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사회의 위계 개념
    이.탈.리.아 역사/중세역사 medioevo 2020. 3. 22. 15:37

     

    18세기 말 낭만주의가 막 새겨나던 초기에 중세 역사는 처음으로 관심과 찬탄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맨 처음 발견한 것은 기사도였고, 낭만주의는 그것을 중세 자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기사도는 그 시대 문화의 여러 국면 중 하나일 뿐이며 또 사실은 사회적, 정치적 발전의 대부분이 기사도 밖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순수한 봉건 제도와 기사도 만개 시대는 13세기에 이르러 이미 쇠퇴한다. 그 다음은 자치 도시와 영주들의 시기고 제후들의 재력을 지탱해주던 부르주아의 상업 세력이 국가와 사회의 지배 요인으로 등장한다. 

     

     

     

    15세기의 정신 속에서 귀족 계급은 사회의 한 요소로서 이론의 여지없이 아직도 그 최우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귀족 계급의 중요성이 과장되는 반면에 부르주아지의 중요성은 과소평가된다. 그들은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진정한 힘이 호전적인 귀족 계급의 생활과 행동 이외에 다른 데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사람들의 오류는 15세기와 15세기의 견해를 아무 비판 없이 그대로 따른 낭만주의에서 유래하며, 반면에 현대의 연구들은 중세의 삶의 진정한 관계들을 제대로 규명하였다고 주장할 것이다. 사실 정치 경제적 삶에 관한 한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한 시대의 문명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그 속에서 살았던 그 착각까지도 진실의 가치를 지님을 알아야 한다. 기사도라는 것이 단지 삶에 덧칠한 에나멜에 불과했을지라도 삶이 에나멜칠의 광택으로 덧입혀져 있는 채로 보는 것은 역사에 있어 필수적인 일인 것이다. 

     

    The Battle of Pavia (1500-58) (tapestry)

     

    사실 기사도는 그보다 훨씬 더 이상의 것이었다. 사회가 신분들ordres로 나뉘어져 있다는 개념은 모든 신학적, 정치적 사고에 그 골수까지 침투되어 있었다. 이는 세 계급 곧 승려, 귀족, 제3계급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신분'개념은 휠씬 더 큰 의미와 넓은 사정거리를 갖는다. 일반적으로 각 그룹, 기능, 직업은 하나의 신분이 된다. 그 결과 사회는 세 계급으로 나뉘는 데 비해 한 계급은 각각 12신분쯤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직업estat'은 곧 '신분 ordo'이며 신에 의해 고안된 현실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중세적 사고 속에서는, 직업이나 신분의 개념이 이처럼 각 그룹들은 하나의 신성한 제도를 나타내며, 그것은 또 천지창조의 구성 속에서 천사들이 서품의 천상 보좌와 그 힘에 맞먹는 똑같이 실제적이고 존경할 만한 한 요소라고 믿는 일치된 확신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국가와 사회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던 웅장한 이미지 속에서 하나의 신분은 각각의 서열들로 분할되었다. 그러나 이런 분할은 실제 체험된 효용성에 따른 것이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 광채와 성스러움의 정도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승려층의 타락과 기사도적 미덕의 쇠퇴를 한탄하면서도 그 이상적인 이미지만은 포기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즉 인간의 죄악상이 이 이상의 실현을 방해할 수는 있으나 이 이상은 여전히 사회적 사고의 근간이자 방침으로 남는다. 그리하여 중세가 사회에 대해 품은 이미지는 역동적이기 보다는 정적인 것이다. 

    부르주아의 중요성에 대한 그릇된 인식은 사람들이 제3계급을 상상하던 유형이 여전히 교정되지 않고 또 초점이 어긋나 있는데서 유래한다...교양있는 신사의 자리를 대신한 강력한 특권 계급의 모습도 이 유형들 가운데서 투쟁적인 길드 대표와 그의 자유의 이상을 나타낸 형상이 차지한 것보다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지는 않았다. 제3계급의 개념 속에서 부르주아들과 노동자들은 전혀 분리되지 않았으며 이같은 현상은 대혁명 때까지 지속되었다. 가난한 농민의 이미지가 호사스럽고 한가로운 부르주아의 모습과 번갈아 나타난다. 이 제 3계급은 아직 그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진정한 기능에 부합되는 마땅한 정의를 전혀 부여받지 않고 있다. 

    제3계급에 대한 멸시 곁에, 기사도적 이상과 귀족 계급에 귀속되는 미덕과 임무의 실천 속에는, 대조적으로 평민에 대한 동정의 요소가 있다. 한편에는 도시 사람에 대한 증오어린 경멸의 조롱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에 시달리며 관리들에게 착취당하고 궁핍과 비참 속에 살아가는 가련한 백성에 대한 연민이 있다. 

    우직한 사람들은 배고픔으로 죽어가는데
    커다란 이리들은 날마다 그들고 배를 채우네
    놈들은 수천수백의 유사 보석들을 긁어 보으니 그것은 곡식의 알, 곧 밀이요
    땅을 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뼈와 피라네, 그들의 영혼은 소리 높여
    하나님께 복수를, 영주께는 보호를 간구한다

    각자가 농민의 희생으로 살고 있었고, 농민들은 참을성 있게 견디어 냈다...백년 전쟁의 결과로 프랑스 전국에 황폐와 불안정이 시시각각으로 확산되어 갈 때 농촌사람을 위한 불평과 하소연은 지칠 줄 모르고 이어지며 점차 특수한 형태를 띠어간다. 농민은 양진영의 군사들에게 약탈당하고 방화당하고 학대당하며 군사들이 타는 말에 뜯어 먹힌 채 헐벗은 농민들은 심지어 집에서 쫓겨나기까지 한다. 

    1484년 투르 정부의 현황에 대해 왕에게 제출된 한 보고서에서는 이같은 하소연이 일정의 정치적 상소의 형식을 띤다. 그러나 백성에 대한 연민은 여전히 천편일률적이며 여전히 부정적인 채이다. 즉 그것은 아무런 프로그램도 갖지 못하고 사회개혁에의 욕망도 전혀 없다. 

    시대에 뒤진 낡은 기사도적 이상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덩달아 이같은 연민의 표현에 어깨를 나란히한다. 게다가 약자를 보호한다는 기사도적 이상이 그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궁정적 이상 특유의 천편일률적이고 이론뿐인 생각이 미덕을 갖춘 귀족이야말로 진정한 귀족이며 인간은 그 근본에 있어서는 모두 평등하다는 생각이다. 사람들은 가끔 이 두가지 개념들의 역사적 의미를 과장하였다. 

    평등이란 개념도 사실 교회 교부들에 의해 키케로와 세네카에게서 빌어온 것이었다...중세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 생각은 불가능한 미래의 어떤 평등을 겨냥한 것이 아니고 죽음으로 누리게 될 아주 가까운 평등을 의미했다. 

    기사도와 학문에 부여된 대등한 품격, 곧 기사도의 직함에 부여되는 권리와 똑같은 권리들을 박사의 직함에도 부여하려는 경향은, 궁정인의 이상에 부여된 매우 큰 윤리적 가치를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용맹스러운 용기를 찬양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박식한 지식을 찬양한다. 즉 사람들은 두 가지 방식의 경배를 보다 높은 삶에 바친다. 그러나 둘 중에서 보다 큰 효력을 갖는 것은 기사도적 이상이다. 왜냐하면 기사도적 이상은 윤리적 가치 이외에도 정신에 가장 큰 시사를 던질 수 있는 미적 요소의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중세의 가을 / 호이징가

    이미지 출처> 야후 이탈리아

     

    '이.탈.리.아 역사 > 중세역사 medioevo'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목가적인 삶의 꿈  (0) 2020.04.21
    기사도의 관념  (0) 2020.04.05
    보다 아름다운 삶에의 열망  (0) 2020.03.19
    삶의 쓰라림  (0) 2020.03.15
    중세말기의 사회배경  (0) 2020.02.29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