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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큰 통치자 가문들 - 페라라의 에스테 가문
    이.탈.리.아 역사/중세역사 medioevo 2020. 2. 3. 09:11

     

     페라라, 모데나, 레지오를 지배한 에스테 Este 가문의 통치는 특이하게도 폭정과 인기의 중간에 위치한다.

    궁정 안에서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다. 어떤 영주 부인은 의붓아들과 간통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목이 잘렸다(1425). 정식 결혼이나 서자로 태어난 왕자들은 궁정에서 도망치고 외국가지 뒤쫓아온 암살자들의 위협을 받았다. 외부의 음모도 끊이지 않았다. 어떤 서자의 서자는 유일하게 적법한 상속자(에르콜레 1세)에게서 통치권을 빼앗으려 했다. 후에 에르콜레 1세Ercole I d'Este(1431 ~ 1505)는 아내가 그녀의 오빠인 나폴리왕 페란테의 사주를 받고 자기를 독살하려 했다는 말을 듣고 아내에게 독을 먹였다고 전해진다(1493).

     

     

    ERCOLE II D’ESTE, DUKE OF FERRARA BY NICCOLÒ DELL’ABBATE

     

     

     

     통치중인 공장 알폰소 1세와 추기경 이폴리토에 맞서 두 병의 서자 형제들이 벌인 음모는 비극의 종결부를 이룬다. 그 음모는 제때 들통이 났고 이들 이복형제들은 감옥에서 일생을 보냈다. 

    그 밖에 이 나라 국고 출납관들은 아주 잘 훈련되어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나라는 이탈리아의 모든 중, 대형 국가들 중에 가장 많은 위협을 받았고, 그래서 상당한 정도로 군비와 축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세금 수입이 늘어나는 만큼 국가의 자연적인 복지 상태도 좋아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니콜로 후작은 자신의 신하들이 다른 어떤 국민들보다도 더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말하기도 했다. 급격하게 주민이 늘어나는 것이 그 나라가 정말로 복지 상태에 도달했다는 증거라고 한다면. 특별히 커진 수도에 세줄 집이 없었다는 사실(1497)은 상당히 중요한 징표다. 페라라는 유럽 최초의 현대 도시였다.

     

     

     

     Castello Estense in Ferrara

     

     

     

     

     

     

     

     

     여기서 처음으로 군주들의 지시에 따라 정기적으로 문을 여는 큰 숙박업소들이 생겨났다. 관리들이 모여들고 인위적으로 유치한 산업을 통해서 수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모여든 부유한 도망자들, 특히 피렌쩨 사람들은 여기 머물면서 저택을 건설하라는 유혹을 받았다. 적어도 간접세는 국민들이 겨우 견딜만한 수준까지 올라갔던 것이 분명하다. 군주는 당시 다른 이탈리아 전제군주들, 예를 들면 갈레아쪼 마리아 스포르짜가 했던 정도의 빈민 구호를 했다. 기근이 들면 그는 외국에서 곡식을 들여와서 그것을 공짜로 나누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통 때는 곡식은 아니지만 수많은 다른 식료품, 즉 소금에 절인 고기, 생선, 과일, 채소 등을 전매함으로써 손해를 보충하였다. 특히 채소는 페라라의 방벽을 따라 조심스럽게 경작되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수입은 해마다 되찾게 되어 있는 관직을 팔아서 얻었다. 이것은 당시 이탈리아 전역에 걸쳐 있던 관습인데, 우리는 다만 페라라에 관해서 가장 잘 알고 있을 뿐이다. 1502년 초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관직을 소금가격salati을 내고 샀다. 여기에는 여러 종류의 관직들, 즉 통행세 징수관, 왕실 영지 관리인, 공증인, 도시 행정관, 판사, 도시의 지사, 지방 소도시의 최고 관리까지 다 포함되었다. 관직을 비싸게 사고, 그래서 주민들이 '악마보다 더' 미워했던 탐관오리들 중 한 사람은 티토 스트로짜라는 사람이었다. 그가 저 유명한 라틴어 시인 티토 스트로짜와 이름만 같은 다른 사람이기를 바랄 뿐이다. 이 계절이 되면 공작은 늘 직접 페라라 전역을 순방하곤 하였다. 이른바 행운을 위한 행차로서 이 순방길에서 군주는 부유한 사람들에게서 선물을 받곤 하였다. 그러나 돈은 아니었고 농산물이었다.

     

     

    testone di ercole I d'este, 1471-1505

     

     

     이탈리아 전체에 잘 알려진 일이었지만 공작의 자랑은 페라라에서는 병사들의 급료와 대한 교수들의 월급을 정해진 날짜에 지급한다는 것, 그리고 병사들은 절대 제멋대로 시민이나 농부에게서 그 무엇도 뺏어서는 안된다는 것. 페라라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 성에는 엄청난 양의 금화가 있다는 것 등이었다. 직급의 분화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서 재무장관이 궁내장관을 겸하였다. 보르소, 에르콜레 1세, 알폰소 1세 등이 건축한 건물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만 대개는 규모가 작았다. 이런 사실에서 이 왕가가 사치를 매우 좋아했으면서도 - 보르소는 금붙이와 보석을 휘감고 등장했다 - 생각 없이 돈을 지출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알폰소 Alfonso I d'Este (1476 - 1534)는 자신의 사치스러운 작은 궁전들이 어차피 사건에 휘말려 오래 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나무그늘이 진 정원들이 딸린 벨베데레 궁전, 아름다운 프레스코 벽화와 분수들로 장식된 몬타나 궁전 같은 건축물들 말이다.

     

     

     

      Alfonso I d'Este by Tiziano

     

     

     

     상황이 계속 위협적이라는 사정은 이 영주들을 대단히 유능하게 만들었다. 그토록 인위적인 존재 방식에서는 오로지 거장만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고, 영주들은 각기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통치를 할 만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야만 했다. 그들은 각기 커다란 약점들을 지녔으나, 그러면서도 그들 한 사람 한 사람 속에는 이탈리아 사람의 이상형이라고 할 만한 어떤 요소들이 있었다. 당시 유럽의 어떤 군주가 알폰소 1세처럼 자시의 교육을 위해 그토록 노력을 했던가?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등지로의 여행은 일종의 수학 여행이었고, 그것은 그에게 그 나라들의 상공업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주었다. 그가 여가 시간에 취미 삼아 녹로(도자기 빚는 물레) 세공을 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대포 주조에 대한 그의 탁월한 지식, 온갖 종류의 기술자를 자기 주변으로 모아들이는 선입견 없는 행동 방식들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알폰소 에스테의 의상/장신구

     

     

     이탈리아 군주들은 동시대 북유럽의 군주들처럼 귀족 계층과의 교류에 의존하지 않았다. 이들 귀족 계층은 자기들만이 유일하게 주목할 만한 계층이라고 여기고 군주들을 이런 망상으로 끌어들였다. 이탈리아에서도 영주들은 서로를 알고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귀족 계급은 출생에 따라 결정되었지만 사교 관계에서는 타고난 신분이 아니라 철저히 개인 능력을 지향하였다. 그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페라라 사람들이 이 왕가에 대해 느낀 감정은 조용한 두려움, 잘 짜여진 연출에 대한 진정한 이탈리아식 감각, 그리고 완전히 현대적인 충성심 등이 뒤섞인 것이었다. 개인에 대한 경탄은 새로운 의무감으로 바뀌었다. 페라라시는 1451년에 이미 세상을 떠난 군주 니콜로를 위해 청동기마상을 광장에 세웠다.

     

     

    Statue of Niccolo III d'Este

     

     

     

     보르소는 앉아 있는 모습의 자기 조각상을 옆에 두었다. 여기에 덧붙혀 도시는 그의 통치 초기에 그를 위해 대리석 개선탑을 만들겠다고 포고하였다. 베네찌아에 가서 보르소에 대해 공공연히 나쁜 말을 하고 다닌 어떤 페라라 사람은 돌아오자 마자 바로 밀고를 당했는데, 목에 밧줄을 걸고서 그는 공작에게 사면을 간청했다. 

     이 정부는 스파이로 가득 차 있었다. 공작 자신이 손수 매일 여관 주인이 반드시 올려야만 했던 외국인에 대한 보고서를 점검했다. 보르소 치하에서 이것은 다시 외국인에 대한 친절과 결합되었다. 그는 중요한 여행자들이 특별한 접대를 받지 못하고 이 나라를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반대로 에르콜레 1세의 경우에 그것은 순전히 안전 조치였다. 볼로냐에서도 조반니 2세 벤티볼리오 치하에거 이곳을 지나가는 여행자는 누구나 한쪽 문에서 쪽지를 받아 나갈 때 다른 쪽 문에 제출해야만 했다. 영주가 국민을 억압하는 관리들을 갑자기 해임하면 인기가 최고였다. 보르소가 일급의 추밀 고문관들을 체포했을 때, 그리고 에르콜레 1세가 여러 해 동안이나 사람들의 고혈을 짜낸 세금 징수원을 해임했을 때 국민은 기쁨의 화톳불을 피우고 종을 울렸다. 그러나 에르콜레는 한 관리를 지나치게 총애했다. 경찰국장, 아니면 우리가 그의 직함을 무엇이라 부르든 간에 그는 루카 출신인 그레고리오 짬판테였다(이런 자리에는 내국인을 쓰지 않았다). 공작의 아들들과 형제들 마저도 그를 두려워 했다. 그가 매기는 벌금은 언제나 수배그 수천 두카토에 이르렀고, 심문하기도 전에 벌써 고문이 시작되었다. 가장 중한 범죄자라도 뇌물을 주면 거짓말로 공작의 은사를 받아주었다. 신과 세상의 적인 짬판테를 쫓아낼 수만 있다면 신하들은 공작에게 1만 두카토라도 기꺼이 내어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에르콜레는 그를 자신의 친척이자 기사로 만들었고, 짬판테는 해마다 2천 두카토를 저축했다. 그는 자기 집에서 기른 포도만 먹고, 시뇌, 사격수와 경찰관을 거느리지 않고는 거리로 나서지 않았다. 마침내 그가 제거될 때가 이르렀다. 두 명의 대학생과, 그가 죽도록 모욕했던, 개종하고 세례받은 유대인 한 명이 시에스타 시간에 그의 집에서 그를 죽이고 준비해두었던 말을 타고 도시를 달려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 사람들아 밖으로 나와보라! 우리가 짬판테를 죽였다. " 그들을 잡기 위해 경찰을 보냈지만 이미 늦었다. 그들은 벌써 가장 가까운 국경을 넘어 안전한 곳으로 도망쳤기 때문이다. 그러자 일부는 소네트 형식으로, 일부는 칸쪼네 형식으로 된 비방문들이 비 온 뒤 대나무 싹 돋듯이 쏟아져 나왔다. 

     

     

     

    Decorazioni del Castello d'este

     

     

     

     군주가 유능한 신하들에 대한 자신의 존경심을 궁정과 국민 앞에서 선포하는 것이 이 왕가의 전통이었다. 1469년에 보르소의 추밀 고문관 로도비코 카셀라가 죽었을 때 장례식 말에는 재판도, 도시 상점도, 대학 강의 실도 문을 열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관을 따라 성 도메니코 교회까지 따라가야만 했다. 공작도 함께 갈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는 검은 옷을 입고 울면서 관 뒤를 따라갔다. 궁내관의 안내를 받은 카셀라의 친척이 그 뒤를 따랐다. 귀족들이 시민이었던 카셀라의 관을 메고 교회에서 나와 매장 장소인 회랑으로 갔다. 당시 이탈리아 국가들 중에서 처음으로 군주의 감정에 대해 공식적인 공감 의식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일의 핵심은 아름다운 인간적인 가치를 지닌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발언들은, 특히 시인들의 경우에 보통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에르콜레 1세의 아내인 아라곤 가문 출신 리아노라의 죽음을 맞아 쓰여진 아리오스토의 초기 시 하나는, 어느 시대에나 꼭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 조화 말고도 몇 가지 완전히 현대적인 특성을 포함한다. " 이 죽음은 페라라에 여러 해 동안이나 잊지 못할 타격을 주었다. 자비로운 부인은 지상이 가치가 없는 것이기에 이제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는 분이 되었다. 물론 죽음의 여신은 보통 우리들에게 하듯 피 묻은 낫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고, 성실하고 친절한 얼굴로 그녀를 찾아와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다. " 그러나 우리는 전혀 다른 종류의 공감에도 부딪히게 된다. 자기가 속한 왕가의 은총에 모든 것을 걸고, 이러한 은총을 기대하는 단편소설가들은 군주들의 사랑 이야기를 우리에게 즐려준다. 당시에는 해롭지 않은 정중함이라고 여겨졌지만 뒷날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된 사랑 이야기들 중 일부는 당사자들이 살아 있을 때 씌어졌다. 서정시인들은 고귀한 신분에 이미 합법적인 결혼을 했던 군주의 일시적인 정열을 시로 만들었다. 안젤로 폴리찌아노는 로렌쪼 일 마니피코의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조반니 폰타노는 특별한 악센트로 칼라브리아의 공작 알폰소의 사랑 이야기를 썼다. 이 시는 그 의도와는 반대로 아라곤 가문의 추악한 영혼을 드러내 보였다. 자기는 이 분야에서도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겠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보다 더 행복한 사람에게 불행이 있으리라! 가장 위대한 화가들, 예를 들면 레오나르도 같은 사람도 군주의 애첩들의 초상화를 그렸던 것은 물론이다.

     에스테 가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찬양할 때 까지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찬양하였다. 보르소는 스키파노야 광장에서 통치 행위를 하는 자신을 그리도록 했고, 에르콜레는 자신이 통치를 시작한 날을 명백하게 성체축일과 견줄 수 있는 방식으로 축하했다. 모든 가계는 일요일처럼 문을 닫고 가문의 모든 사람들, 서자들까지도 황금으로 치장하고 행렬을 이루어 행진하였다. 모든 권력과 품위는 군주로부터 나오고, 개인적인 영예가 그의 편이라는 생각은 이 궁정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황금 박차 훈장을 통해 상징되엇다. 이것은 중세기사도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다. 에르콜레 1세는 박차 훈장 말고도 칼, 황금으로 짠 외투, 혼수 자금 등을 내주엇다. 그 대가로 물론 정기적인 서비스를 요구했다.

     이 궁정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예술 후원은, 일부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완벽한 것으로 꼽히던 대학과 관련된 것이고, 일부는 궁정 및 국가 관직과 관련된 것이었다. 특히 그에 따르는 희생이 별로 없었다. 바이아르도는 부유한 시골 귀족이자 고위 관리로서 이곳에만 속했다. 아리오스토가 부상하기 시작했을 때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밀라노 궁정도, 피렌쩨 궁정도 없었고, 곧 이어서 우르비노 궁정도 없어졌다. 나폴리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아리오스토는 이폴리토 추기경의 음악가들 및 곡예사들과 같은 지위로 만족하였다. 그러다가 알폰소는 그를 받아들였다. 토르콰토 타쏘의 경우는 달랐다. 이 궁정은 그를 차지하기 위해 정말 열의를 보였다. 

     

     

     

    University at Ferrara  1391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인물소개:

     

    에르콜레 1세 https://ko.wikipedia.org/wiki/에르콜레_1세_데스테

    알폰소 1세  https://ko.wikipedia.org/wiki/알폰소_1세_데스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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