 막간극으로 삽입된 것이 원래의 연극보다 훨씬 압도적인 것이었다. 거기서는 시끄러운 오케스트라 음악을 동반하고 담쟁이 덩굴로 몸을 감싼 젊은이들의 춤을 볼 수 있었다. 다음에는 아폴론이 나타나서 리라를 채로 두드리면서 에스테 가문에 대한 찬가를 노래한다. 이어서 일종의 막간극으로서, 농부들의 풍속화 장면이나 재담이 나오고, 다시 베누스, 바쿠스와 그들의 시종들이 등장하는 신화 내용이 무대를 점령한다. 그리고 팬터마임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야 암피트루오 후반부가 공연되는데, 그것은 에스테 가문에 장차 헤라클레스 같은 영웅이 탄생하리라는 암시를 담은 내용이었다. 그보다 일찍 궁정 뜰에서 이 연극이 공연되었을 때에는(1487) '별들과 다른 바퀴들이 있는 천국' 이 계속 불타고 있었다. 다시말하면 아마도 불꽃놀이를 곁들인 조명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것은 분명 사람들의 관심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을 것이다. 그런 부속 공연이 차라리 본 공연으로 등장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다른 궁정에서는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다. 그러나 추기경 피에트로 리아리오나 볼로냐의 벤티볼리오의 집에 있었던 공연들에 관해서는 축제 항목에서 다루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관습으로 정착된 이러한 화려한 장비는 특히 이탈리아 창작 비극에 불운이 되었다. 프란체스코 산소비노는 1570년경에 이렇게 쓰고 있다. "전에 베네치아에서는 고대와 현대 작가들의 희극뿐 아니라 비극도 대단히 화려하게 공연되었다. 장비의 명성에 이끌려서 먼 곳이나 가까운 곳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개인들이 준비하는 축제 공연들은 그들의 집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얼마 전부터는 희극 공연과 다른 명랑하고 재미 있는 오락들로 사육제 기간을 보내는 관습이 정착되었다." 다시말하면 화려한 공연이 비극 작품을 죽이는 데 일조했다는 뜻이다. 

    현대 비극 작가들의 시도, 그 중에는 트리시노의 <소포니스바Sofonisba, 1515>가 명성을 얻었는데, 이것들은 문학사의 영역에나 속할 뿐이다. 그리고 플라우투스와 테렌티우스를 모방한 더 고상한 희극도 마찬가지다. 아리오스토 같은 사람도 이 장르에서는 전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에 반해 마키아벨리, 비비에나, 아레티노 등이 썼던 인기 있는 산문 희극은, 내용 때문에 몰락하지만 않았더라면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그 내용은 때로는 극히 음란하였고, 때로는 사회의 특정 계층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 계층은 1540년 이후로는 공개적인 미움을 사지 않게 된 계층이었다. <소포니스바>에서는 화려한 낭독을 위해 인물의 성격을 희생시켜야 했다면, 산문 희극은 의붓누이인 풍자 희화와 똑같이, 희극 형식을 너무나 가혹하게 사용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비극과 희극을 쓰는 일,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고전극과 현대극의 공연은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축제일에 신분에 맞는 화려함을 발전시킬 기회로 이용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천재들은 그것을 살아 있는 장르로 여기지 않았다. 목가극과 오페라가 등장하자 사람들은 희극과 비극을 완전히 포기하고 말았다. 

     

    즉흥 희극: 코메디아 델 아르테

    단 하나의 장르만이 국민적인 것으로 살아남았다. 정해진 대본이 없었던 즉흥희극이었다. 즉흥희극은 원래 주어진 시나리오에 따라 즉흥적으로 공연되었다. 그것은 누구나 대사를 외울 정도로 정해진 배역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인물 유형을 발전시키기에 유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탈리아 사람들의 재능은 이 장르에 상당히 적합했다. 그들은 대본이 있는 희극 공연의 경우에도 때때로 즉흥적인 대사를 끼워 넣을 정도였기에. 이 새로운 혼합 형식의 희극은 여기저기서 인기를 얻을 수가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베네치아에서는 부르키엘로Burchiello, 아르모니오Armonio 협회, 주카토V.Zuccato, 돌체L.Dolce 등이 이 희극을 공연하였다. 부르키엘로에 대해서는 그가 그리스어와 슬라브어를 섞어 넣은 베네치아 사투리를 써서 이 희극의 인기를 높였다고 전해진다. 거의 완벽한 즉흥희극은 '루찬테Il Ruzzante,1502~1524' 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안젤로 베올코 Angelo Beolco의 작품이었다. 그의 작품에 항상 등장하는 가면 쓴 배역은 파도바의 농부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후원자인 루이지 코르나로의 코데비코 별장에서 여름을 보낼 때면 언제나 파도바 사투리를 연구하곤 하였다. 이어서 차음 모든 지방 출신의 유명한 가면 배역들이 나타난다. 그 일부를 이탈리아인들은 오늘날에도 재미있게 여기는데, 판탈로네, 도토레, 브리겔라, 풀치넬라, 아를레키노 등의 배역들이다. 그들은 대부분 아주 오래된 배역들로서 일부는 고대 로마 소극의 가면 배역과 연관되어 있었는데, 16세기에 와서야 하나의 작품 안에 통합되었다. 이런 일은 오늘날에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쨌든 큰 도시들은 각기 자신의 지방 배역을 가지게 되었다. 나폴리는 풀치넬라Pulcinella를, 피렌체는 스텐테렐로Stenterello를, 밀라노는 때때로 놀라운 역할이 되는 메네기노Meneghino를 차지한 것이다.

     

    THE TRADITIONAL MASKS OF THE ITALIAN CARNIVAL: FROM PULCINELLA TO STENTERELLO

     

    Maschere della Commedia dell'Arte

     

    다른 누구보다도 연극이라는 거울 속에 자기들의 가장 훌륭한 모습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바라볼 재능을 가진 위대한 국민에게는 보잘것 없는 보상이었다. 그러나 연극 장르는 앞으로 수백년 동안이나 적대적인 세력에 의해 이탈리아 국민에게 거부된 상태로 남게 된다. 이런 적대적인 세력이 들어온 것에 대해서 그들에게는 일부만 책임이 있었다. 극히 광범위하게 퍼진 연극의 재능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음악에서 이탈리아는 유럽 전체의 감사를 받을 만한 입장이었다. 거부된 연극의 대체물이나 은폐된 표현을 음악의 세계에서 보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으로 위안을 삼아도 될 것이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