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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박해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11. 7. 09:15
인노켄티우스 8세의 악명 높은 교서(1484)와 더불어 마녀와 마녀 박해는 거대하고 끔찍한 체계가 되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나는 이 문제에 관해 오랫동안 관찰해오면서 원래의 객관적 사실이라든가 이교 신앙의 잔재라는 식의 생각을 완전히 버리게 되었다. 탁발 수도승들의 상상력이 마녀사냥이라는 망상의 유일한 원천을 확인해보고 싶은 사람은 자크 뒤 클레르크의 회고록에서 1459년 아라스에서 있었던 이른바 보두아파의 재판을 연구해보라. 백 년간이나 계속 심문을 해서야 비로소 사람들의 상상력을 움직여서 마녀라는 이 끔찍한 존재를 자명한 것으로, 아예 새로 만들어 낼 수가 있었다.
마녀 심문의 주요 대표자들은 도이칠란트의 도미니크 회원이었다. 도이칠란트는 이 재앙으로 가장 많은 고통을 겪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도이칠란트와 가장 가까운 지역이 피해가 가장 컸다. 교황들(알렉산더 6세, 레오 10세, 하드리아누스 6세)의 명령과 교서들은 도미니크회 지역인 롬바르디아, 주교구 브레쉬아와 베르가모, 크레모나 등과 관련되어 있다. 슈프렝거의 유명한 이론적, 실용적 지침서인 <마법을 벌하는 망치>에서 교서가 발령된 다음 코모에서 첫해에만 벌써 41명의 마녀들이 화형을 당했다는 것을 읽게 된다. 이탈리아 여인들은 떼를 이루어서 안전하다고 여긴 지기스문트 대공의 영토로 도망쳤다. 마침내 불행한 알프스 골짜기들, 특히 발 카모니카에서 마녀에 대한 이런 생각은 뿌리 뽑을 수 없도록 완전히 자리를 잡고 말았다. 어딘지 특별한 성향을 가진 주민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마녀에 대한 망상을 불 붙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밀라노, 볼로냐 등지에서 나온 이야기들과 단편소설을 읽으면 생각나는 것은 바로 이 도이치식 마녀관이다. 이탈리아에서 그런 생각이 더 이상 널리 퍼지지 않은 것은 아마도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이미 본질적으로 다른 전제에 기초한 마녀관을 가지고 있었던 덕분일 것이다. 이탈리아 마녀는 직업 활동을 하고 돈과 분별을 필요로 했다. 북유럽 마녀들의 히스테릭한 꿈들, 공중 여행, 인쿠부스와 스쿠부스 따위는 여기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마녀는 다른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해 일했다. 그녀가 여러 가지 모양을 하고 나타날 수도 있고, 멀리 떨어진 장소에도 갑자기 나타날 수 있다고 사람들이 믿으면 그런 말이 자신의 위신을 높여주는 한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에 반해서 마녀의 악의, 복수에 대한 두려움, 특히 아이나 가축, 곡식에 마법을 건다는 믿음이 커지면 그것은 특별히 위험한 일이었다. 종교재판관들과 지역 관청 사이에서 마녀를 화형 시키는 일은 인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지만 마녀들의 가장 중요한 영역으로 꼽히는 것은 사랑 문제였다. 그중에는 사랑과 미움을 불러일으키는 일, 복수하기 좋아하는 허리띠, 사랑의 씨앗을 낙태시키는 것, 상황에 따라 마법 의식과 손수 독약을 제조해서 배신한 애인을 죽이는 일등이 포함되었다. 사람들이 그런 여자들을 신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이것저것 남몰래 배워서 자기 손으로 손수 일을 처리하는 딜레탕티즘이 생겨났다. 예를 들어 로마의 기생들은 호라티우스의 인물인 카니디아 방식으로 자신의 매력에다가 마법을 통해 다른 매력을 덧붙이려고 애썼다. 아레티노는 그녀들에 대해 잘 알았을 뿐 아니라 이런 맥락에서 진실을 전해줄 수가 있었다. 그는 그녀들의 옷장에 모아놓은 온갖 지저분한 물건들의 목록을 전해준다.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 두개골, 갈비뼈, 치아, 눈, 인간의 피부, 탯줄, 무덤에서 주워온 구두끈과 옷조각, 그리고 그들은 심지어 교회 묘지에서 썩은 살점을 주워다가 애인에게 몰래 먹였다. 애인의 머리카락, 허리띠, 손톱 조각 등을 교회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램프에서 훔쳐온 기름에 넣고 끓였다. 이런 여자가 뜨거운 재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서 그것을 바늘로 찌르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른다면 그것은 주문들 중에서 가장 해롭지 않은 것에 해당했다.
불이 꺼지기 전에
그이가 내 문 앞에 오게 해 다오
내가 이 심장을 찌르는 만큼
내 사랑이 너를 찔러라
그밖에도 달밤에 만드는 마법 공식, 바닥에 그리는 그림들, 밀랍이나 금속으로 만드는 인형 등이 있었다. 이런 인형은 의심할 바 없이 애인을 나타낸 것으로 상황에 따라서 그것을 처리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일에 익숙해져서, 아름답지도 않고 젊지도 않은 여자가 남자들에게 특별한 매력을 발휘할 경우 곧바로 마법을 의심하게 되었다.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비서의 어머니는 바로 이 경우에 해당했던 아들의 연인을 독살하였다. 불행하게도 아들과 그 친구들마저 독이 든 샐러드를 먹고서 모조리 죽고 말았다.
이제 이런 위험한 일들을 더 잘할 수 있는 마법사 혹은 강신술사가 마녀의 보조자가 아니라 경쟁자로서 등장하게 된다. 마법사는 흔히 점성술사이기도 했고, 때로는 마법사라기보다는 오히려 점성술사였다. 그는 종종 마법사로 박해받지 않기 위해 점성술사로 자처하였다. 어차피 유리한 시간을 알기 위해서 점성술의 요소는 마법사에게는 필수적이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망령들이 선하거나 적어도 중립적이기 때문에 그들을 불러내는 사람도 평판이 괜찮았다.
그러나 식스투스 4세는 1474년에 작은 교서에서 볼로냐의 카르멜 수도사들에 대해서 단호한 태도를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수도사들은 설교단에서 악령들에 대해 알려고 하는 일은 나쁜 일이 아니라고 말했던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가능성을 믿었다. 그에 대해 간접적 증거가 되는 것은, 가장 경건한 사람들도 선한 정령들의 출몰을 믿었다는 점이다. 사보나롤라는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고, 피렌체의 플라톤 아카데미 회원들은 신과의 신비스러운 합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르첼루스 팔링게니우스는 자기가 축성받은 정령들과 교제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고백하였다. 그는 악령들의 서열 체계에 대해서도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달 아래편에 살면서 자연과 사람들의 삶을 엿본다. 그는 이런 존재들과 직접 만난 이야기를 들려준다...<마법을 벌하는 망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공공연히 고백할 수도 있었던, 악령에 대한 이런 태도의 전체적인 윤곽을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네테스하임의 아그리파가 쓴 <밀교 철학>을 알려주어야겠다. 그는 이탈리아에 오기 전에 이 책을 썼던 것으로 보이지만 트리테미우스 등에게 바친 헌사에서 중요한 이탈리아 문헌들을 거론하고 있다. 그래 봐야 책은 더 고약해졌지만. 이 아그리파처럼 이중적인 인물들, 그리고 수많은 다른 사람들은 사기꾼이고 바보라고 불러야겠지만, 이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체계들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체계는 온갖 공식들, 훈증, 고약, 5 각형, 죽은 자들의 뼈 등을 갖추고 있다. 이런 책들의 앞부분은 고대의 미신에서 나온 인용구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런 다음에 삶에 끼어드는 발언, 이탈리아 사람들의 정열에 끼어드는 발언들은 때로 극히 중요하고 성과가 컸다. 위대한 인물들 중 가장 타락한 자만이 그런 일에 종사하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격렬한 소망과 열망이 때대로 각계각층의 정열적이고 창조적인 사람들을 마법사들의 세계로 데려왔다. 그런 일이 가능한다는 의식만으로도 벌써 마법과 무관한 사람에게서도 도덕적인 세계 질서에 대한 믿음의 일부를 빼앗아갔다. 약간의 돈과 위험을 감수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벌을 받지 않고도 일반적인 분별력과 도덕성에 저항하고 허락되거나 혹은 허락되지 않은 목적과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는 중간 단계를 뛰어넘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내용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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