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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문학의 안내 l - 한 형곤이.탈.리.아 문화/문 학 lettere 2010. 6. 11. 01:47
로마의 영토 확장과 함께 로마의 문화도 자연히 폭이 넓어졌다.
로마인들은 점령지에 그들의 언어를 옮겨갔는데, 라틴어는 대중 속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그 지방의 토착 언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新라틴어 -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루마니아어, 프로방스어, 라틴어 등이 그것이다.
프랑스나 프로방스 문학이 이탈리아 문학보다 일찍 번성했는데, 이탈리아 문학은 강력한 라틴어 문학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문학은 각 지역의 특색에 따라 조금씩 양상을 달리한 채 대개 13~14세기에 일어났다.
처음엔 다분히 종교적 색채를 띄었는데, 문학적 가치로 보아 아씨지의 성 프란체스코 의 피조물의 노래(cantico delle creature)가 대표적이고
이탈리아 문학의 효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극히 사실적인 작품으로 종교성에 도전한 야코포네 다 토디(Jacopone da Todi 1236~1306) 의
시들도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와 동시에 시칠리아의 페데리코 2세 궁전에 모여든 시인들로 인해 시칠리아 학파가 발생하여 토스카나의 방언(이탈리아어의 모체)으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 학파의 시인들은 프로방스 문학의 영향을 받아 시를 종교적, 교육적 목적으로 쓴 작품들과는 달리 시를 위한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순수시를 태동시킨 원인이 되었다.
나폴리 Palazzo Reale 의 페데리코 ll세 동상
13세기 중엽에 볼로냐에서 구이니첼리가 프로방스 문학과 시칠리아 학파의 시를 계승하여 사랑과 여성의 미를 찬양하는 시를 썼으며,
그와 같은 작품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이들이 단테가 명명해준 '청신시체파淸新詩體派)'이다.
여기엔 단테 자신도 가담했으며, 그의 친구인 카발칸티, 지노 다 피스토이아 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모두가 토스카나 방언을 사용했다. 이들의 작품이 있었기에 토스카나 방언이 현대 이탈리아어의 모체로 발전된 것이다.
14세기에 이르러 이탈리아 문학의 황금 시대가 전개되었다. 종교성을 띤 익명의 <성 프란체스코의 꽃들>을 비롯하여, 파사반티, 카발칸티,
카테리나 다 시에나 등의 작품과 콤파니의 <크로니카>, 사케티의 <300편의 이야기> 등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들을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등의 3 천재에 비할 수는 없다. 단테는 이탈리아의 시인이라기 보다는 전 인류의 시성이라고
볼 수 있는 존재이다. 대표작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의 완성 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대략 1300년 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Domenico di Michelino, La Divina Commedia (1465)
'우리 인생길 반고비에 난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었지' 를 보면, 단테는 인생을 70살로 간주한 듯하다. 단테가 1265년에 출생하였으니
1300년으로 생각된다. 피렌체 공화국은 정치적으로 극히 혼란하였다. 심한 당쟁의 소용돌이에 단테도 희생양이 되어 유배당하게 된다.
신곡은 유배중에 완성을 본 작품이다. 이 불후의 명작은 3부(지옥, 연옥,천국)으로 되어있으며, 각각 34,33, 33, 모두 100곡으로 구성되어 있는
3연체, 11음절로 된 서사시이다.
가톨릭 교리에 따라서 구분된 죽음 이후의 세계를 편력하는 환상여행기이다.
살아있는 단테는 혼자 여행할 수 없어 2명의 안내자를 택한다. 로마의 건국을 노래했고, 그리스도의 강생을 예언한 베르질리우스의 인도하에
지옥과 연옥을 순방하고, 하나님의 사랑이며 신성의 상징인 베아트리체의 손길을 따라 천국을 여행한다.
영원한 여성 베아트리체와 인성의 상징인 베르질리우스는 대단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Detail of a manuscript in Milan's Biblioteca Trivulziana (MS 1080)
written in 1337 by Francesco di ser Nardo da Barberino
<신곡>이외에 베아트리체를 동경하여 쓴 시와 그 해설 산문으로 엮어진 <새로운 삶>은 단테가 남긴 시집이며 청신시체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Petrarch's Virgil (title page) (c. 1336)
그 외에 중세 문화 및 철학의 핵심을 요약한 것으로 볼 수 있는 <향연>, 이탈리아에서의 문어文語 의 발견을 주요 테마로 한 언어학적 논문인 <속어론>
과 정치학 논문인 <제정론> 등이 있다.
단테와 더불어 이탈리아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은 페트라르카이다. 단테와 40 여 년의 간격을 두고 문학 활동을 한 서정시의 거성이다.
시가 본연의 성격을 띠게 되고, 사람이나 그 주위에서 주제를 얻어내는 움직임이 페트라르카로부터 시작되었다 - 인문주의의 싹이 튼 것이다.
그는 참다운 문학의 가치는 고전작품들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갈파했다. 자연히 그는 팽배했던 종교성을 배격하고 관심을 그리스와 라틴의 고전으로
돌린다. 그러므로, 그는 詩作도 단테와는 달리 라틴어로 써야한다고 주장하며 방언 문학을 경시했다.
서간문, 아프리카 1339, 승리 등의 주요 작품들은 라틴어로 되어 있고, 칸초니에레 canzoniere C.1342 만 방언으로 되어있다. 사랑하던 라우라에게
바치는 시를 모은 것으로, 아마도 그녀가 라틴어를 몰랐기에 방언으로 썼는지도 모른다.
페트라르카의 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성은 그가 과감히 중세적 탈을 벗어버리고 근대 문학의 출발점을 마련하여 이탈리아에 르네상스가 태동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청신시체파에서 천사로 찬미되던 여인들은 여성 본연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Illuminated manuscript by Simone Martini, 29 x 20 cm
Biblioteca Ambrosiana, Milan.
페트라르카가 시작한 인문주의 운동은 보카치오에게 전승되었다.
순수한 문학적 관점에서 볼 때 보카치오는 단테나 페트라르카의 영화를 누릴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미치지 못할 만큼 높은 수준의
방언 산문을 남겼다. 페트라르카와 마찬가지로 보카치오도 고전 작품들을 연구하고, 그것들을 자기 작품들의 모체로 여기며, 새로운 방향을
찾아 내려고 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을 나폴리에서 보내며 법률을 공부했는데, 문학에 대한 강렬한 열정으로 포기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마리아라는 여성을
깊이 사랑하여 그 여성에게 바치는 글이었다.
마리아는 피암메타라는 이름으로 보카치오의 詩神이 된 것이다.
사랑의 승리 1343-1344, 사랑에 지쳐 1342- 1343, 피에졸레 언덕의 요정 등의 아름다운 시와 코르바치오1354 같은 산문을 비롯하여 걸작
데카메론을 남겼다. 이 작품은 리얼리즘에 기초를 둔 것으로서, 단테 이후 각양각색의 인물을 가장 많이 다루고 있다.
데 상티스 같은 비평가는 단테의 신곡에 견주어 데카메론을 인곡人曲 이라 하였다.
데카메론은 100편의 이야기와 10편의 발라드로 되어있다. 3명의 청년과 7명의 여인들이 무서운 전염병인 페스트를 피해 피에졸레에 간다.
이들은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하루에 각자 한 편의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페트라르카와 같은 시대에 살았으면서도 보카치오는 판이한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현실 세계에 완전히 기반을 둔 인생관, 또 그 인생관이
전작품의 저변에 깔려있다.
Giovanni Boccaccio and Florentines who have fled from the plague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의 영향은 15세기에도 계속되었다.
중세의 위기 내지는 종말을 알리는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암시하는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 되었다.
이 운동이 문예 부흥 운동이다.
중세까지만 해도 신을 절대가치, 최고의 가치로 여겼으나 이제부터는 인간은 인간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절대자에 의해 인도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스스로의 문제의식을 찾아 나간다는 것이다. 정신적 자유가 드디어
종교라는 무거운 굴레를 벗게 된 것이다.
Pieter Bruegel “Peasant’s Dance”
c. 1568
로마, 나폴리에도 피렌체에 뒤이어 '아카데미아Academia' 가 문을 열고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작품 속에서 새로운 정신을 찾으려 하는
연구가 집중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는 다시 방언문학이 라틴문학에 뒤진 경향이 있었으나,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차차 방언문학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많은 예술가들을 자기 궁성에 모아 예술활동을 하도록 한 메디치, 폴리치아노, 풀치의 소품들을 비롯하여
기사문학의 거장이며 <사랑의 오를란도> 의 저자 보이아르도, 전원적 소설가 산나차로와 다반차티 등의 작품들이 주목의 대상이 된다.
15세기에 설정되었던 문화의 방향과 경향은 16세기 초엽에 이르러 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인문주의자들이 주장했던 인간의 지성의 힘과 권위에 대한 개념이 새로운 문명의 전제로 등장하며, 인간은 이 지상에서의 삶을 만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콜롬부스와 마벨란이 등장하여 신대륙을 발견하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의식 구조도 변했다. 인간의 정신에 대해 명상하고
현실이 과연 어떤 것이냐 하는 문제를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출처> 이탈리아 문학의 이해 / 한 형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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