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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쓰라림
    이.탈.리.아 역사/중세역사 medioevo 2020. 3. 15. 23:28

     

    세계가 지금보다 5세기 가량 더 젊었을 때(중세의 가을 -1919년 작), 삶에 일어난 많은 일들은 지금과 현저히 다른 모습과 윤곽을 띠고 있었다. 불행에서 행복까지의 거리도 훨씬 멀었고, 모든 경험은 기쁨과 고통이 어린 아이의 정신 속에서 갖는 것 같은 그런 즉각적이고 절대적인 강도를 띠었다. 매 행동과 매 사건들은 언제나 일정한 의미를 갖는 형식에 둘러싸여졌고, 또 그 형식들은 거의 의식의 높이에까지 올려졌다. 탄생과 결혼과 죽음 등의 주요 사건들은 성례를 통해 신비의 후광을 띠었고, 대단치 않은 사건들 조차도 의례니 서식 따위를 동반하였다. 

    재난과 빈곤 같은 것도 그것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 그것은 훨씬 더 무섭고 잔혹했던 것이다. 질병과 건강은 훨씬 더 뚜렷한 대조를 보였고, 겨우내 추위와 어둠도 훨씬 더 쓰라리게 느끼는 고통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부와 영예에 더 탐닉하였다면, 그것은 주위의 비참함과 더 큰 대조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삶의 모든 것이, 비참한 것이건 자랑스러운 것이건, 남김없이 공개되었다. 거지들은 뒤틀린 사지를 내보이며 구걸하고, 영주들은 제복 차림의 하인들을 줄줄이 대동하고 다니며 부러움을 자극하였다. 형 집행과 경매, 결혼과 장례 등은 공공연히 예고되었다. 

    도시와 시골 사이에도 현격한 대조가 있었다. 중세 도시는 구질구질하게 뻗은 교외 변두리를 볼 수 없었다. 도시는 사면이 벽으로 둘러 싸인 채, 탑들이 우뚝 선 밀집대형으로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빛과 어둠, 침묵과 소요의 대조 역시 오늘날보다는 훨씬 컸다. 현대 도시는 중세의 절대적 암영이나 절대적 침묵을 알지 못하며, 그 같은 고립무원한 빛이나 외침의 효과도 알지 못한다...중세의 삶은 두 극단을 왔다갔다 한다. 

    하지만 생활의 모든 소요를 지배하고 모든 것을 고요와 질서로 감싸는 소리가 하나 있었으니, 교회 종소리였다. 교회 종소리는 누구나 알 수 있는 톤으로 기쁨과 슬픔, 평온과 위험을 알려주는 영감이었다...성체 거동 역시 깊고도 감동적인 영향을 미쳤으리라. 분쟁이 있는 날이면 매일 수주일 계속해서 성체 거동이 집전되었다...매일 새로운 교단과 새로운 수도회로 구성된 그룹에 의해 새로운 길로 새로운 성유골을 멘 의식이 거행되었다. "이제껏 보아온 중에 가장 경건한 행렬"이었던 것이다. 영주로부터 가련한 부르주아까지 모두 맨발이었으며 모두가 금식했다. 사람들은 행렬의 뒤를 따르거나 눈물에 젖은 채 신앙심에 가득 차 행렬을 지켜보았다. 

     

     

    교수대의 광경이 주는 잔인한 흥분과 거친 연민은 민중의 정신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도덕적 선도라는 명목의 잔인한 광경이었으며, 무서운 범죄를 막기 위해 더 무서운 형벌을 고안해내는 식이었다. 

    순회 전도사들의 설교도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은 종교 행렬이나 형집행처럼 자주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간간히 그 웅변으로 민중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우리는 신문 등의 텍스트를 읽기 때문에 만족을 모르는 무지한 영혼들에게 말이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주었을지 상상할 수 없다.

    이 시대의 삶이 갖는 격렬한 취향과 강렬한 색채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이 시대의 감수성과 쉽게 감동되는 경향, 눈물 잘 쏟는 민감한 성향과 정신적 기복을 상기해야 한다. 

    중세 연구 사가들은 흔히 연대기들에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이유로 가능한 한 공식 자료에만 의거하려 함으로써 심각한 오류를 범하곤 한다. 공식 자료들은 15세기와 우리 시대를 가르는 색채의 차이를 밝혀주지 못한다. 중세의 삶이 갖는 격한 파토스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15세기의 삶은 여전히 많은 관계 밑에 아직도 요정 이야기의 색채를 띠고 있었다...이 같은 조건하에서 민중들의 순진한 상상력에 왕권이 갖는 마술적 광휘가 어떠했겠는가...그 당시의 왕은 생활은 천일야화에 나오는 칼리프를 연상케 하는 환상적인 요소가 있었다. 냉정해야 할 정치적 기도에서조차 왕은 무모하고 성급한 행동을 하기 일쑤였고, 자기의 개인적 변덕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기 생애와 사업을 위험에 빠뜨리곤 하였다. 

    14세기 말과 15세기 초 유럽 왕국들의 정치 무대는 격렬하고도 비극적인 알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따라서 백성들은 마치 왕위를 피비린내 나는 혹은 로마네스크한 사건의 연속처럼 생각했다. 

    복수에 복수, 전쟁에 전쟁을 연발시키면서 한 세기 내내 음산한 증오의 색깔을 드리웠다. 백성들은 이 비운을 드라마틱한 커다란 동기로만 해석한다. 그들은 역사적 사건에 개인적 경쟁과 격정 이외의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상상하지 못한다. 

    이 재난들 이외에도 터키의 위협이 여전히 증대되고 있었다. 

    교회 역시 4반세기 전부터 계속된 분열로 사분오열 찢겨 있었다. 두 명의 교황이 서로 대립된 두 부류의 서구 국가들에 의해 각기 지지를 받았다. 

    모험과 열정의 분위기가 제후들의 삶을 감싸고 있었고, 그것은 단순히 민중들의 상상력의 소산만은 아니엇다. 우리는 그것이 중세 특유의 과장벽이나 감동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 만약 공식 자료에만 의거한다면 그것이 제아무리 믿을만 하더라도 중세 말기에 대해 중대한 요소 즉 제후들과 백성들을 고무하던 격한 열정이라는 요소를 빠뜨리는 결과가 될 것이다. 정치계에서는 오늘날도 여전히 열정적 요소가 지배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회 생활의 복잡한 매카니즘이 그것을 억누르고 있다. 중세에는 그렇지 않았다. 열정적 요소가 정치에 자유로이 스며들었고 간혹 가장 유효하고 합리적인 구상마저도 뒤엎곤 했다. 제후들에게서 보듯 감동성은 권력 감정과 합해져 두 배의 격렬함으로 작용하였다.

     

     

    백성들이 영주에 갖는 애착심은 아직도 어린 아이같은 충동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충성심과 연대 의식에의 자발적인 욕구로서 과거 봉건적 개념의 확대였다. 정치적 감정이라기 보다는 당파심이었던 것이다. 중세의 마지막 300년간은 파벌간의 대격전기였다. 이탈리아에서는 13세기에 이미 파벌이 강화되며,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14세기에 이르러 세력을 다진다. 현대 사가(1800년대)들은 이러한 파벌 형성을 단순히 정치 경제적 요인으로만 설명함으로써 그다지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중세 시대의 사적 원한은 다른 사람의 소유를 탐내는 일과 서열 다툼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가문의 긍지, 복수에의 열망, 모든 시련을 견디는 지지자들의 충성심 등이 싸움의 직접적인 요인이었다. 

    사람들이 자기 파벌과 영주에게 바친 그 맹목적 정열은 부분적으로는 중세 특유의 그 확고한 정의가 즉 모든 현상은 인과응보를 요한다는 확신의 표현이었다. 사실 이 같은 정의감은 그 4분의 3은 여전히 이교적인 것이었다. 곧 복수에의 요구였던 것이다. 평화와 용서의 감정에 호소하면서 교회가 형 집행 관습을 완화시키려 애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교회는 복수에의 요구에 죄에 대한 증오심을 가중시키면서 정의에의 요구를 과장하였다. 격하고 충동적인 정신들에게 죄는 자주 적의 행위를 지칭하는 또 다른 방식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정의감은 복수라는 야만적 개념과 죄에 대한 종교적 두려움을 양 축으로 그 사이에서 긴장의 극대치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국가는 점점 더 엄격한 형벌을 내려야 할 의무감에 시달렸다. 만성적 불안정 상태로 당국은 공포 정치적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성들 스스로 영주가 가하는 가장 혹독한 형벌을 인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형 집행의 잔혹성에 있어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범죄 자체의 사악함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민중들이 거기서 맛보는 동물적이고 짐승같은 쾌락이며 축제와도 흡사한 기쁨이었다. 

    현대의 우리는 망설임으로 완화된 절제된 형벌만을 아는 데 비해, 중세 시대는 완전 징벌 아니면 완전 은총의 양 극단만을 알고 있었다. 사면을 할 때도 그 죄인이 어떤 특별한 이유로 은총을 받을 만한 일인가 아니가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다. 모든 죄가 심지어 현행범일지라도 은총을 받을 수가 있었다. 

    잔혹함과 동정심의 대조는 중세 관습 어디서나 지배적이다.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과 광인들은 가장 깊은 연민과 우애의 대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들은 믿기지 않을 만큼 잔인한 학대와 조롱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대의 냉혹한 마음 속엔 아주 솔직한 면이 있어 그걸 정죄하기 힘들다. 흑사병이 파리를 휩쓰는 속에서도 브르고뉴와 오를레앙의 공작들은 유희를 위해 사랑의 궁전을 세우도록 요구한다. 

    피비린내와 장미향이 뒤섞인 속에서 삶은 그토록 격렬하고 대조적인 양상을 보여 주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마치 어린 아이의 머리를 한 거인들처럼 지옥의 공포와 순진한 쾌락, 잔인무도함과 부드러움 사이를 왕래한다. 지상의 쾌락에 대한 절대적 경멸 아니면 미칠 듯한 탐닉, 그리고 증오 아니면 선량함 등 둘 중 하나이다. 언제나 극에서 극으로 치닫는 것이다. 

    중세 이후로는 교만, 분노, 탐심 같은 주요 죄악들이 전세기들의 삶에서 보던 것 같은 그런 뻔뻔스러운 오만함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권력은 아직 돈과 그렇게 압도적으로 결합하지는 않고 있었다. 권력은 보다 개인적인 것이며, 그것을 두루 과시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충성스런 수행원들과 값비싼 장식품들, 영주의 인상적 입성식 들로 선포되어야 한다. 외적인 형식에 의해서만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이 유지된다. 

    교만은 상징적인 죄인 동시에 신학상의 죄이다. 만악의 근원은 교만이며, 루시퍼의 교만이 멸망의 근원이고 원인이었다. 

    탐심은 교만이 갖는 것 이상의 그런 상징적이고 신학적인 성격은 갖지 않는다. 그것은 순전히 현세적인 죄이며 본성과 육신의 충동이다. 탐심은 곧 권력의 조건이 화폐 유통에 따라 변형되던 시대의 주된 죄악인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의 문제는 산술적 숫자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광포한 탐욕을 채우고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무한정 거대한 영역이 열린다. 게다가 이 부는 아직은 차후 신용에 기초한 자본주의가 주게 될 손에 잡히지 않는 그런 유령같은 성격을 갖고 있지 않다. 부, 그것은 노랗고 손에 만져지는 황금 그 자체이다. 부를 누리는 일은 직접적이고도 원초적이다. 그것은 아직 자동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축적의 메카니즘에 의해 경감되지도 않는다. 사치와 낭비 속에서건 거친 탐욕 속에서건 사람들은 부자라는 만족감을 찾아낸다. 

    백성들은 자신의 운명과 자기 고장의 운명을 학정과 착취, 전쟁과 약탈, 기근과 페스트의 연속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계속되는 전쟁, 위험한 하층민들이 도시며 농촌에 야기시킨 끊임없는 혼란, 냉혹하고 불신반든 재판의 위험, 게다가 지옥, 악마, 마녀 등에 대한 공포와 불안, 이 모든 것이 삶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며 보편적인 불안을 야기시킨다. 비단 가난한 자들의 삶만이 불안과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귀족과 관리들의 삶 역시 위험과 운명의 격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재판 기록과 종교 문서 그리고 그 외 다른 자료들에서 들춰지고 우연히 포착되는 삶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참으로 악한 세계이다. 증오와 폭력이 횡행하고 불의가 만연하며 악마는 그 어두운 날개 밑에 땅을 암흑으로 뒤덮고 있다. 그리고는 전반적 쇠퇴가 찾아온다. 그러나 인간성엔 변함이 없다. 교회는 싸우고 설교가와 시인들은 슬퍼하고 권고한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다. 

     

     

    출처> 중세의 가을 / 요한 호이징가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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