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보다 아름다운 삶에의 열망
    이.탈.리.아 역사/중세역사 medioevo 2020. 3. 19. 11:24

     

    시대 전체가 보다 아름다운 삶을 열망한다. 현재가 어둡고 혼란스러울수록 그 같은 열망은 더 깊어지게 마련이다. 중세말의 삶은 침울한 멜랑코리로 가득차 있다. 15세기의 프랑크 - 부르귀뇽 세계에서는 르네상스기를 관통하며 울려오는 저 대담한 삶의 기쁨, 인간 자신의 힘에 대한 신뢰의 기색을 거의 들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 시대는 다른 시대에 비해 더 불행한 시대였을까? - 간혹 그렇게 믿으려는 경향이 있으나 매 시대마다 행복한 기억보다는 불행과 고통의 흔적을 더 많이 남긴다. 주로 불행한 일들이 역사에 남는 것이다. 

    중세의 기쁨은 아직 섬광을 발하고 있다. 민요, 음악, 풍경화의 평화로운 정경, 초상화의 엄숙한 자태 속에 그대로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15세기에는 드러내놓고 삶을 찬양하는 일은 정서에 맞지 않았고 또 점잖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 당시 프랑스 정신에서는 르네상스서부터 18세기까지 증대될 낙관론은 아직 낯선 것이었다. 희망과 만족으로 자기네 시대를 논하기 시작한 최초의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시인도 종교가도 정치가도 아닌 박학자와 인문주의자들이었다.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자기 시대에 대한 기쁨의 탄성을 발하게 만든 것은 고대의 예지를 재발견한 자부심이었다. 곧 지성의 승리였던 것이다. 

    "오 세상이여! 오 학문이여! 삶의 기쁨이여!" 울리히 드 후텐의 잘 알려진 탄성을 들어보라. 인간 예찬이라기 보다는 지식인 예찬이다...인문주의자들이 삶을 어떻게 평가했는가를 보려면 1517년에 씌어진 에라스무스의 편지를 참조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는 유럽 제후들 간에 화합의 기운이 일며 그들이 평화를 원하게 되었다고 서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모든 것을 볼 때 나는 미풍양속 및 기독교 신앙의 부활과 만개, 진정하고 순수한 문예 및 예술 분야의 재생에 대한 소망을 확신하게 됩니다." 즉 제후들의 보호하에 그럴 것이라는 것이다. "마치 신호라도 떨어진 듯 이름 높은 천재들이 일제히 각처에서 일어나 문예부흥에 부응하는 현상은 모두 다 그들의(제후들)의 신앙심 덕택임을 알아야 합니다." 르네상스와 인문주의의 지배적 감정, 곧 16세기 낙관론의 순수한 표현은 그와 같다. 그것은 흔히 우리가 그 시대의 특징이었으라라 믿는 충일한 삶의 기쁨과는 전혀 다르다. 삶의 기쁨을 언급하는 에라스무스의 어조는 조심스럽고 어색하며 무엇보다 지적인 것에 국한되고 있다. 그러나 15세기에는 이 정도도 이탈리아를 제외한 나머지 곳에서 전혀 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1400년 경만 해도 프랑스와 브르고뉴에서는 작가들이 온통 삶에 비난만을 퍼부어대고 있다...그 당시 특유의 멜랑코리는 수도 생활이나 연구 생활에 묻혀 세상을 등지고 산 은자들보다 연대기 작가들과 궁정시인들에 의해 더욱 깊게 표현된다. 높은 교양도 갖지 못하고 지성의 즐거움도 누릴 수 없는 그들은 세계의 조락을 슬퍼하며 정의와 평화에 대해 절망하는 것이다...이처럼 환멸과 회의로 가득찬 페시미즘은 종교적인 그러나 대단치는 않은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들의 멜랑코리 속에는 세계 종말에의 기다림이 있다. 게다가 그 시대의 비애와 변전, 끊임없는 전란 등은 그 같은 생각을 더욱 강화시켰던 것이다...삶을 우울하고 어둡게 보려는 갈망은 사실은 진정한 종교적 영감과는 거리가 멀다. 단순히 염오만이 아니고, 삶과 불가피한 근심에 대한 두려움인 것이다...인간 세계의 참상이 야기한 깊은 절망이다. 순진하고 자발적인 기쁨이나 맹목적인 향락이 사색과 대체되면서 인간의 영혼을 채운 감정은 바로 이와 같다. 그렇다면 각 시대가 동경한 그 아름다운 세계란 도대체 어디 있다는 것일까?

    모든 시대에는 이상적 삶에 이르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우선 세계에 대한 거부가 있다. 여기서는 완벽성이란 삶과 시간 저 너머에 있는 것으로 이승의 것들에 눈을 돌리는 것은 약속된 참행복을 지연시키는 것이다. 위대한 문명들은 모두 이 길을 따랐다. 기독교 사상은 정신 속에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완성의 기반처럼 이 거부의 이상을 각인해 놓았고, 세계를 의식있게 개선시키고 완성시키는 두번째 길을 따르는 일이 오래도록 불가능했다. 중세는 그 길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세계는 전적으로 선하거나 악하거나 하였으며, 모든 제도는 신에 의해 만들어졌으므로 선했다. 다만 인간들의 죄가 세계를 비참함에 빠뜨린 것이다. 그러니 정치적, 사회적 제도를 개선하고 개혁하려는 노력의 개념이 존재할 수 없었다... 그나마 진정한 목표는 저 세상이었다. 전반적으로 이 세상의 것들을 완성시키려는 확고한 결의가 없었다는 점 만큼 그 당시에 팽배한 페시미즘을 부채질한 것은 없었다. 세상에 사는 동안 개선의 여지와 희망이 전혀 없다면 보다 나은 사회 질서를 열망하는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거부하기에는 세상을 너무 사랑하는 - 사람은 자연히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세계를 의식 있게 개선하려는 열망과 함께, 삶에 대한 두려움이 용기와 희망으로 바뀌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다. 실제로 처음 이 개념을 가져온 것은 18세기였다. 르네상스는 또 다른 만족감 속에 그 나름의 삶에 대한 정력적인 수용을 길어냈었다. 18세기는 인간과 사회의 완성 가능성을 중심 도그마로 끌어올린 세기이다. 다음 세기가 오면 이런 순진한 믿음은 잃게 되지만 그래도 그 믿음이 낳을 용기와 낙관주의는 그대로 보존될 것이다. 

    보다 아름다운 세계로 이르는 제 3의 길이 있다. 이는 셋 중에서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허구적인 것으로, 꿈의 길이다. 현실은 너무 비참하고 세계를 거부하는 일도 너무 어렵다. 그렇다면 환상의 세계에서 살자. 꿈 같은 과거의 행복, 과거의 영웅주의와 그 미덕, 아니면 자연 속에 묻혀 사는 기쁨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이다...보다 아름다운 삶에 이르는 이 세번째 길이 단순히 문학에만 국한된 것일까? 그것은 사회 생활의 형태와 토대에 동시에 관련되며 문명이 원초적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옛 시대의 완벽함에 대한 꿈은 삶과 삶의 형태를 고상하게 만드는가 하면 삶의 형태를 아름다움으로 채우고 또 그것을 하나의 예술품으로 만든다. 삶이 하나의 고상한 유희처럼 조절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삶의 기법은 엘리트가 아니면 충족시킬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요구조건을 갖게 마련이다. 영웅이나 현자를 모방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삶에 서사시적인 혹은 전원시적인 색채를 부여하는 것은 값비싼 도락이다. 또한 이러한 아름다움에의 꿈은 일종의 원죄처럼 그 자체내에 귀족적 배타주의를 내포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야 중세말의 문명을 고찰하기에 적합한 관점에 도달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이상적 형태들, 즉 기사도적 로망티즘에 의해 귀족 계급의 삶을 미화하기이며 곧 원탁의 장식하에 변장한 세계인 것이다.

    아름다운 삶에의 이 같은 열망은 흔히 르네상스만의 특성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사실은 이탈리아의 15세기(꽈트로첸토, 1400년대)보다도 훨씬 더 오래된 것이다. 다른 것도 그렇지만 이 점에 있어서도 중세와 르네상스 사이의 경계선은 너무 뚜렷하게 그어져왔다. 그러나 피렌체인들이 채택한, 삶을 미화하는 방식들은 사실은 옛 중세적 모티프들에 다름아니다. 물론 이탈리아가 아름다움에 새 지평을 열고 또 삶에 새로운 톤을 부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삶을 하나의 예술품적 높이로 끌어올리려는 노력은 대체로 르네상스 고유의 특성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사실은 전적으로 르네상스에 의해 고안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중세 말기에는 원칙상 신과 이 세상 사이에 선택의 문제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현세적 삶을 완전히 거부하든지 아니면 영혼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현세의 쾌락과 아름다움을 무모하게 받아들이든지 둘 중의 하나였다. 아름다움은 죄의 흔적을 갖고 있고 따라서 그것을 온전히 안전하게 누리려면 종교에 헌신하게 만듬으로써 그것을 승인해야 했다...하지만 기사도, 스포츠와 궁정 의상들의 육체 숭배, 신분과 명예에 의한 교만 및 그것에의 갈망, 사랑의 쾌락 등의 것들은 어떻게 승화시켜 고상하게 만들 것인가? 이들을 그 옛날의 환상적 광채로 덧입히기 위해, 지난날의 아름다움에의 꿈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같은 특성이 12세기 프랑스의 기사도 문화를 르네상스에 연결시키는 점인 것이다. 피렌체에서 그렇듯 프랑스와 브르고뉴에서도 중세말의 모든 귀족 생활의 꿈은 광경을 재현하려는 노력이다. 영웅과 현자, 기사와 소녀를 테마로 한 단순하고도 만족스러운 꿈을, 프랑스와 브르고뉴가 다시 옛스런 취향으로 이 곡을 연주한다면 피렌체는 같은 테마를 보다 새롭고 아름답게 연주하는 법을 창안해 낸 것이다. 귀족들과 제후들의 삶은 표현의 최대치로 치장된다. 그러나 이같은 경향이 특별히 중세적인 것만은 아니다. 문명의 원시적 단계에서도 이같은 경향은 발견된다. 우리는 그것을 중국 취향이니 비잔티니즘이니 하고 부른다. 궁정은 이 같은 탐미주의자가 가장 잘 꽃필 수 있는 환경이었다...

    열렬하고 격하며, 냉혹하면서 동정적이며, 세계에 대해 절망하면서도 세계의 다채로운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이 시대의 정신은 엄격한 형식주의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같은 감동들은 관례적 형태라는 엄격한 틀 속에 당겨져야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사회 생활 역시 그 같은 방식으로 배열되었다. 삶의 사건들은 아름다운 광경이 되었고, 고통과 기쁨 역시 비장하고 극적인 방식으로 입혀지고 단장되었다. 감동을 표현하는 수단에는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감정은 단지 그 미적 표현에 의해서만 그 시대가 열망하던 높은 단계의 표현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medieval clothing

     

    일상생활 속에서도 똑같은 탐미주의가 만연했다. 옷감, 색갈, 모피 등에 엄격한 계급이 있어 계층을 구분지었고 동시에 그것은 위엄의 감정을 지켜주며 찬연히 빛나게 하였다. 이 같은 탐미주의의 욕구는 필수적인 의례들로 겉치레가 불가피했던 출생, 결혼, 죽음 등의 기쁨과 고통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모든 윤리적 사건이 기꺼이 아름다운 치장으로 싸여졌다...성자들이 죄를 회개키 위해 실행한 겸양과 고행 속에서도 우리는 그 같은 탐미주의를 찾아볼 수 있다. 사회생활의 모든 관계가 나름의 양식을 가진다. 사적인 내밀한 관계들도 은밀히 유지되기 보다는 전시되며, 일종의 공적 광경이 된다. 15세기의 삶 속에서는 우정 역시 세심하게 구상된 나름의 형식을 갖는다...이처럼 양식화된 아름다운 형식들은 외적인 조화 밑에 사실은 잔인한 현실을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삶의 위대한 기법의 일부를 이루었던 이 같은 형식들은 예술 속에서는 별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겸양과 이타주의라는 매혹적인 허구를 가진 예절의 형식들과, 위엄과 종교적 전통에 따른 엄숙함을 갖는 궁정의 성대한 의례들과 예의 범절들, 결혼식과 분만실의 유쾌한 치장들 등 이 모든 아름다움은 예술과 문학 속에서는 별로 직접적인 흔적을 남기지 않았으며 거의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것들을 결합하는 표현 수단은 예술이 아니라 양식인 것이다. 그러나 15세기에 있어서는, 양식 혹은 복장의 영역이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예술의 영역에 가깝다. 기사들의 갑옷에 보석과 세공한 금속들을 주렁주렁 매다는 방식은 의상에 수공 예술의 직접적인 요소를 가져왔다... 중세 말기는 복장 속에 하나의 양식, 곧 지금은 대관식에서나 그에 대한 개념을 짐작할 수 있는 그런 양식을 계속적으로 표현하였다. 

    공동 생활의 모든 관계들은 가능한 한 표현력이 풍부한 방식으로 다듬어진 나름의 미학을 갖고 있었다. 아름다움과 도덕성이 풍부하면 풍부할수록 그들의 표현은 순수예술에 가까웠다. 공손함과 예의바름도 생활 자체, 복장 및 외관 속에서만 그 표현의 미를 찾았다. 그러나 애도만은 묘비속에 강력하고 지속적인 예술 형식을 남기는데 그것의 종교와의 결합은 교화적 가치를 드높인다.

    그러나 역시 탐미주의의 가장 풍성한 개화는 용기와 명예와 사랑이라는 삶의 세 가지 요소 속에 잔존하고 있다. 

     

     

     

    출처> 중세의 가을 / 호이징가

    이미지 출처>  CUSTOME FASHION HISTORY  https://world4.eu/german-medieval/

    '이.탈.리.아 역사 > 중세역사 medioevo'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사도의 관념  (0) 2020.04.05
    사회의 위계 개념  (0) 2020.03.22
    삶의 쓰라림  (0) 2020.03.15
    중세말기의 사회배경  (0) 2020.02.29
    전제정치의 반대자들  (0) 2020.02.04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