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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제정치의 반대자들
    이.탈.리.아 역사/중세역사 medioevo 2020. 2. 4. 11:22

     

    전제군주에 대한 증오

     이렇게 집중된 영주의 권력에 맞선 저항은 국가 안에서는 전혀 성과가 없었다. 도시 공화국 성립을 위한 요소들은 영원히 사라졌고 모든 것은 권력과 폭력을 지향하였다. 귀족 계급은 봉건 토지를 가진 경우에도 정치적인 권력은 없이 자신과 암살자들을 교황당Guelfi 과 황제당 Ghibellini 으로 나누고 베레모자에 깃털을 꽂든가 아니면 바지를 볼록하게 하거나 혹은 다른 방식으로 옷을 입는 것이 고작이었다.

     

    Niccolò di Bernardo dei Machiavelli 1469 – 1527

     

    마키아벨리의 친필서명

     

     사색가들, 예를 들면 마키아벨리(Macchiavelli 1469~1527)같은 사람들은 밀라노나 나폴리 같은 나라가 공화정을 하기에는 너무 부패했다 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폭력의 그늘에 두 줄로 늘어선 가문 간의 원한에 지나지 않는, 이미 오래 전에 낡아버린 저 두 당파들에 대해 기묘한 판결들이 나왔다. 네테스하임의 아그리파가 그들을 해체시킬 것을 권고하자 어떤 이탈리아 군주는 "그들의 다툼은 해마다 1만 2천 두카토의 벌금을 벌어들인다!" 고 대답했다. 예를 들면 1500년에 로도비코 일 모로가 자기 나라에 잠간 돌아와 있는 동안, 토르토나의 교황당원들은 근처에 있던 프랑스 군대 일부를 자기들의 도시로 불러들여 황제당원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였다. 그러자 프랑스 병사들은 우선 황제당을 약탈하고 파괴한 다음 교황당원까지도 약탈해서 토르토나는 완전히 황폐하게 되고 말았다. 정열과 복수욕이 사라지지 않은 로마냐에서도 저 두 당파의 이름은 정치적인 성격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교황당원들이 때때로 프랑스의 호감을 얻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황제당원들이 때때로 프랑스의 호감을 얻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황제당원들이 에스파냐에 대해 의무가 있다고 여긴 것은 가련한 국민의 정치적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러한 망상을 이용했던 사람들이 그것으로 특별히 성공한 경우는 보지 못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대해서 온갖 간섭을 한 다음에 다시 이탈리아를 포기해야만 했고, 에스파냐가 이탈리아를 파괴하고 난 다음 어떻게 되었는가를 우리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

     

     

    Battle of GUELFI & GHIBELLINI - <Battle of San Romano> Paolo Uccello 

     

     

     그러나 다시 르네상스의 군주제로 돌아가보자. 아마 완벽하게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만이 당시에 모든 권력은 신의 것이고, 이 군주들을 선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후원한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도 선량해질 것이고 원래의 폭력적인 시작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열적이고 창조적인 열광으로 채워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형편없는 의사들이 증세를 없애고서 병을 없앴다고 믿는 것처럼 그들은 영주를 죽이면 저절로 자유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 아니면 그들은 그렇게 멀리까지 생각하지도 못하고 그저 당시 널리 퍼져 있던 미움을 폭발시키고 싶어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가족이 입은 불행에 대해서나 개인적인 모욕에 대해서 복수를 하고자 하였다. 통치가 무조건적이고 모른 법적인 한계를 벗어나면 적들의 수단도 무조건적인 것으로 된다. 보카치오는 이미 공개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폭력 통치자를 왕이라, 군주라 부르면서 그를 내 상관으로 여겨 충성을 바쳐야 할까? 아니다! 그는 모두의 적이기 때문이다. 그에 맞서서 나는 무기, 모반, 첩자, 딴마음, 간계 등 모든 수단을 쓸 수 있다. 그것은 성스럽고, 꼭 필요한 작업이다 폭군의 피보다 더 좋은 제물은 없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개별적인 사태들이 아니다.

     

    Giovanni Boccaccio - Palazzo dell'Arte dei Giudici e Notai - Firenze 

     

     

     마키아벨리는 논의의 가장 유명한 장에서 고대와 현대의 모반들을 고대 그리스 전제정치 시대 이후부터 다루면서 아주 냉철한 태도로 그들 각각의 계획과 결과를 분류하였다. 여기서는 예배 중에 행해진 암살 행위와 고대가 영향을 미친 경우의 두 가지만 진술하기로 하자. 철저한 호위를 받는 폭력 통치자들을 교회의 예식말고 다른 곳에서 따라잡기란 거의 불가능하였다. 영주의 가족 전부가 한꺼번에 모이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파브리아노 사람들은 영주 가문인 키아벨리 일가를 대미사 도중에 살해했다(1435). 그것도 사도신경을 외우는 중이었다. 밀라노에서는 조반 마리아 비스콘티가 성 고타르도 교회 입구에서(1412), 갈레아쪼 마리아 스포르짜가 성 스테파노 교회에서(1476), 로도비코 일 모로는 성 암브로지오 교회에서 과부가 된 형수 보나 공작부인의 추종자들이 기다리고 있던 문과는 다른 문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간신히 그들의 칼을 피할 수 있었다(1484). 그들은 특별히 잔혹한 의도도 없었다. 갈레아쪼의 살인자들은 살인을 행하기 전에 해당 교회의 성자에게로 가서 그곳에서 첫 번째 미사를 드렸다. 그러나 로렌쪼 메티치와 줄리아노 메디치에 대한 파찌Pazzi의 모반은(1487) 향연 도중에 살해하도록 암살자 몬테세코가 고용되었는데, 그가 피렌쩨 성당에서의 살인 행위를 거부한 것이 실패의 부분적인 원인이었다. 그러자 몬테세코 대신에 "성스러운 장소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렇기에 두려움이 없었던" 성직자들이 그 일을 맡기로 동의하였다.

     

     

    The Pazzi conspiracy, assassination attempt against Lorenzo and Giuliano de' Medici, Florence, 1478

     

     

    전제군주 살해의 이상 - 고대의 모범

     도덕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영향은 앞으로도 자주 다룰 것이다. 고대에 대해서는 통치자들 자신이 국가 이념이나 자신들의 행동에서, 고대 로마제국을 명백하게 모범으로 삼음으로써 하나의 예를 보여주었다. 군주제의 적대자들도 이론적인 작업에 착수하자마자 고대의 폭군 암살자들 편이 되었다. 그들이 중요한 문제, 즉 행동을 결심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모범을 통해 결정적인 자극을 받았다고 입증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고대를 인용하는 것은 단순한 표어와 문체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갈레아쪼 스포르짜의 살인자들인 람푸냐니, 올지아티, 비스콘티에 관해서 아주 특이한 해명이 존재한다. 그들 셋은 모두 극히 개인적인 동기를 가졌지만 동일한 이유에서 행동을 결심했던 것 같다. 인문주의자이며 웅변 선생인 콜라 데 몬타니는 아주 젊은 밀라노 귀족 청년들 사이에서 명성과 조국을 위해 위대한 행위를 하겠다는 불분명한 욕망을 일깨웠다. 그러다가 앞의 두 사람에게 밀라노 해방이라는 자신의 사상을 고백하였다. 그는 곧 의심을 받고 추방되면서 젊은이들을 차오르는 광신주의 상태에 남겨두었다. 거사가 있기 약 열흘 전에 그들은 성 암브로지오 수도원에서 당당하게 맹세를 하였다. 올지아티는 고백하고 있다. "그러고 나서 오래된 방에 있는 성 암브로시우스의 초상화 앞에서 나는 눈을 들고 그에게 우리와 그의 국민들을 위해 도움을 주십사고 기도했다" 하늘에 계신 도시의 수호 성인에게 이 행위를 도와 달라고 기도했던 것이다. 나중에 성스테파노 교회에서 실제로 암살 사건이 일어날 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여러 명이나 이 일에 절반쯤 끌어들이고, 람푸냐니의 집에 사령부를 차리고 매일밤 단도로 찌르기 연습을 했다. 거사는 성공했지만 람푸냐니는 곧장 공작의 수행원들 손에 쓰러지고 다른 사람들은 붙잡혔다. 비스콘티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지만 올지아티는 온갖 고문을 당하고도 이 거사가 신의 뜻에 맞는 희생이었다는 의견을 바꾸지 않았다. 그는 형리가 가슴을 내리치는 동안에도 이렇게 말했다. "정신차려 지롤라모! 사람들은 오랫동안 너를 기억할 거야. 죽음은 괴롭지만 명예는 영원하다!" 

    이 사건에서 의도와 뜻이 아무리 이상적인 것일지라도 모반이 행해진 방법으로 보자면 자유와는 관계가 없는, 모든 모반자들 중에서도 가장 사악한 카틸리나의 영향이 나타나 있음이 보인다. 시에나 연대기는 모반자들이 살루스트를 연구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올지아티 자신의 고백으로도 그 사실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앞으로도 우리는 이 끔찍한 카틸리나라는 이름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의도를 제외한다면 비밀 음모를 위해 이보다 더 마음을 끄는 모범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피렌체 사람들이 메디치 가문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을 때, 폭군 살해는 공공연하게 공언되는 이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1494년 메디치 사람들이 도망친 다음에 사람들은 그들의 궁전에서 도나텔로의 청동조각상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를 꺼내어 오늘날 미켈란젤로의 다윗 상이 서 있는 그 자리에 세우고 다음과 같은 비명을 붙여 세워 놓았다. "1495년 시민 봉기의 모범 Exemplum salutis publicae cives posuere 1495".

     

     

    Judith and Holofernes by Donatello (1460)

     

     

     아주 특이하게도 사람들은 여기에 젊은 브루투스의 말을 인용하였다. 단테는 로마제국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그를 카씨우스, 유다스 이스카리오트와 나란히 지옥의 맨 밑바닥에 떨어뜨렸는데도 말이다. 메디치가의 줄리아노, 조반니, 줄리오 등에 대한 모반에 실패했던(1513) 피에트로 파올로 보스콜리는 브루투스에게 극단적으로 매료되었다. 그는 카시우스같은 사람을 찾아내기만 하면 부루투스를 흉내내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마침 아고스티노 카포니가 그의 편이 되었다. 보스콜리가 감옥에서 행한 마지막 대화들은 당시 신앙 상황에 대한 가장 중요한 문서의 하나인데, 그가 저 로마의 망상에서 벗어나 기독교도로 죽기 위해서 얼마만한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보여준다. 친구 한 사람과 고해 신부가 그에게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모든 모반이 나쁘다고 말했다고 확인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실은 모반에 차별을 두었고, 국민의 의지에 반해서 국민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폭군에 대한 모반을 허용했다는 사실을 고해 신부는 뒷날 이 친구에게 슬그머니 고백했다. 로렌찌노 메디치가 알레싼드로 공작을 살해하고(1537) 도망쳤을 때 아마도 진심을 담은, 어쨌든 그의 부탁을 받고 작성된 변명서가 나타났다. 이 변명서에서 그는 폭군 살해 자체는 가장 공적이 큰 일이라고 찬양하였다. 그는 알레싼드로가 진정한 메디치이고, 따라서(비록 멀기는 해도) 자신과 친척이라고 보고 애국을 위해서 형제를 죽인 티몰레온에 자신을 비유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여기서도 그를 브루투스와 비교하였다. 그리고 아주 뒷날 미켈란젤로도 이런 식의 생각을 쫓았다는 사실은 그의 브루투스 흉상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이 작품을 다른 대부분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미완성으로 남겼는데, 물론 이 흉상 밑에 인용된 2행시가 말하는 것처럼 카이사르 살해가 그의 마음에 걸렸기 때문은 아니었다. 

     

    Michelangelo's Brutus

     

     

     근대 군주국가에서 형성된 대중적인 과격주의는 르네상스의 군주국가에서 찾아볼 수 없다. 각 개인은 내심 군주제에 저항하고 있었지만, 고립된 힘으로 그것을 공격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럭저럭 혹은 모범적으로 체제에 적응하였다. 당시 카메리노, 파브리아노, 리미니 등지처럼 주민이 왕가를 없애거나 쫓아버리려고 시도하는 것은 사태가 극단적으로 진행된 경우였다. 보통 사람들은 그래봐야 군주를 바꾸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공화제의 별은 완전히 떨어졌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인물소개:

    마키아벨리  https://ko.wikipedia.org/wiki/니콜로_마키아벨리

    보카치오  https://ko.wikipedia.org/wiki/조반니_보카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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