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완전한 사교인
    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8. 10. 08:41

     

    궁정인

    카스틸리오네가 서술한 <궁정인 Il Contegiano>을 보면 그들은 궁정을 위해서,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오히려 그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를 훈련하였다. 그는 당시의 교양이 필연적으로 요구하던 사회적인 이상형이었다. 그가 궁정을 위한 존재라기보다는 궁정이 그에게 필요하였다. 모든 것을 고려해보면 그런 인간은 어떤 궁정에서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완전한 영주의 재능과 태도를 가지기 때문이고, 외적인 일에서나 정신적인 일에서 그의 조용한 탁월함은 너무나도 독립적인 천성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궁정인을 움직이는 내적 추진력은 영주에 대한 봉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완성이다. 이것을 분명하게 알기 위해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궁정인은 전쟁이 일어나면, 쓸모는 있지만 위험하고 희생과 결합된 과제들이, 아름답지도 품위가 있지도 않은 것일 경우에는 거절한다. 예를 들면 소떼를 잡는 일 같은 것. 그를 전쟁에 참여하게 만드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명예심'이다. <궁정인> 제4권에 따르면 이들은 영주에 대해서는 도덕적으로 매우 자유롭고 독립적인 관계였다. 제3권에서 보여주는 고귀한 사랑의 이론은 대단히 섬세한 심리적 관찰들을 포함하는데, 그것들은 오히려 보통의 영역에 더 잘 어울리는 관찰들이다. 그리고 제4권 마지막에 나오는 이상적인 사랑에 대한 위대하고 거의 시적인 찬양은 이 책의 특별한 주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러나 이 책이나 벰보의 <이솔라니>에서 교양의 높이는, 비할 바 없이 세련되고 분석적인 감정들의 표현 방식에 나타나 있다. 물론 이 작가들의 말을 도그마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연설이 귀족 모임에서 행해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고, 단순한 감정 뿐 아니라 참다운 정열도 이런 옷을 입고 나타났다는 사실을 앞으로 보게 될 것이다. 

     

     

    Baldassarre Castiglione, Il Contegiano

     

     

    궁정인의 경우 외적인 능력들 중에서는 우선 이른바 기사훈련을 완벽하게 할 것이 요구되었다. 또한 당시 이탈리아 바깥에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고도로 조직되고, 개인적인 열성 위에 자리잡은 궁정에서만 요구될 수 있는 다른 기술들도 있었다. 많은 것들은 분명 개인의 완성이라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에 근거한 것들이었다. 궁정인은 모든 스포츠를 잘 할 줄 알아야 했다. 높이뛰기, 달리기, 수영, 레슬링 등이었다. 그리고 특히 춤을 잘 추어야 하며, 당연한 일이지만 말을 잘 탈 줄 알아야 했다. 그리고 여러 개의 언어, 적어도 이탈리아어와 라틴어를 할 줄 알아야 하며 순수문학을 이해해야 했고, 미술에 대해서도 좋은 안목을 가져야 했다. 심지어 음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훈련된 기술을 기대하였다. 다만 음악적 능력은 가능한 한 드러내지 않아야 했다. 무기를 빼고는 근본적으로 진지한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능력들을 상호 중화시킴으로써 어떤 특성으로도 두드러지지 않는 절대적 개인이 생겨났다. 

    16세기에 이탈리아 사람들이 이론적인 저술가로서나 실습 교사로서, 모든 고귀한 신체 훈련과 사교적인 예의를 가르치기 위해서 유럽 전체를 자기들의 학교에 받아들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말타기, 펜싱, 춤 등의 분야에서 그들이 그림이 들어간 책을 통해서 그리고 손수 가르침으로써 다른 나라에 모범을 제시하였다. 군사훈련이나 단순한 놀이와 별개로 체조는 맨 먼저 비토리노 다 펠트레가 가르쳤는데, 그 이후로 완전한 교육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되었다. 어떤 연습들이 행해졌는지 오늘날 주로 하는 체조들이 당시에도 알려져 있었는지 하는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힘과 능숙함 이외에 우아함도 목적의 하나였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탈리아 국민의 사고 방식으로뿐 아니라 당시의 기록들에도 드러나고 있다.

     

     

    Camera degli Sposi di Andrea Mantegna

     

    우르비노의 위대한 페데리고가 자기가 돌보는 젊은이들의 저녁 훈련을 어떻게 지도하였는지 기억해보라. 이탈리아 사람들의 놀이와 경기들은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행해지던 것들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해안 도시에서는 물론 노젓기가 첨가되었고, 베네치아와 레가타 경기는 일찍부터 유명했다. 이탈리아의 고전적인 경기는 구기였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구기도 유럽의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더 큰 열기로 행해졌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위한 특별한 증언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음악

    이 자리에서 음악 이야기를 해야겠다. 작곡은 1500년경에는 네덜란드파의 손에 들어 있었다. 그들은 비상한 예술성과 작품의 훌륭함으로 경탄을 받았다. 그러나 그와 나란히 이탈리아 음악이 있었는데, 이쪽이 오늘날 우리의 음감각에는 더 가까운 것이다. 50년 뒤에는 팔레스트리나Palestrina(1525~1594)가 등장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그의 음악의 힘 앞에서 압도당한다. 그가 새 시대의 위대한 작곡가였다는 것은 알지만 결정적으로 현대 음악 언어로 들어오게 된 것이 그가 한 일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업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니 작곡의 역사는 그 분야에 맡겨두고 우리는 당시 사회에서 음악이 차지하던 위치를 알아보기로 하자. 

     

    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 (1525-1594)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오케스트라를 풍부하게 세분화했다는 것, 새로운 악기들과 음계의 탐색, 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거장Virtuosi'의 형성 - 다른 말로 하자면 특별한 악기들에 자신을 다 바친 개인들이 등장한 것 -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한 화음을 표현할 수 있는 악기들로는 오르간 뿐만이 아니라 그와 유사한 현악기인 그라비쳄발로 혹은 클라비쳄발로 또한 일찍부터 완성되어 널리 퍼져 있었다. 14세기 초에 나온 이 악기의 일부분이 지금도 보관되어 있다. 가장 위대한 화가들이 이 악기들에 그림을 그려 넣었기 때문이다. 그밖에는 바이올린이 가장 중요한 악기였고 당시 이미 위대한 거장들이 있었다. 교황 레오 10세는 추기경 시절에 벌써 집에 가수들과 음악가들을 두었고, 음악을 알고 함께 연주하는 사람으로 높은 명성을 얻었다. 그의 시대에는 유대인 조반 마리아 델 코르네토와 야코퍼 산세콘도 등이 유명하였다. 레오 10세는 조반 마리아에게 백작 지위와 작은 도시를 선물하였다. 라파엘로가 그린 <파르나소스>의 아폴론은 야코포 산세콘도를 그린 것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Raffaello: Parnassus, 1511 

     

    16세기에는 각 장르별로 유명한 사람들이 생겨났다. 로마쪼(1580년경)는 노래, 오르간, 류트, 리라, 비올라 다 감바, 하프, 치터, 호른, 트롬본 등의 분야에서 각기 이름이 알려진 거장들을 세 사람씩 나열하고 있다. 그는 또 악기 위에 그들의 초상화를 그리면 좋겠다는 소원을 말한다. 그 모든 악기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시 이탈리아 바깥에서는 그렇게 다양하게 비교하는 판단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악기들이 그렇게 다양해졌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호기심으로 악기를 모으게 되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대단히 음악적이었던 베네치아에서는 그런 악기 수집이 꽤 이루어졌고 그래서 우연히 몇 명의 거장들이 한데 모이는 경우에는 즉석에서 연주회가 열리곤 했다. 이 물건들이  일부는 대단히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고 한데 모아 놓으면 대단히 아름답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다른 희귀품이나 미술품 수집에 이런 악기들도 덧붙여지곤 했다. 

    연주자들은 알려진 거장들 말고도 몇몇 애호가들이나 아니면 아예 애호가들로만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이른바 '아카데미' 단체를 형성하였다.  수많은 조형 예술가들이 음악 분야에서도 자리를 잡고 거장이 되곤 하였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취주악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귀한 사교 모임들에서는 단독으로 혹은 바이올린 반주와 함께 부르는 노래를 좋아하였다. 또한 현악 4중주와 다양성 때문에 클라비쳄발로[하프시코드]도 자주 연주되었다. 그러나 노래에서는 솔로만 인정되었는데 "왜냐하면 하나의 음성을 듣고 즐기고 판단하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노래는 그 모든 관습적인 겸손에도 불구하고 각 사교인의 자기 표현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을 듣고 보는 쪽이 더 나은 것이다. 그러나 노래를 듣는 여인들의 마음에 극히 달콤한 감정을 일깨우리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었고, 그래서 나이 든 사람들은 아직도 아름답게 연주하고 노래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멀리하라고 분명한 권고를 받았다. 그러므로 개인이 음악과 조화롭게 어울린 인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였다. 작곡을 독자적인 예술 작품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이런 모임들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에 반해서 가사 내용이 노래하는 사람 자신의 무서운 운명을 서술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이탈리아에는 상류층이나 중류층에 이런 딜레탕티즘이 널리 퍼져 있었고, 동시에 다른 어떤 나라에서보다도 진정한 예술에 근접해 있었다. 사교 모임이 묘사된 곳에는 언제나 노래와 현악기 연주가 언급되어 있다. 수많은 초상화들은 자주 여럿이 함께 모여서 음악을 연주하거나, 혹은 팔에 류트 같은 악기를 든 사람들을 묘사한다. 종교화에 나타나는 천사들의 연주회는 화가들이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에 얼마나 친숙했던가를 보여준다. 예를 들면 류트 연주자인 안토니오 로타는 파도바에서 류트 교습으로 부자가 되었다고 하며, 류트 연습곡집을 출간하였다. 

    오페라가 음악의 천재들을 자기 쪽으로 긁어 모아 독점하기 이전 시대에 나타난 이런 음악 숭배는 풍부하고 다양하며 놀라운 정신력의 소산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당시의 음악을 듣는다면 그 음악 세계에 얼마나 동참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야후 이탈리아

    '이.탈.리.아 역사 > 16c - 19c'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니에리즘의 예술관  (0) 2020.08.23
    마니에리즘 II  (0) 2020.08.22
    마니에리즘의 개념  (0) 2020.08.14
    여성의 지위  (0) 2020.08.11
    궁정 살롱의 문학 형식들  (0) 2020.08.09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