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예술가와 인문주의자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4. 28. 09:12

     

    우리는 화가와 조각가가 길드로부터 해방되고 수공업자의 위치에서 시인과 학자의 위치로 상승한 원인을 그들이 인문주의자와 결합한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우리는 인문주의자가 예술가의 편을 든 이유를, 고대문화의 열광자인 인문주의자들이 그리스나 로마의 기념비적 문학작품과 미술작품은 서로 분리될 수 없을 정도의 통일체를 이루었고 또 고대에는 미술가도 시인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명망을 누렸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로 설명해왔다. 실제로 인문주의자들로서는 공통적인 유래로 인해 똑같은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보던 이들 예술품의 창조자들을 동시대인들이 자기들과 달리 평가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동시대인들, 그리고 나아가서는 19세기에 이르기까지의 후세사람들에게 고대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단순한 '장이'에 지나지 않았던 조형예술가들을 시인과 마찬가지로 신의 총애와 영광을 누리는 존재임을 확신하도록 만들었다. 르네상스에서 예술가의 해방을 위한 노력에 인문주의자들이 일조했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인문주의자들은 미술시장의 호경기 덕분으로 얻어진 예술가들의 사회적 위치를 확고히 해주었고 예술가들이 길드와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자기들 사이에 있던 보수세력, 즉 예술가로서 변변치 못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했던 보수적 분자들의 반대에 대항해서 그들의 요구를 관철할 수 있는 이론적 무기를 예술가들 손에 쥐여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인들의 보호가 결코 예술가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의 근본이유는 아니었고, 그 자체가 오히려 그러한 향상의 한 징후였다. 다시 말하면 한편으로는 새로운 도시 지배층과 군주들이 생겨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가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부유해짐에 따라, 종전의 미술시장에서 보이던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이제 서서히 사라져서 거의 완전한 균형을 이루게 된 사회발전의 한 징후였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길드는 생산자들에게 유리하도록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을 방지하는 데에 그 본래의 목적이 있었다. 길드 당국이 조합원들이 길드의 규칙을 어겨도 눈감아주게 된 것은 주문이 많아져서 더이상 예술가들에게 실업의 위험이 없어졌다고 느껴지면서부터이다. 예술가들이 독립하게 된 것은 이와같이 미술시장에서 예술가들의 실업 위험이 점차 감소되었기 때문이지 결코 인문주의자들이 후의 때문은 아니었던 것이다. 예술가들이 인문주의자들을 동료로 삼고자 했던 것은 그들의 힘을 빌려 길드의 저항을 깨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경제적으로 구축한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인문주의적 사고에 젖어 있던 당시의 상층계급에 맞서서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고, 또 당시 유행하던 신화적, 역사적 주제들에 관해 그들이 학문적 조언을 얻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에게는 인문주의자가 그들의 정신적 가치를 인정해주는 보증인이었고 인문주의자들은 미술을 그들의 정신적 지배권의 기초가 되는 이념을 효과적으로 선전하는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호 결합관계로부터 오늘날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된 통일적인 예술 개념이 비로소 생겨났는데, 르네상스 이전까지만 해도 이것은 생소한 개념이었다. 조형예술을 문예와 전혀 다른 의미로 생각했던 사람은 플라톤만이 아니라, 고대 말기나 중세에도 이를테면 학문과 문학 사이나 철학과 예술 사이보다도 조형예술과 문학 사이에 더 밀접한 관련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새로운 미술이론

    중세에는 미술에 관한 이론을 기술한 문헌이란 처방이나 비법을 적어놓은 정도에 한정되어 있었다. 실제적인 일에 대한 방안을 기술한 이러한 소책자에서는 아직도 미술은 수공업과 전혀 구별되고 있지 않다. 첸니노 첸니니의 회화론도 아직 길드의 사고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주로 미래의 길드가 지향해야 할 장인들의 도덕 개념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는 미술가들에게 근면하고 순종 잘하며 끈기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고, 완전한 미술가가 되는 가장 확실한 길은 모범적인 작품들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아직도 중세적, 전통적 사고의 맥락에 서 있는 것이다. 스승들의 모방 대신에 자연의 연구를 내세워 이론적으로 처음 정리한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인데, 물론 그것은 실제로는 이미 오래 전에 이루어진바 전통에 대한 자연주의와 합리주의의 승리를 표현한 데 지나지 않았다. 자연연구를 기초로 해서 성립된 그의 예술이론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그 사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알려준다. 미술이 수공업적 정신에서 완전히 해방되기 위해 선행되어야 했던 것은 길드의 낡은 교육체제의 변혁과 길드에 의한 교육독점의 지양이었다. 미술가로서 직업을 행사하는 권한이 길드의 장인 밑에서의 일정 기간의 수업과 결부되어 있는 한, 미술가들은 길드의 영향이나 수공업적 전통의 지배를 깨뜨릴 수 없었다. 지금까지 재능있는 새로운 후진의 발전을 가로막았던 구제도의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이제 후진양성의 예술수업은 길드의 작업장에서 학교로 옮겨져야 했고, 실제적인 일을 통한 종래의 교수방법의 일부는 이론적인 교수방법으로 전환되어야만 했다. 물론 새로운 교육체제도 시간이 감에 따라 나름의 새로운 구속과 새로운 장애물을 낳았다. 처음에는 자연이라는 모범이 장인의 권위를 대체하였으나 나중에 가서는 완결된 아카데믹한 교수체계가 정립됨으로써 이때부터는 이제 권위를 상실한 옛 모델 대신에 그에 못지않게 엄격하지만 과학적인 근거를 둔 새로운 예술의 이상이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미술교육의 이와같은 과학적 방법은 작업장에서 이미 시작된 것이다. 초기 콰트로첸토에도 이미 도제들에게 손으로 하는 일과 병행해서 기하학, 원근법, 해부학의 가장 초보적인 지식을 가르쳤고 실제 모델이나 기계적인 인형을 스케치하는 방법도 가르쳤다. 장인들은 아틀리에에 스케치 과목을 설정했는데, 이러한 제도에서 발전한 것이 한편으로는 이론과 실기 수업을 병행하는 사설 아카데미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종전의 작업공동체 형식과 수공업적 전통을 지양하고 그 대신 교사와 학생이라는 순전히 정신적인 관계를 정립한 공적인 아카데미들이다. 작업장 교육과 사설 아카데미는 친퀘첸토 전시기를 통하여 유지되었으나, 예술의 양식을 좌우할 정도의 영향력은 점차 잃어갔다.

    아카데미 교육의 기초를 이루는 과학적 예술관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와 더불어 시작된다. 그는 최초로 수학이 예술과 학문의 공통적인 근본이라는 견해를 표명했는데, 이유는 비례의 학설과 원근법 이론이 모두 수학에 속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마사치오와 우첼로 이래 이미 이루어졌던 실험적인 기술자와 관찰하는 예술가 사이의 일체화도 그에 의해 최초로 명백히 표현되었다. 이들 기술자와 예술가는 모두 세계를 경험이라는 형태로 파악해서 이러한 경험에서 합리적인 법칙을 추출하려고 했고, 양자 모두 자연을 인식하고 지배하고자 했으며, 무엇을 만든다는 행위 즉 그리스어의 포이에인Poiein에 해당하는 행위를 통해 순전히 관조적이고 스콜라 철학적, 사변적 테두리에 묶여 있던 대학교수들과는 구분되었다. 그리고 기술자나 자연연구가가 이제 그들의 수학적인 지식으로 인해 지식인으로 인정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듯이 많은 경우에 기술자, 자연연구가와 동일인이던 예술가들 또한 이제부터는 단순한 장인과 구별되기를 기대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예술수단이 '일곱 학예' 내지는 '자유교양'에 한몫 끼이기를 기대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 빈치는 예술을 학문과 같은 위치로까지 끌어올리고 예술가를 인문주의자와 동일한 서열에 두었던 알베르티의 논술에 근본적으로 새로운 생각을 덧붙히지 않았다. 단지 그는 그의 선배가 내건 주장을 더욱 강조하고 더 확대했을 따름이다. 다 빈치의 주장에 의하면, 회화는 한편으로는 일종의 정밀한 자연과학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학문 위에 군림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학문이 '모방될 수 있는 것', 다시 말해서 비인격적인 것인 반면 예술은 개인 및 개인의 타고난 재능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 빈치는 회화가 '기본 학예'의 하나로 인정되어야만 한다는 요구를 정당화하면서 화가는 예술가의 수학적 지식뿐만 아니라 시인의 천재성에 필적할 만한 재능까지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그는 시모니데스Simonides(기원전 6~5세기 그리스 시인)의 말이라고 전해지는 "회화는 말 없는 시이고, 시는 말하는 회화"라는 격언을 다시 끄집어내어 각종 예술간의 서열에 관한 수세기에 걸친 일련의 논쟁, 18세기의 G.E.Lessing까지도 참여하게 되는 논쟁의 포문을 열었다. 다 빈치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 회화의 결점이라고 한다면, 똑같은 의미에서 시 역시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결점을 찾을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인문주의자와 좀더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예술가라면 이런 이단자적인 주장을 감히 입밖에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The Head of the Virgin in Three-Quarter View Facing Right  is a drawing by Leonardo Da Vinci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