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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탈리아 문학의 안내 ll - 한 형곤
    이.탈.리.아 문화/문 학 lettere 2010. 6. 11. 12:24


    이 즈음 문학의 영역에서는 라틴어가 완전히 생기를 잃고 방언(이탈리아 어)이 문학의 전용어가 되다시피했다.
    아리오스토와 마키아벨리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문필가들이다. 아리오스토는 다른 예술가들처럼 궁정의 비호를 받았지만, 오로지 시작에만
    몰두하는 생활을 꿈꾸면서 자신의 창작력을 새롭게 하고 싶었다. 그는 자기 이미지의 세계에 묻혀 지낸 것이다.
    14세기의 거장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이래 가장 두드러진 작품이라 할 <미친 오를란도 Orlando Furioso,1516>는 그의 대표작이다.
    이 시는 보이아르도가 발표했던 <사랑의 오를란도>와 더불어 기사문학의 쌍벽을 이루는데, 아리오스토는 보이아르도의 작품이 끝나는
    부분부터 이야기를 전개한다.



    미친 오를란도

    Ruggiero Rescuing Angelica by Gustave Doré



    안젤리카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사랑받는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후보자인 오를란도는 미치고 만다.
    큰 줄거리는 대략 이렇지만 내부에는 숨막힐 듯한 삽화들이 시인 자신의 감정에 지나치게 사로잡힘 없이 일관성있는 농도를 전개해간다.


    아리오스토의 동시대인인 마키아벨리는 다분히 이색적인 작가이다.
    현대 정치학의 원조로도 불리우는 그는 일찍부터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을 중시하면서 정치적 문제를
    면밀히 연구했다. 잘 알려진 <군주론> 속에는 그의 정치 사상은 물론 일반 사상까지 반영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들은 사악하므로 그를 통치하려면 강력한 힘을 행사하는 총명한 군주가 정치를 하는 국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군주는 물론 법률과 정의에 의해서 국민을 통치하되 그것들로 통치가 안될 때는 무력이나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주는 덕이 있어야 하며 적절할 때에 힘을 행사해야 한다고 했지만, 마키아벨리는 목적을 위해 어떤 수단이든 불사한다는
    마키아벨리즘을 창시했다. 순수 문학 작품으로는 희곡 <만드라골라>가 있는데, 이것도 <군주론>의 기반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Niccolo Machiavelli's portrait, 1536–1603
    Santi di Tito



    문학활동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언어의 문제(문어文語 와 구어口語)가 대두되었다.
    벰보의 <속어론>이라는 논문은 상당한 주목을 끌었다. 벰보에 의하면 문어란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문학작품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또 페트라르카나 보카치오의 이탈리아 어 산문이나 시에 나오는 언어가 참다운 문어라고 단정했는데, 이 주장은
    현존하는 언어의 구조 및 발달을 중요시해야 한다는 학파로부터 반격을 받는다.


    16세기 후기에 이르러 위기의 징조가 나타났다. 우아함이나 섬세성이 점점 사라지고 질서와 형식이 무너지는 상황이 시작되었다.
    자연히 삼류와 아류 문인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던 도중에 탓소 Torquaro Tasso 가 나타났다.
    그의 대표작 <해방된 예루살렘 Gwrusalemme Liberata, 1593> 과 <아민타 Aminta, 1575>는 특기할만한 작품들이다.
    탓소는 시에 음악성을 불어넣어 깊은 우울증을 잘 묘사하고 있다.
    16세기 초엽에 이름을 떨친 시인은 아리오스토와 탓소인데 전자의 경우 사랑이라는 테마가 삶의 즐거움으로 부각되는 반면
    후자에게는
    고툥이라는데 두 시인 간의 이질성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아리오스토는 나레이션 기법을 썼는데, 탓소는 감정의 흐름을 중요시했다. 그러므로 후자의 시는 非詩적인 경우가 나타난다.




    Torquato Tasso  




    La Gerusalemme liberata 1628
    Padova, per Piero Paolo Tozzi







    Gerusalemme liberata 내용을 모티브로 그린 그림
    Sir Anthony Van Dyck "Rinaldo e Armida"  1628-1629




    탓소 이후 17세기 이탈리아 문학은 지극히 초라했다.
    지성들은 이탈리아 문학에 지대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날로 문학적인 논쟁만 격심해졌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로마에 '아르카디아 Arcadia" 라는 아카데미아가 창설되고, 차차 전 이탈리아에 지부가 생겼다.
    '아르카디아'의 주장은 문학에서 나쁜 습성을 타파하고 목가적인 문학풍을 통해 현실로 돌아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학파의 시인들도 문학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 학파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칸쪼니에레>와 많은 오페라 대본을 남겨 멜로 드라마의 기질을 개혁시킨 메타스타시오이다.
    그는 시를 음악에 맞추는, 즉 시와 음악의 연관작업에 큰 공헌을 했다.
    이외에 무라토리, 비코, 지안노네 등 3명의 '아르카디아' 학파가 비교적 고양된 작품을 남겼다.
    특히 비코는 철학자, 사학자이며 문필가로 잘 알려져 있으며, 이탈리아 문명사회에 커다란 자극을 준 신학문의 쇄신을 가져왔다.
    이러한 문학의 쇄신운동은 프랑스의 백과사전파, 영국의 이성주의 및 계몽주의와 때를 같이하며 역사, 철학, 사회학적인 연구를 전개하면서
    문학에 새로운 기운을 넣자는 것이다.
    문예지 'Il Caffe', 'L'Osservatore' , 'La Frusta Letteraria' 가 출현하여 문학, 예술의 비평작업이 활발했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희곡의 범주에 새로운 운동이 전개되었다.
    16세기까지 전래되어 오던 희곡적 풍토가 한때 소홀시 되었는데, 골도니 Carlo Goldoni 에 이르러 활기를 찾았다.
    그는 코메디아 델 아르떼의 희극을 보다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장본인이다.
    즉흥희극들과는 다른 희극, 즉 현대의 의미에서 완전한 형식을 갖춘 희극이 생겨났다. 자연히 골도니가 다룬 희곡의 등장인물들은 천태만상의
    느낌을 주고 있다. 하인으로부터 상인, 평민, 귀족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주인공이 되지만 소시민들의 생태에 더 관심을 가졌다.
    대표작으로는 <고물 수집가의 일가 La famiglia dell'antiquario, 1749> < 여인숙의 여주인 La locandiera, 1752> <커피 숍 La bottega del caffe, 1751> < 친절하고 괴상한 사람들 Le bourru bienfaisant, 1771> 등이 있는데, 대개의 작품들 속에 베네치아 방언의 여운이 있어 그의 문체는 이색적이다.



    골도니의 희극 장면들



    신학문이 대두되고 난 뒤 처음으로 주목을 끌던 시인은 파리니이다.
    파리니의 세계는 미완성으로 남겨진 하루(il giorno)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젊은이들을 교육시킬 목적으로 강렬한 풍자성을 내포시키고 있는 걸작이다.
    골도니와 파리니 이후에는  <사울 Saul> <오레스떼 Oreste> <비르지니아 Virginia> 등을 남긴 알피에리 VittorioAlfieri 를 들 수 있다.
    그는 억압을 증오하며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것을 작품의 테마로 사용했다.




    Vittorio Alfieri
    painted by David's pupil François-Xavier Fabre, in Florence 1793










    출처> 이탈리아 문학의 이해 - 한 형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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