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여성의 지위
    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8. 11. 10:22

     

    대등한 지위

    르네상스 시대의 고급 사교 모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성이 남성과 대등하게 여겨졌다는 사실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대화서술자들에게서 가끔 볼 수 있는 것으로, 여성이 열등하다고 하는 부분적으로 악의에 찬, 꾸며낸 발언들에 현혹되면 안된다. 그리고 예를 들어 아리오스토의 3번 풍자 같은 풍자들에 현혹되어서도 안된다. 이 작품은 여성을 다 컸지만 위험한 아이처럼 여기고, 남성들은 이런 여성을 다룰 줄 알아야 하며, 여성은 거대한 심연을 통해서 남성과 격리되어 있다고 말한다. 마지막 말은 물론 어느 정도 진실이다. 그러나 교육받은 여성이 남성과 대등한 위치였다는 점은, 결혼 생활에서 영혼의 공감대나 상호간에 더 높은 보충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뒷날 북부 유럽의 교양계층에 나타난 것 같은 결정에 도달하지 못한 이유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최고 신분계층에서 여성의 교육은 남성의 교육과 동일한 것이었다. 르네상스의 이탈리아 사람들은 딸과 아들이 문학과 문헌학 수업을 똑같이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망설여본 적이 없었다. 이 새로운 고전 문화를 삶에서 최고의 보물로 여겼기 때문에 딸들에게도 그것을 기꺼이 나누어주었다. 앞에서 이미 영주의 딸들이 라틴어 말하기와 쓰기에서 어느 정도까지 대가의 경지에 도달했는지 보았다. 다른 여성들은 적어도 라틴어 읽기에 동참해야만 했다.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고대문학에 관한 담화 내용을 쫓아가기 위해서였다. 덧붙혀서 칸초네, 소네트, 즉흥시 등을 통해 이탈리아 문학에 활발하게 동참하였다. 베네치아 여성인 카산드라 페델레(15세기 말) 이후로 상당수의 여성들이 그것으로 이름을 날렸다. 비토리아 콜론나는 불멸의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위에서 말한 주장을 입증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남성적인 음조를 지닌 이 여성의 시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쓴 사랑의 소네트와 종교적인 시들은 단호하고 정밀한 특성을 보이고, 보통 여성들의 문학 작품에 나타나는 부드러운 몽상의 모호함이나 온갖 딜레탕트적 요소와 거리가 멀다. 만약에 이름, 보고, 특정한 암시 등이 아니라면 이것은 완전한 남성의 작품이라고 간주될 정도이다.

     

    Vittoria Colonna / Michelangelo

     

    Vittoria Colonna / Michelangelo

     

    교양을 습득하면서 신분이 높은 여성에게서도 남자들의 경우와 비슷하게 개인주의가 발전하였다. 이탈리아 밖에서는 종교개혁에 이를 때까지 여성들, 심지어 영주의 부인이나 딸들조차도 개인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바이에른의 이사보, 앙주의 마르가리트, 카스티아의 이사벨 같은 예외적인 여성들도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그러니까 거의 억지로 드러날 뿐이다. 이탈리아에서는 15세기 내내 통치자들의 아내와 특히 용병대장의 아내들은 거의 모두가 특별하고 특징적인 개성을 지닌다. 각기 자신의 악명이나 명성을 지녔다. 점차 소양, 아름다움, 교육, 좋은 매너, 경건함 등이 전체적으로 탁월한 조화를 이룬 유명한 여성들이 다양하게 나타났다. 별도의 의식적인 '여성 해방' 요구는 물론 없었다. 그것은 이미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분이 높은 여성은 남성들과 똑같이 모든 점에서 완성된 개성을 성취하려고 노력하였다. 남성을 완전하게 만드는 지적, 감성적 발전이 여성도 완전하게 만들어주리라 생각하였다. 여성에게 활발한 문학적 활동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시인일 경우 영혼의 강한 울림을 기대하였을 뿐, 일기와 소설 형식에서 특별한 재능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녀들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남성들의 경탄을 받고자 하였으며, 그들의 충동을 제한하는 역할을 맡았다. 

    당시 위대한 이탈리아 여성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그녀가 남성의 정신, 남성의 마음을 지녔다는 말이었다. 보이아르도와 아리오스토의 영웅시에 나오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완전히 남성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만 보아도 이것이 특정한 이상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장부'라는 호칭은 오늘날에는 대단히 이중적 의미를 가지는 칭찬이지만 당시에는 순수한 칭찬이었다. 지롤라모 리아리오의 부인이었다가 미망인이 된 카테리나 스포르짜는 이런 호칭을 받을만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유산인 포를리를, 처음에는 그의 암살자들에 맞서서, 나중에는 체사레 보르지아에 맞서 방어하였다. 그녀는 패배했지만 당시 전국민의 감탄을 받았으며, '이탈리아 제1의 여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런 종류의 영웅적인 기백을 르네상스의 여러 여성들에게서 볼 수 있다. 다만 스스로 영웅임을 입증할 기회를 가졌던 여성은 두 번 다시 없었다. 이사벨라 곤자가는 이런 특성을 아주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Botticelli의  Caterina Sforza 라는 설이 있음

     

    이러한 부류의 여성들은 물론 주변에서 반델로 같은 작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사교 모임이 그런 일로 해를 입지는 않았다. 모임을 지배하는 정신은 오늘날의 여성적 특성은 아니었다. 즉 특정한 전제들, 예감, 신비에 대한 존경심이 아니라 에너지, 아름다움, 위험하고 운명적인 특성에 대한 의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극히 절제된 형식들과 함께 우리 세기에는 과도한 것으로 여겨지는 어떤 요소가 나란히 등장한다. 반면에 우리는 반대되는 것, 곧 당시 이탈리아에서 지배적인 여성들의 강한 개성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모든 논문들과 대화들을 살펴보아도 이런 식의 결정적인 언급을 포함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성의 지위와 능력에 대해서,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는 아주 광범위한 논의가 펼쳐지고 있지만 말이다. 

    꽃다운 처녀들은 이런 모임에서 일반적으로 빠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수도원에서 교육받지 않는 경우라도 이런 모임에 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들이 빠진 것이 대화를 더욱 자유롭게 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거꾸로 대화가 너무나 개방되어 있어서 처녀들이 끼어들 수 없어서 그랬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기생

    기생(창부)과의 교제도 한동안 번창하였다. 마치 고대 아테네 사람들이 헤타이라(Hetairae, 고대 아테네의 기생)들과 교제한 것을 재현하려는 것 같았다. 유명한 로마 기생 임페리아는 지성과 교양을 갖춘 여자였고, 도메니코 캄파나라는 사람에게서 소네트 짓는 법을 배우고 음악도 연주할 줄 알았다. 아름다운 이사벨라 드 루나는 에스파냐 태생이었는데, 아주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고, 선량한 여자이지만 입이 험해서 때로 고약한 일에 말려들곤 하였다고 한다. 밀라노에서 반델로는 카테리나 디 산 첼소라는 여자와 알고 지냈다. 그녀는 연주와 노래를 아주 잘하고 시를 훌륭하게 낭송하는 여자였다.

    모든 것으로 미루어보건대 이런 여성들을 찾아다니고, 때로 그들과 함께 살기도 했던 유명하고 지적인 사람들은 그녀들에게도 지적인 요구를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유명한 기생들을 최고의 경의를 가지고 대했다. 관계가 끊어지고 난 다음에도 그에 대해 좋은 의견을 가지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나간 정열은 언젝까지나 중요한 인상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적인 의미에서 이런 관계는 공식적으로 허용된 사교 모임과 대등하게 관찰될 수 없다. 이런 교제가 문학에 남긴 흔적은 주로 파렴치한 종류의 것들이다. 1490년 경에 - 그러니까 매독이 등장하기 이전 - 로마에 있던 약 6800명 정도의 창녀들 중에서 지성과 재능을 지닌 여성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상당히 놀랄 것이다. 위에 거론한 여성들은 그 후에 나온 여성들이다. 기생들의 생활 방식, 도덕심, 인생관과 그녀들의 생활에 나타나는 쾌락, 탐욕, 깊은 정열의 빠른 전환, 그리고 말년에 이르러 아첨과 못된 짓을 하는 것 등은 지랄디Giraldi가 그이 소설에 가장 잘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들은 그의 작품집<헤카토미티Hecatommithi>의 도입부를 이루는 것들이다. 그에 반해서 피에트로 아레티노는 <논쟁>에서 이 불행한 여성들의 내면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내면을 그려냈다. 

    앞에서 영주를 다루면서 이미 언급했던 영주의 정부들은 시인들과 예술가들의 묘사 대상이었고, 그래서 당대와 후세에 그 모습이 알려져 있다. 그에 반해서 앨리스 페리스(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의 정부,1400년 사망)와 클라라 테탱(프랑스 승리왕 프랑수와의 정부)에 대해서는 이름밖에 알려진 것이 없다. 아그네스 노렐(1422~1450, 프랑스 샤를 7세의 정부로 알려짐)에 관해서는 진짜라기 보다는 꾸며낸 사랑 이야기만 남아있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이.탈.리.아 역사 > 16c - 19c'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니에리즘의 예술관  (0) 2020.08.23
    마니에리즘 II  (0) 2020.08.22
    마니에리즘의 개념  (0) 2020.08.14
    완전한 사교인  (0) 2020.08.10
    궁정 살롱의 문학 형식들  (0) 2020.08.09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