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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
    이.탈.리.아 역사/이탈리아가낳은인물 titani 2020. 12. 12. 10:30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이탈리아어: Cristoforo Colombo 크리스토포로 콜롬보), 1450-1506, 제노바 출신

     

     

     

     

     

    콜럼버스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가 북부 이탈리아 제노아 공화국에서 직조공으로 일하던 아버지 도메니코 콜롬보와 유대인 어머니 수산나 폰타나로사 사이의 다섯 아이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모국어로 리구리아 지방 방언을 사용했다는데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광범위한 동의가 이루어져 있다.

    열네 살 때 처음 항해에 나갔던 그는 1474년과 1475년 무렵에는 에게 해의 키오스 섬에 유향을 사러 가는 항해에 참가했고, 1476년 5월에는 플랑드르로 향하는 상선대에 참여했다. 그다음 해인 1477년 초에는 잉글랜드, 1478년에는 마데이라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행 때문에 그는 미지의 바다에 흥미를 느끼고 라틴어와 스페인어를 배우고, 각종 세계 지리서를 섭렵했다.

    1477 년부터 1485 년까지 리스본에 거주했는데, 그가 포르투갈로 간 것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의 영향으로 값비싼 후추가 생산되는 인도와 황금이 있는 ‘지팡구(일본)’를 발견하려는 열망 때문이었다. 당시 후추는 육류를 저장하기 위한 필수적인 첨가물로 고가에 거래되고 있었다. 

    콜럼버스는 1478년 포르투갈에서 이탈리아 명문가의 딸과 결혼식을 올렸고, 그녀는 콜럼버스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상류사회에 진출하는 발판이 되었다.

    1482 년부터 서 아프리카의 기니Guinea와 골드 코스트를 따라 무역을 하던 그는 마르코 폴로와는 달리 육로를 통하지 않고 바다를 통해 인도로 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서쪽으로 계속해서 나아가면 인도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1484년 포르투갈의 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희망봉 항로를 준비 중이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에스파냐로 건너갔다. 에스파냐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 1세는 해외 진출에 관심이 많았지만, 처음에는 무리한 조건을 제시하는 콜럼부스의 제안을 거부했다.

     

     

    Christopher Columbus requesting support from Isabella I and Ferdinand II of Spain

     

     


    그러나 이사벨 여왕은 신항로 개척이 나라의 미래에 큰 도움이 될것이라고 생각했고, 이 때문에 결국 콜럼버스의 탐험 계획과 요구를 스페인 학자층과 정부 부처가 격렬히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여왕은 콜럼버스를 해군 제독에 임명하고, 그가 발견하는 것의 10퍼센트를 콜럼버스의 소유로 한다는 조건하에 선박을 내주고 승무원 모집에도 협력해주었다.

     

     

     

    Illustration depicting Christopher Columbus's fleet departing from Spain in 1492

     

     



    1492년 8월 3일, 기함 산타마리아호, 핀타 호, 니나 호 3척에 선원 120명을 태우고 스페인의 파로스 항을 출발했다. 승선한 인원 중에는 국왕이 파견한 기록원, 의사, 성직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선원들의 대부분은 위험한 모험을 택한 죄수들이었다. 카나리아 제도에 정박한 후 9월 6일에 고메라 섬을 떠나 계속 서쪽으로 항해하다가 10월 12일에는 바하마 제도의 한 섬에 도착했다.

    콜럼버스는 인도의 한 부분에 도착한 것으로 확신하고 신에게 감사의 뜻을 표시하기 위해 이 섬을 '성스러운 구제자'라는 뜻의 산살바도르 섬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원주민인 인디오들로부터 황금과 향신료가 나는 땅에 대한 정보를 얻어 쿠바에서부터 히스파니올라 섬까지 항해했다.

    제1차 항해 후 1493년 3월에 귀국하여 왕 부부로부터 ‘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되었다. 제1차 항해로 아메리카에서 가져온 금제품이 전 유럽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콜럼버스의 달걀’이란 일화도 생겨났다. 

     

     

     

    The return of Christopher Columbus, by Eugène Delacroix

     

     

     

    제2차 항해(1493년 9월 24일)는 17척의 배와 1,200명의 대선단이었는데, 그의 선전에 따라 금을 캐러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히스파니올라에 남겨 두었던 식민지 개척자는 인디오의 저항으로 전멸해 버렸으나, 콜럼버스는 이곳에 식민지 행정관으로서 이사벨라 시를 건설하는 한편, 토지를 스페인인 경영자에게 분할해 주고 인디언에게는 공납(貢納)과 부역(경작과 금 채굴)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금의 산출량이 보잘것없자, 그들은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대·살육하였으며 노예화하였다. 이 항해에서 스페인으로 보낸 산물은 주로 노예였으며, 이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오자(1496년) 문책당하였다.

    제3차 항해(1498 ~ 1500)도중, 히스파니올라에서의 내부 반란으로 그의 행정적 무능이 문제시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1502년 니콜라스 데 오반도가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된 후 마지막으로 네 번째 항해를 떠났지만 아무런 수확도 없이 귀국했다(1504년). 이 항해로 인해 그는 급속히 건강이 나빠졌고 1506년 5월 21일 바야돌리드에서 자신이 발견한 섬들이 아시아의 일부라고 믿은 채 죽었다.

    콜럼버스의 시신은 스페인 세비야에 묻혔으며, 1542년 히스파니올라의 산토도밍고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내용 출처> 

    [Daum백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미스터리와 진실, 인물편, 이종호, 북카라반

    [Daum백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김상엽,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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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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