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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올로 사르피
    이.탈.리.아 역사/이탈리아가낳은인물 titani 2021. 1. 1. 13:16

     

    Paolo Sarpi ( 1552 Venezia – 1623) : 베네치아 역사가, 성직자, 과학자, 학자 및 정치가로서 베네치아가 교황의 금지령 (1605–1607) 과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1615–1617)에 성공적으로 저항하는 동안 조국 베네치아를 도왔다

     

     

    베네치아에서 중소상인인 아버지와 귀족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파올로 사르피의 본명은 피에트로 사르피였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그는  인문주의적 소양이 뛰어난 교사였던 외삼촌에게 문법과 수사학 등의 기초 교육을 받고, 12세에 마리아 시종원의 수도사 Giammaria Capella 에게 논리학과 철학, 신학 교육을 받았다. 다양한 스승들에게서 수학,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익힌 그는 13세에 프라(형제) 파올로라는 이름으로 마리아 시종원 servi 수도원에 들어갔다.

     

     

     

     

    1567 년경 만투아Mantua의 수도원으로 배정되었고, 굴리엘모 곤자가 Guglielmo Gonzaga 공작의 법원 신학자로 초대되어 이 시기에 수학과 히브리어를 공부했다. 그 후 1575 년 밀라노로 옮겨 그곳에서 성인이자 주교인 Charles Borromeo의 고문 역할을 하다가 베네치아의 Servite 수녀원의 철학교수로 재직한다. 

    27세 때 사르피는 수도회 관구장으로 임명되어 단호하지만 현명하고 분별 있는 지도자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는 로마를 몇 차례 방문해 교황 식스투스 5세 및 유명한 신학자 로베르토 벨라르미네와 친해졌다. 그는 해부학 연구를 계속해 피의 흐름을 원활히 해주는 혈관 판막을 발견했고, 눈동자가 빛의 작용으로 팽창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입증했다.

    그는 친구가 많았으며 그중에는 갈릴레오도 있었다. 갈릴레오는 사르피를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수학자라고 생각했고 사르피는 로마 당국이 천문학자 갈릴레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을 비난하면서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면, 갈릴레오가 당한 수모와 위대한 인물에 대한 부당한 처사를 개탄하는 날이 올 것을 나는 확신한다"라고 말했다.

     

    스페인 지배 시기, 세속적 권한은 크게 쇠퇴하였으나 교황의 종교적 영향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피우스 5세부터 클레멘스 8세까지 16세기 후반의 교황들은 트리엔트 공의회의 의결사항이 가톨릭 지역에서 효과적으로 실행되도록 하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베네치아 공화국은 여기에 찬성하지 않았다. 

    1605년 파울루스 5세가 취임하면서 교황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된다. 1606 베네치아 정부에 의해 법률 위반으로 기소된 명의 성직자가 베네치아 공화국의 세속재판소에 회부되어 유죄를 선고받았던 것이다. 이때 파울루스 5세는 사제가 세속법에 의해 처벌받는 일은 성직자의 면책특권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며 교회로 인도할 것을 요구했다. 

    이때 베네치아 공화국의 입장을 변호한 것이 교회 법학자 사르피였다. 

     

    그는 역사적, 신학적, 그리고 법률적인 차원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할권 분리를 주장하는 문서를 작성했고, 1606년 파울루스 5세가 내린 성무 금지령에 굴하지 않고 맞설 것을 촉구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파올로 사르피의 주장을 파울루스 5세에게 제출했고 공화국 정부의 방침을 따르지 않는 모든 성직자들을 추방해버렸다. 결국 이 문제는 이듬해는 1607년 프랑스와 스페인이 중재에 나서며 해결되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다. 공화국 정부는 가톨릭 신앙을 지켜나갈 것을 선언하는 동시에 파울루스 5세가 문제시했던 법률의 폐지를 거부하였고 결국 파울루스 5세는 성무 금지령을 철회했다. 2
    이후 파올로 사르피는 공화국의 영웅이 된 동시에 교황 파울루스 5세의 표적이 되었다. 파울루스 5세는 눈엣가시와 같은 사르피를 로마로 불러들여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여의치 않자 자객을 고용하였다. 사르피는 자객의 습격을 받아 15회나 칼에 찔리는 자상을 입었지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후 사르피는 은거하여 자신의 사상을 글로 남기는 일에 몰두했는데, 이리하여 1619년 드디어 기념비적인 저작 <트리엔트 공의회의 역사>가 세상에 나오게 된다. 피에트로 소아베 폴라노라는 필명으로 런던에서 출판된 이 저작에서 사르피는 1차 사료에 근거하여 레오 10세부터 트리엔트 공의회의 마지막 회기까지의 교회사를 상세하게 재구성하였다. 사르피가 보기에 트리엔트 공의회는 신성함이나 경건함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교회사에서 가장 타락하고 수치스러운 순간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2
    트리엔트 공의회의 역사는 17세기 이탈리아의 정교분리주의를 상징하는 저작으로 유럽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개신교가 확산되어 있던 알프스 이북에서 반가톨릭 감정을 고무시키는데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17세기의 자유사상가들과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의 교회비판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사르피는 결국 파문당했지만 끝까지 미사를 집전하고 논문을 작성하거나 작곡을 하며 여생을 평화롭게 보냈다.

    그의 마지막 말은 "Esto perpetua (may it endure forever)" 로, 미국 아이다호 주 모토로 쓰이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많은 나라에서 인용되고 있다.

     

     

     

    1 [Daum백과] 사르피  다음백과, Daum

    2 이탈리아 역사 다이제스트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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