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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큰 통치자 가문들 - 우르비노의 몬테펠트로
    이.탈.리.아 역사/중세역사 medioevo 2020. 2. 1. 14:03

     

    위대한 페데리고Federico da Montefeltro는 그가 진짜 몬테펠트로이든 아니든 간에 우르비노Urbino를 대표하는 가장 탁월한 군주였다. 용병대장으로서 그는 용병대장다운 정치적 도덕성을 가졌다. 그 점에 대해서 용병대장들은 오직 절반의 책임만 있다. 작은 나라의 영주로서 그는 자기가 밖에서 벌어들인 용병 급료를 나라 안에서 소비하고 가능하면 세금도 적게 거두는 정책을 폈다.

     

     

     

    Federico  da Montefeltro / Battista Sforza by  Piero della Francesca

     

     

     

    그 자신과 그의 두 후계자인 귀도발도와 프란체스코 마리아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진다. " 그들은 건물을 세우고 농사를 장려하고 현장에서 살고 수많은 사람에게 급료를 주었다. 국민은 그들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국가만이 잘 계산되고 조직된 예술품인 것은 아니다. 궁정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의미에서 그렇다. 페데리고는 궁정에 5백 명이나 되는 인원을 고용하였다. 궁정의 관직들은 더 큰 군주들의 궁정조차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지만 낭비되는 것이 전혀 없었다. 모든 것은 목적이 있었고 정확하게 통제되었다. 거기서는 누구도 잘난 척 하거나 남을 모함하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이 궁정은 다른 고귀한 가문의 아들들에게 군사 교육기관 노릇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훈련시키는 것은 공작에게는 명예로운 일이었다. 그가 건설한 궁전은 가장 화려한 것은 아니었으나 완벽한 배치라는 측면에서 고전적인 모범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곳에 그는 자신이 가장 큰 보물인 도서관studiolo을 만들었다.

     

     

     

    Studiolo 
    Detail of trompe l'oeil  technique 

     

    그의 나라에서는 누구든지 군주에게서 이익을 얻거나 아니면 그에게 봉사를 하였고, 구걸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자기 나라에서 완전히 안전하다고 느끼고 있었기에 무장하지 않고, 부하들도 거의 거느리지 않고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아무도 그처럼 할 수 없었다. 그는 사방으로 트인 공원에서 산책하고 공개된 홀에서 검소한 식사를 하였다. 식사하는 동안 리비우스의 작품이 낭송되었다. 오후가 되면 그는 고전 작가의 작품 낭송을 들었다. 그 다음에는 클라리사 수녀원으로 가서 격자를 사이에 두고 수녀원장과 종교적인 문제들에 개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이면 그는 멋진 전망을 볼 수 잇는 성 프란체스코 교회 목초지에서 자기 궁정에 있는 젊은이들의 신체 훈련을 지휘하고 그들이 잡기 장난과 달리기를 하며 자유자재로 몸 놀리는 법을 배우는 것을 정밀하게 관찰했다. 그는 언제나 최고의 사교성과 붙임성을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자기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작업장을 방문하고 끊임없이 사람들을 알현하였으며, 개개의 문제를 가능하면 당일에 끝냈다. 그가 거리를 지나가면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영주님, 신께서 당신을 보호하소서!" 하고 인사하였다. 생각있는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이탈리아의 빛이라고 불렀다. 

     

     

     

    Ducal Palace, Urbino

     

     

    그의 아들 귀도발도는 온갖 병과 불행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래도 그는 마지막에 나라를 안전하게 조카 프란체스코 마리아에게 넘겨줄 수 있었다(1508). 프란체스코 마리아는 교황 율리우스 II세의 친척이기도 했다. 교황은 어쨌든 지속적인 이방인의 지배에서 나라를 보호했다. 이 군주들이, 그러니까 귀도발도는 체사레 보르자 앞에서 프란체스코 마리아는 레오 10세의 군대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도망친 방식은 기억할 만 한 일이다. 그들은 부질없는 방어전으로 인한 소모가 적을수록 자기들의 귀환이 더 쉽고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로도비코 일 모로도 그런 생각을 했지만 그는 자기를 향한 수많은 다른 증오의 원인들을 잊었다. 귀도발도의 궁정은 발다싸레 카스틸리오네Baldassare Castglione,1478~1529 인문주의자)를 통해서 극히 섬세한 사교를 위한 고급 학교라는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카스틸리오네의 목가 '티르시Tirsi'(1506)는 궁정 사람들 앞에서 낭송되어 찬양을 받았고 뒤에 '궁정인Il cortegiano'(1508)는 교양 높은 공작 부인 엘리자베타 곤짜가가 참석한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인물소개: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https://ko.wikipedia.org/wiki/페데리코_다_몬테펠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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