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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니에리즘의 개념
    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8. 14. 14:16

    매너리즘(마니에리즘)이 예술사 연구의 전면에 부각된 것은 최근의 일이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는 흔히 이 개념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부정적 가치판단이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리하여 이 예술양식을 아무런 선입견 없이 순수한 하나의 역사적 범주로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주의 등과 같은 예술양식의 명칭에서는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간에 이들 명칭이 본래 지니고 있는 가치평가가 완전히 제거되지만, 매너리즘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가 강하게 작용되고 있어서 이 양식기의 위대한 미술가와 문인을 '매너리즘적'이라고 규정하기에는 어느정도의 저항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검토하고자 하는 예술현상의 설명을 위해 이 개념이 하나의 유용한 범주가 되려면, 순수한 예술양식으로서의 매너리즘이라는 개념과 흔히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뜻의 매너리즘적인 것을 완전히 분리시켜야 할 것이다. 여기서 구분되는 양식 개념과 가치 개념은 물론 예술사 발전의 어느 단계에서는 서로 일치하기도 하지만, 개념들 자체는 거의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것이다. 

    고전기 이후의 예술을 몰락 현상으로 보고 매너리즘의 예술제작을 거장을 노예적으로 모방한 기계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에 들어와서이며, 이러한 생각이 제일 먼저 등장한 것은 벨로리가 쓴 안니발레 카라치의 전기에서이다. 바사리에게 '마니에라'라는 말은 아직도 예술적 특성, 즉 역사적, 개인적 또는 기술적으로 규정된 표현방식, 그러니까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양식stile, style'을 의미했다. 예컨대 그는 '그란 마니에라gran maniera, 위대한 양식, 장대한 양식'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이 말을 어디까지나 긍정적인 의미로 썼다. 라파엘레 보르기니도 이 말을 완전히 긍정적인 의미로 쓰는데 그는 몇몇 예술가를 두고 마니에라가 없다고 유감을 표명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이미 근대적 의미에서의 양식(스타일)과 양식의 결여라는 구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니에라라는 개념을 가식적이고 진부하며 일련의 공식에 도입시킬 수 있는 성질의 예술양식이라는 관념과 처음으로 결부시킨 것은 벨로리와 말바지아 등 17세기 고전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매너리즘과 더불어 근대 예술발달사에 등장하는 예술양식상의 균열을 눈치채기 시작했고 1520년 이후의 예술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 고전주의로부터의 소외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매너리즘과 고전주의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렇게 일찍부터 이러한 소외현상이 일어났는가? 어째서 하인리히 뵐플린이 말하는 것처럼 전성기 르네상스는 오르자마자 하강해야만 하는 '좁은 산마루'로 머물러야만 했는가? 심지어 이 산마루는 뵐플린이 기술한 것 보다도 더 좁은 산마루였다. 왜냐하면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뿐만 아니라 라파엘로의 작품에도 이미 고전주의를 와해시키는 맹아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헬리오도로스의 추방]이나 [그리스도의 변용]에서도 르네상스의 틀을 여러 방향에서 파괴하는 반고전주의적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고전적, 보수적, 엄격형식주의적 원칙이 방해받지 않고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던 시기가 이처럼 짧았다는 사실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고대에는 안정과 지속의 양식이었던 고전주의가 왜 르네상스에는 단순한 '과도기적 단계'로 나타났는가? 어째서 그것은 그처럼 짧은 시간에 고전적 모델의 순전히 외형적인 모방으로 전락하고 내면적으로는 큰 간격을 느끼게 된 것인가? 그 이유는 아마 친퀘첸토의 고전주의에서 예술적 표현을 얻은 균형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견고한 현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이상이자 허구였고 르네상스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본질적으로 동적인 세대, 어떠한 해결책에도 온전히 만족하지 못한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불안정성과 근대 자연과학적 세계상의 변증법적 본질을 소화해내려는 르네상스의 노력은 후대의 시도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사회의 지속적인 정체상태는 중세 이후에는 두번 다시 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의 온갖 고전주의들은 언제나 하나의 프로그램의 결과였고 실제적인 안정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안정을 바라는 희망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15,16세기의 전환기에 만족상태에 다다르고 궁정화되고 있던 대부르주아지와 강력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야망에 부풀어 있던 교황청이 이룩한 불안정한 균형상태도 단기에 그치고 말았다. 이탈리아의 경제 주도권의 상실, 종교개혁으로 인한 교회 권위의 동요, 프랑스와 에스파니아의 침범, 로마 약탈 (1527년 칼 5세가 로마를 침략, 파괴한 사건) 등등의 사태 이후 이탈리아에서는 조화와 안정이라는 허구는 명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탈리아를 지배한 것은 종말론적 분위기였고, 또 이러한 분위기는 - 물론 그것이 이탈리아에서만 나온 것도 아니었거니와 - 전유럽으로 번져나갔다.

    고전주의 예술의 긴장없는 균형의 공식은 더이상 적합하지 않았다. 동시에 사람들은 그럴수록 거기에 집착했고, 심지어는 순탄한 관계에서 그랬을 것보다도 휠씬 더 충실히, 훨씬 안타깝게 결사적으로 그 공식들에 매달렸다. 젊은 예술가들의 전성기 르네상스와의 관계는 대단히 복잡하다. 이 시기의 조화로운 세계상이 비록 그들에게는 완전히 낯선 것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은 고전주의가 이룩한 예술적 성과를 무조건 포기할 수도 없었다. 사회적 발전의 연속성이 예술적 발전의 연속성을 뒷받침해주지 않았더라면 예술적 발전의 연속성을 지향하는 그들의 의지는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예술가와 예술감상자층의 구성원은 아직도 근본적으로는 르네상스 시기와 동일하였지만 그들이 발딛고 있는 땅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전기 예술과의 관계에서 보이는 그들의 모순성도 이러한 불안한 감정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17세기의 예술비평가들도 이와같은 모순을 이미 느꼈지만, 단지 그들은 고전주의적 작품모델의 동시적인 모방과 왜곡이 정신의 빈곤 때문이 아니라 고전주의적 정신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매너리즘적 정신에 기인한다는 것을 미처 인식하지 못하였다.. 

     

     

    Madonna with the Long Neck, Parmigianino 1535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II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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