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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말기의 사회배경
    이.탈.리.아 역사/중세역사 medioevo 2020. 2. 29. 11:21

     

    꽈뜨로첸또(1400년대)의 시민적 예술과 궁정적 예술의 감상자층

    르네상스의 예술감상자층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도시의 시민계급과 왕후들이 살던 궁정사회이다. 이 두 그룹이 대표하는 예술적 취향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긴 하지만, 많은 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한편으로는 고딕의 궁정적 요소들이 부르즈와 예술에 아직도 계속 영향을 마치고 있고, 신분이 낮은 계급에게도 그 매력을 전적으로 상실한 적이 없던 기사적 생활양식이 다시 부활하게 되자 시민계급은 궁정 취향을 가진 예술형식을 새로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궁정의 귀족들도 시민계급의 사실주의와 합리주의에 담을 쌓을 수는 없었으므로, 그들 역시 도시생활에 근원을 두고 발전하기 시작하는 새로운 세계관과 예술관을 정립하는 데 하나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1400년대 말기에 가서는 도덕적, 시민적인 예술과 기사적, 낭만적인 예술이 서로 뒤엉켜서 피렌체 예술과 같이 철저히 시민적인 예술까지도 다소는 긍정적 성격을 띠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예술적 현상은 일반적인 사회발전과 상응해서 나타난 것일 뿐이며, 도시적 민주주의에서 군주적 절대주의로 나아가는 정치적 과정을 말해주는 것이다.

    중세 말기 이탈리아의 계급투쟁

    아마 11세기에 이탈리아에서는 지금까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봉건영주들로부터 독립한 베네치아, 아말피, 피사, 제노비 등의 조그만 해안 도시공화국이 생겨났다. 12세기에는 밀라노, 루카, 피렌체, 베로나 같은 많은 자유도시가 탄생했고, 이러한 도시들은 사회적으로 아직도 크게 분화되지는 않았으나 상공업을 영위하는 시민이 동등권을 가지고 이 동등권의 원칙에 입각해서 도시가 운영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소국가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서 이 자유도시국가들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봉건영주들 간에 싸움이 일어나서 우선은 시민계급의 승리로 끝났다. 이에 따라 지주계급은 이제 도시로 이주해서 도시 주민의 경제적, 사회적 조직에 적응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 거의 때를 같이 하여 지금까지의 싸움보다 더 가열한 싸움이 시민계급과 귀족 간에 벌어졌는데 이 싸움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이 싸움은 이중적인 의미의 계급투쟁이었는바, 한편으로는 시민계급 상층부와 하층부 간의 투쟁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산계급과 전체 시민계급 간의 투쟁이었다. 도시 주민들은 그들이 공동의 적, 즉 귀족 계급과 싸울 때는 의견이 일치하였으나 이제 귀족 계급과의 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자 분열하기 시작하여 여러 이해 집단으로 갈라져서 마치 원수처럼 서로 싸우게 되었다. 원시적 단계의 민주정도 12세기 말엽에 이르면 군사독재로 변모한다. 우리는 이러한 발전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아직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다. 이 투쟁이 귀족들 상호간의 마찰이나 불화에 기인하는지 아니면 시민계급 내부의 계급투쟁에서 온 것인지, 또는 이 두 요소가 합쳐져서 초계급적, 범국민적인 권위로서의 포데스타(중세 이탈리아 도시의 행정관)의 임명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아무튼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일정한 기간 계급투쟁이 있고 난 다음 곧이어 이탈리아 곳곳에서 독재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독재자들의 출신성분은 매우 다양했다. 페라라의 에스테 일가와 같은 독재자들은 역대 지방왕족의 성원이었고, 밀라노의 비스콘티는 총독이었으며, 비스콘티의 후계자인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처럼 용병대장이었거나, 포를리의 리아리오 가나 파르마의 파르네제 가처럼 세력있는 문벌 출신도 있었고, 피렌체의 메디치나 볼로냐의 벤티볼리 가나 페루지아의 발리오니 가처럼 덕망있는 시민계급에서 나오기도 하였다. 13세기에 와서는 이탈리아의 많은 곳에서 전제군주의 지배권이 세습적으로 되었다. 일부 지방, 특히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는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옛날의 공화국 헌법이 남아 있었으나 시집정관 체제(시뇨리아, 도시국가의 집단통치체제) 의 정비와 더불어 옛날의 자유는 종말을 고하였다. 자유시민적 공동사회는 이제 낡은 정치형대로 변하고 말았다. 도시 시민계급은 경제활동에 몰두하느라 직접 국방임무나 전쟁수행은 전쟁청부업자나 직업군인인 용병대장과 용병들에게 위임시켰다. 그리하여 군의 직접적 혹은 간접적 통솔권은 어느 도시에서나 도시귀족인 집정관들이 행사하게 되었다. 

    당시까지도 아직 왕조가 성립되지 않았고 애초부터 궁정생활이 발달하지 않았던 많은 이탈리아 도시들의 상황을 알기 위해서는 피렌체의 사태가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그 이유는 반드시 다른 도시보다 피렌체에서 더 일찍이 자본주의적 경제형태가 나타났다든가 아니면 여기서 자본주의의 발전단계가 더 뚜렷이 부각되었다거나, 또는 이러한 발전과 항시 결부되어 있는 계급투쟁의 원인이 어느 도시보다도 더 명확하게 나타났기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비슷한 구조를 가진 다른 어느 도시들보다도 피렌체에서 시민계급이 어떤 방식으로 길드를 매개로 하여 국가권력을 장악하였으며, 어떻게 해서 이 시민계급이 그들이 장악한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더욱 확장하였는가 하는 역사적 과정을 더 명확하게 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2세가 죽은 후 길드는 구엘프파(교황파)의 비호 아래 지지도시의 권력을 장악하여 포데스타로부터 정부 통치권을 빼앗았다. 이로써 생겨난 것이 이른바 제1시민primo popolo계층으로서 이들은 막스 베버의 표현에 따르면 최초의 자각된 비합법적 혁명정치단체였는데 이 집단의 대표자는 선거를 통해 뽑았다. 이 대표자는 형식적으로는 포데스타에 종속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국가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행정관이었다. 그는 민병에 대한 통솔권과 말썽 많은 세금문제에 관한 최후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귀족의 횡포에 대한 탄원이 들어올 경우에도 거의 빠짐없이 시민을 돕고 치안을 확보, 감시하는 일종의 호민관 역할을 하였다. 이로써 지금까지 무기를 갖고 있던 문벌귀족의 지배는 무너지고 귀족들은 공화국 권력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길드의 이러한 정치화는 유럽 근세사에서 시민계급 최초의 결정적 승리를 뜻하는 것이었고, 이 승리는 전제정치에 대한 그리스 민주주의의 승리를 상기시킬 정도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10년 후에 귀족들은 빼앗긴 권력을 되찾는데 성공하긴 하지만 대세는 언제나 시민계급에게 유리했고, 그들은 대세에 순응하는 것만으로도 귀족과의 치열한 투쟁에서 번번이 어려운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1260년대 말에 이르면 새로운 금융귀족과 세습귀족 간에 최초의 동맹이 이루어지는데, 이로써 앞으로 피렌체 역사의 주된 역할을 담당할 상층 부호집단에 대한 지배가 준비되었던 것이다. 

     

    The Palazzo del Podesta - October 1250: the government of the 'Primo Popolo' begins in Florence

     

    길드를 둘러싼 투쟁

    1280년경에는 상층부 시민계급이 이미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고, 이러한 권력을 주로 길드의 프리오르prior(행정장관)들의 기구를 통하여 행사하였다. 이 기구는 국가의 모든 정치적 기구와 행정기구를 망라한 하나의 통치기구였다. 이 기구가 형식상으로 길드를 대표하는 기관인만큼, 우리는 피렌체를 길드 도시라고 규정해도 좋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경제협동체로서의 길드가 그 사이 정치적 길드로 변모한 셈이다. 실제적인 의미에서의 공민권은 이제부터는 공적으로 인정된 조합에서의 소속 여부에 따라 결정되었다. 따라서 아무런 직업조합에도 속해있지 않은 시민은 결코 완전한 의미에서의 공민이 될 수 없었다. 부호들까지도 시민적 직업을 갖지 않거나, 형식상으로나마 길드에 가입하지 않으면 처음부터 길드 쁘리오르의 기구에 참여하는 길이 막혔다. 그러나 완전한 시민이라고 해서 모두가 정치적으로 동등한 권한을 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길드의 지배권은 일곱 개의 중요한 길드를 통해 연합세력을 이룬 자본가적 부호들의 독재에 맡겨져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길드 사이에서 순위와 등급이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왜냐하면 피렌체 경제사의 문헌적 자료가 시작되는 시기는 이미 길드의 분화가 이루어지고 난 후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피렌체의 경제적 대립관계는 대부분의 독일 도시에서처럼 길드와 조직화되지 못한 도시 부호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직종이 상이한 길드 상호간에서 일어났다. 북유럽 나라들에 비하면 피렌체의 부호들은 도시의 중산계층처럼 엄격하게 조직되어 있었다는 이점을 처음부터 갖고 있었다. 그들은 대규모의 상공업과 은행업을 통합하여 길드를 조직했고, 이러한 길드를 일종의 기업가 연합으로 발전시켰으며, 나아가서는 트러스트를 만들어 시장을 통제하였다. 이러한 길드조직이 사회에서 그 우위를 차지하자 상층 시민계급은 길드조직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기구를 이용하여 하층계급을 억눌렀고, 무엇보다도 노동자의 임금을 내리는 데 성공했다. 

    14세기는 길드를 장악한 중산층과 길드 밖으로 밀려난 노동자들 사이에 일어난 수많은 계급투쟁으로 점철된 시기이다. 임금노동자층은 그중에서도 단결금지 규정 때문에 가장 심한 타격을 받았는데, 이 시기의 노동자들에게는 그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일체의 집단적 행동이 저지되었고 파업이나 그 비슷한 어떠한 행동도 혁명적 행위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이제 노동자는 계급국가에서 완전히 권리를 빼앗긴 피지배자가 되었고, 이 계급국가 속에서 자본은 도덕적 양심에 조금도 구애받지 않고 유럽 역사에서 그 앞뒤를 통틀어 보아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무자비하게 지배력을 행사하였다. 이런 상황은 그 당시 진행되고 있던 투쟁이 하나의 계급투쟁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고, 노동자들을 하나의 사회계급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무산 임금노동자를 단순히 '빈민들', 즉 언제나 있게 마련인 가난한 사람들로 정의했기 때문에 더욱 절망적인 것이었다. 부분적으로 이러한 노동자의 억압에 힘입어 나타난 것이 1328~38년에 그 절정을 이룬 경제 번영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바르디 가와 뻬루치 가의 도산이 왔고, 곧 이어 심한 재정위기와 일반적인 불황이 도래했다. 과두정치는 거의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권위를 상실하였고, 따라서 처음에는 '아테네 공'의 독재에 굴복했다가 나중에는 평민들에 의한, 본질적으로는 소시민계층에 의한 지배 - 그러한 정권은 피렌체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시인과 문필가들은 왕년의 아테네에서처럼 또다시 구귀족계급 편에 붙어서 - 그 대표적인 예가 보카치오와 필리포 빌라니인데 - 가장 경멸적인 어조로 장사치와 장이들의 정권을 비난하였다. 이러한 소시민계층의 정권이 성립되고 난 후부터 치옴피 반란이 진압될 때까지의 40년간은 피렌체 역사에서 실질적인 민주정치가 이루어진 유일한 시대이지만, 이 시대는 긴 금권정치 기간 사이에 잠깐 등장하는 하나의 짧은 간주곡 같은 것이었다. 물론 이 시기에도 단지 중산층의 의지만 실현되었을 뿐, 대중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던 노동자계급은 사실상 아직도 파업이나 반란에 호소하는 길밖에 없었다. 1378년 치옴피의 반란은 이러한 혁명적 운동 중에서 우리가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이며,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이 반란에 의해 처음으로 경제적 민주주의의 기본적 조건들이 실현되었다. 민중은 길드 프리오르들을 내쫓고 노동자계급과 소시민계층을 대표하는 세 개의 새로운 길드를 만들어 하나의 민중정권을 세웠는데, 이 정권은 무엇보다 먼저 세금을 다시 할당, 조정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이 반란은 본래 제4계급의 봉기였고 일종의 프로레타리아트 독재를 지향한 반란이었지만 겨우 2개월을 넘기고는 상층 시민계급과 결탁한 온건주의자들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나 하층계급은 이 반란 덕분에 그후 3년동안 계속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 시대 역사가 우리에게 증명해주는 것은 프로레타리아트의 이익이 부르주와지의 이익과 병행할 수 없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이미 노후한 길드조직의 테두리 안에서 생산양식의 혁명적 변화를 수행하려는 것이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중대한 과오였는가 하는 점이다. 도시의 대상공업자들은 길드조직이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제도임을 훨씬 빨리 알아차렸고, 따라서 이들은 길드조직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지금까지의 길드의 정치적 역할을 점점 줄어드는 대신 문화적 역할은 갈수록 더 많이 맡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결국 길드는 자유경쟁의 희생물이 되어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다. 

     

    guilds- a medieval association of craftsmen or merchants

     

     

    참조 : 

    중세길드조직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pacwolf&logNo=22435332&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hk%2F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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