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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니에리즘의 예술관
    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8. 23. 14:40

     

    농민전쟁과 종교개혁, 그리고 반종교개혁으로 특징 지워지는 16세기 초반의 정치적, 종교적 동요에 대한 반향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성기의 고전주의적 국면이 지나자 예술관 역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조화는 긴장으로, 일치는 새로운 대립과 모든 가치에 대한 문제 제기로 교체되었다. 몽테뉴(1533-1592)에 의해 다시금 고대에 의존하는 근대 회의론의 형식이 정초 되었다. 계승된 모든 가치가 지니고 있었던 문제성은 예술에 떠넘겨졌으며, 이는 변증법적이고 모순적인 구성 법칙이 예술이론에서도 이용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연금술적 캡슐화와 지적 고립으로 이어졌다. 

    더욱이 예술의 본질에 전념하고 있던 것은 예술가와 건축가들이었으며, 신학자와 철학자는 중심적인 논제에 대해서 단지 주변적 입장에서만 참여했다. 물론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 같은 사상가는 당대의 예술가들, 특히 뒤러, 한스 홀바인과 밀접한 관계였으며, 그러한 관계를 통해 자신의 이론적 문제에 관한 통찰을 얻었다. 멜란히톤 또한 뒤러와 크라나흐가 당대의 위대한 예술가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특히 1600년 경에는 강령적으로 이론적 문제에 집중하여, 논쟁에 새로운 국면을 등장시킨 일련의 예술가들이 나타났다. 그 국면은 곧이어 특히 18세기 후반에 전문적으로 심화 발전되며 예술 전문가이자 예술사가인 빙켈만 같은 사람에게서 정점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마니에리즘 예술론은, 경직되고 대개 수학적으로 규정된 르네상스의 규칙에 대한 반동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조르다노 부르노(1548-1600)는 규칙이 참된 예술가만큼이나 많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브루노는 1586년부터 비텐베르크 대학의 객원 교수로 있으면서, 비록 무위로 돌아가긴 했지만 자신이 존경하던 학자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를 루터의 혁명적 업적과 연결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의 견해에 따르자면, 종교개혁을 통한 사유에서의 루터의 혁명은 자신의 영역에서 코페르니쿠스의 혁명 만큼이라 혁명적이었다. 

    브루노의 독특한 철학적 인식론은 근원적 단자(Ur-Monade)로서 다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일자에서 출발한다. 거의 플로티노스적인 의미에서, 모든 것은 이러한 근원적 실체(Ur-Substanz)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것을 포괄하는 유출 속에서 생성된다. 그러나 사물이 인간의 거울이듯이, 지각하는 인간은 사물의 거울이다. 이리하여 거울 개념은 - 예컨대 보베의 뱅상과 같은 중세 스콜라 철학만큼은 아니더라도 - 브루노 철학의 중심 개념이 된다. 그는 자신의 논문 <관념의 구성에 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성은 그 스스로를 즉자적으로 지각하지도 못하며 물 자체를 물 자체로 지각하지도 못한다. 다만 외적인 형상이나 모사, 형태 속에서 기호로서 지각할 뿐이다." 

    브루노가 1584년에 쓴 글인 <원인, 법칙, 그리고 일자에 대하여>는 창조자와 그에 의해 창조된 세계를 유비類比하고 있다. "신적인 특출함과 이 거대한 유기체의 훌륭함, 그리고 최고의 원리들에 대한 이 모사의 훌륭함은, 나에게는 세계가 그 부분들로 인해 생기 넘치게 된다는 사실을 보지도 인정하지도 않으려 하는 사람들의 정당성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마치 신이 그의 모상을 시샘하듯이, 건축가는 자신의 작품에서 알아본 스스로와의 유사성 때문에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는 것이다. 사실 신의 눈에 이 우주 말고 그 무엇이 더 아름다운 것으로 나타날 수 있겠는가?"

    괴테는 1775년 논문 ⎡팔코네에 따라, 팔코네에 대해에서 아주 비슷한 표현을 하고 있는 바, 예술가들의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말하자면 세계는 그 창조자 앞에 놓여 있듯이 마찬가지로 예술가 앞에 놓여 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예술가는 창조물에 대해 기뻐하며 모든 사람들은 그 창조물을 산출하고 성립시킨 조화를 향유하기 때문이다..."

     

    바사리의 예술해석

    화가이자 건축가인 조르지오 바사리(1511-1574)는 자신의 <생애Vite>에서 마니에리즘의 생활감정에 설득력 있는 표현을 부여하고 있다. 1550년에 나온 이 저작의 초판에서 그 영향이 몇 세기 더 미치게 될 예술가들의 전기가 최초로 포괄적으로 수집되었다. 그러나 그 위대한 저작은 분명히 단순한 전기들의 모음 이상이었으며, 바사리는 그것을 포괄적인 예술이론으로 이해했다. 

     

    Vasari's self-portrait

     

    그는 플라톤을 따라 모방론을 받아들였으며, 플리니우스와 더불어 개화, 몰락, 재출발이라는 세 가지 시대의 학설을 예술 발전의 토대로 간주했다. 바사리가 이 학설을 나름대로 적용한 바에 따르자면, 고대의 예술은 하나의 정점이며, 암흑 속의 중세는 몰락으로서 이에 대비된다. 그런데 그 중세가 14세기의 예술 부흥으로 말미암아 다시 극복된다. 1550년의 초판이 미켈란젤로에서 그 정점에 도달했던 반면 - 바사리의 주장에 따르자면 고대는 미켈란젤로에 의해 극복되었다 - 1568년의 중판에서는 그와 관련된 저자 자신의 전기를 덧붙이면서 저자의 강력한 자부심을 정당화하였다. 

    비록 국가적 우월성이라는 의도에서 국부적 비판과 수정이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이후 많은 예술가들과 예술에 관한 저술가들의 전기 모음은 예외 없이 바사리의 전형을 따랐다. 요한 피샤르트(1546-1590)는 바사리에 의해 주장된 모방론의 전횡에 대항하여, 환상, 독창성, 보편적인 세계관 등을 예술에서 중요한 것으로 제시했다. 그는 또한 바사리가 북방의 가장 중요한 예술가들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피샤르트는 무엇보다도 얀 반 에이크가 자신의 의의를 합당하게 평가받지 못했으며, 루카스 크리나흐, 후스 반 클레브, 한스 발둥과 한스 홀바인도 부당하게 간과되었음을 강조했다. 

    카렐 반 만더, 프란체스코 파체코, 요아힘 폰 산트라르트, 아르놀트 호우브라켄 그리고 안토니오 팔로미니와 같은 이후의 바사리 추종자들은 근본적으로 그의 전형을 예술이론적 기초로서 받아들였고, 이리하여 고대의 전통은 18세기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출처> 예술이론의 역사 / 우도 쿨터만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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