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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비극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8. 20. 15:40

     

    이제 아마도 가장 오래된 장르인 신비극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탈리아의 신비극은 대체로 나머지 유럽 지역의 신비극과 비슷하였다. 이탈리아에서도 공공 광장이나 교회나 수도원 안뜰에 거대한 시설이 만들어졌다. 이 시설은 맨 위에는 문을 닫을 수 있는 천국을, 맨 아래는 지옥을 포함하고 있으며, 가운데에 본 무대가 만들어지는데 그것은 무대가 되는 지상 공간들을 모두 나란히 늘어놓은 것이다. 성서극 아니면 설화극은 여기서도 드물지 않게 신학적인 담화로 시작되곤 하였다. 

    사도, 교부, 예언자, 여자 예언자, 미덕 등이 나누는 대화였다. 그리고 연극은 각기 상황에 따라 다른 춤으로 끝을 맺었다.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절반은 희극적인 막간극들이 이탈리아에서도 빠지지 않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이런 요소들이 북유럽에서처럼 거칠지는 않았다. 물론 시에나의 어떤 교회에서 공연된 베들레헴 어린이 학살에 관한 신비극은 불행한 어머니들이 서로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것으로 끝을 맺기도 했지만. 

    등장 인물들이 인공적인 기계를 타고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것은 가장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구경거리였는데, 이탈리아에서는 다른 어느 곳보다 이 연습을 많이 했던 것 같다. 피렌체 사람들 사이에서는 14세기에 벌써 이런 것이 아주 능숙하게 행해지지 않으면 비웃는 말이 나왔다. 곧 이어서 부르넬레스코가 성 펠리체 광장의 수태고지 축제를 위해서, 천사 무리 두 그룹이 천구를 들어올리고, 거기서 가브리엘 천사가 아몬드 모양의 기계를 타고 날아 내려오도록 고안된 아주 솜씨 좋은 기계를 만들었다. 체카도 비슷한 축제들을 위해서 여러 가지 새로운 생각들과 기계들을 제공하였다. 공연을 후원하거나 일부는 직접 공연을 떠맡기도 했던 수도원들이나 시의 구역들은, 각기 부유함의 정도에 따라서 가능한 온갖 기술을 다 동원하였다. 영주들의 축제에서도 세속적인 연극이나 팬터마임 이외에 신비극들이 공연될 경우에는, 마찬가지로 엄청난 비용을 들였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페라라 등지를 통치하던 피에트로 리아리오의 궁정은 생각할 수 있는 온갖 화려함을 다 동원하였다. 배우들의 무대에서의 재능과 부유한 의상, 잎 장식과 양탄자 등 당시 건축술의 이상적인 장식을 통해서 묘사된 장소들, 그리고 전체 배경이 되는 대도시 광장의 화려한 건축물들, 아니면 궁전이나 수도원 뜰의 밝은 기둥 홀들, 이 모든 것들을 떠올려보면 정말 대단히 화려한 그림이 나타난다. 

     

    Polo Uccello, The Miracle of the Desecrated Host / 1467 ~ 1469

     

    그러나 세속적인 연극이 바로 이와 같은 장비들을 통해서 오히려 손상을 입었듯이 신비극이 더 높은 시적 단계로 발전하는 것도 이런 엄청난 구경거리에 밀려서 방해를 받았다. 현재 전해지는 신비극 텍스트들을 보면 몇 개의 아름다운 시와 수사적 구절들을 가진 매우 엉성한 구조의 드라마를 볼 수 있을 뿐, 칼데른의 <성사극>이 보여주는 것 같은 위대한 상징적 도약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때때로 더 작은 도시들에서, 더 빈약한 장비들만 있었을 경우에 사람들 마음에 종교극의 효과가 훨씬 더 강렬했던 것 같다. 제6부에서 다루게 될 저 위대한 참회설교자의 한 사람인 로베르토 다 레체는 1448년 페스트가 유행하던 시기에 페루자에서, 일련의 사순절 설교들의 마지막을 예수 수난 공연으로 끝맺음하였다. 배우들은 겨우 몇 사람뿐이었지만, 거기 모인 구경꾼들은 큰 소리로 울었다. 물론 그런 경우에는 가장 가혹한 현실의 영역에서 나온 감동 수단이 동원되는 법이기는 하다. 그리스도로 분장한 작가가 길다란 붉은 줄로 뒤덮여서, 옆구리 상처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모습으로 등장했다면, 그것은 마테오 다 시에나의 그림들과 귀도 마쪼니의 점토 그룹상 등을 연상시키는 방식이었다.

    큰 종교 축제나 영주들의 결혼식말고도 신비극을 공연할 특별한 기회들은 여러 종류가 있었다. 예를 들면 교황이 베르나르디노 다 시에나를 성자로 선언했을 때(1450), 시에나의 큰 광장에서는 그의 시성식을 극적으로 재현하였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에게 음식이 제공되었다. 또 어떤 학자 수도사는 자신이 신학박사 학위를 받게 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도시 성자의 전설을 공연하였다. 샤를 8세가 이탈리아로 오자 미망인이 된 사부아의 여공장 블랑카가 토리노에서 일종의 반半 종교적인 팬터마임 공연으로 그를 맞아 들였다. 우선 목동극 장면인 <자연의 법칙>이 다음에는 교부들의 행렬<은총의 법칙>이 공연되었다. 이어서 호수의 기사 랜슬롯 이야기와 아테네 이야기가 뒤따랐다. 왕이 키에리에 도착하자 다시 팬터마임이 공연되었는데, 그것은 출산 후 조리 중인 여인이 고귀한 방문을 받은 것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회 축제가 최상의 노력을 기울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체축일 축제였다. 에스파냐의 저 특수한 문학 장르<성사극>은 바로 이 날의 공연을 위한 것이었다.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피우스 2세가 1462년에 비테르보에서 거행한 성체축일 축제에 대한 묘사가 있다. 행렬은 성 프란체스코 교회 앞에 있는 거대한 축제 천막에서 출발하여 주요 거리를 통과해서 대성당 광장으로 향했다. 행렬 자체는 이 축제에서 특별히 두드러지는 것이 아니었다. 추기경들과 부유한 성직자들은 각기 자기들끼리 통과하는 거리의 구간을 나누었다. 길가에는 햇빛을 가리는 차양, 담벽에는 벽걸이 장식, 화환 등이 내걸렸고, 각기 독자적인 무대 장치를 세웠다. 이 무대에서는 행렬이 지나가는 동안 짧은 역사극과 알레고리글들이 공연되었다. 남아 있는 보고들만 보아서는 모든 공연에 사람들이 출연했는지 아니면 옷을 입힌 인형을 이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들었다. 거기서는 다음과 같은 장면들을 볼 수 있었다. 노래하는 천사 소년들 사이로 수난을 당하는 예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모습이 들어간 최후의 만찬, 대천사 미카엘이 악마들과 벌이는 싸움, 포도주의 분수와 천사들의 오케스트라, 그리스도의 무덤과 부활, 마지막으로 대성당 광장에는 성모 마리아의 무덤이 미사와 축복을 위해 열려 있었다. 천사들에 의해서 성모는 노래하며 천국으로 들어올려지고, 그곳에서 그리스도는 성모에게 관을 씌우고 영원한 아버지에게 안내한다.

    행렬이 지나가는 큰 길가에서 벌어진 장면들 중에서는 추기경이며 부 재상인 로데리고 보르지아 - 뒷날의 교황 알렉산드로 6세 - 의 공연이 화려함과 미심쩍은 알레고리로 특별한 주목을 끌었다. 그 밖에도 당시 처음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축포도 등장하였다. 

    그리스에서 얻은 성 안드레아스의 유골을 모시고, 같은 해 로마에서 거행된 축제 행렬에 대해 피우스 2세는 훨씬 더 짤막하게 언급해놓았다. 여기서도 로데리고 보르자는 특별한 화려함으로 눈에 띄었다. 그 밖에 이 축제는 세속적인 요소를 보였다. 다른 때도 언제나 빠지지 않던, 음악을 연주하는 천사들말고 다른 가면들, 즉 '강한 남자들'도 등장하였다. 그들은 헤라클레스 무리였는데, 아마 온갖 체조 기술을 다 보여주었던 모양이다. 

    순수하게 세속적인 혹은 세속적 색채가 짙은 공연들, 특히 대영주들의 궁정에서 벌어지는 공연들은 본질적으로 화려한 구경거리를 제공하려는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그 개별적인 요소들은 신화적이고 알레고리적인 맥락을 가졌다. 어쨌든 그런 특성들은 알아보기 쉬웠다. 바로크적 요소도 빠지지 않았다. 거대한 동물의 형상에서 갑작스럽게 가면을 쓴 무리가 뛰쳐나왔다. 예를 들면 시에나에서 영주를 맞아들이는 공연 같은 것이었다. 황금으로 된 암늑대에서 열두 명으로 구성된 발레단이 뛰쳐나왔다. 살아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식탁 장식대는 부르고뉴 공작의 공연 때처럼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것은 예술적이고 시적인 특성을 지녔다. 페라라 궁정에서 연극과 팬터마임이 뒤섞인 것에 대해서는 앞에서 문학을 다룰 때 이미 언급하였다. 추기경 피에트로 리아리오가 1473년에 로마에서 베풀었던 축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이었다. 그것은 페라라의 에르콜레 왕자의 신부로 결정된 아라곤 가문의 리아노라가 통과하는 길에 거행된 것이다. 여기서 원래의 연극들은 종교적인 내용을 가진 신비극들뿐이었다. 그에 반해서 팬터마임들은 신화적인 내용이었다. 동물들과 함께 있는 오르페우스,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용들이 이끄는 케레스, 표범들이 이끄는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그리고 아킬레우스의 교육 등이다 이어서 옛날부터 유명한 연인들과 요정들의 발레, 이것은 도둑인 켄타우루스의 기습으로 중단되고, 헤라클레스가 켄타우루스를 물리치며 뒤쫓아간다. 작은 요소지만 당시 형식 감각에 비추어볼 때 특이한 것은 다음 요소들이다. 모든 축제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조각상으로 분장하고 벽감 속이나 기둥 옆, 개선 아치 옆에 서 있다가 갑자기 노래와 낭송해서 살아있는 존재임을 입증하곤 하였다. 그들은 어쨌든 잘 어울리는 색갈과 옷차림으로 그렇게 했다. 리아리오의 홀에서 살아있는 다른 입상들 사이에서 완전히 금색으로 칠한 어린이가 분수에서 물을 퍼서 사방으로 뿌리는 일을 맡았다. 

    이런 종류의 팬터마임들 중에서 또 다른 화려한 것은 안니발레 벤티볼리오와 에스테 가문의 루크레치아의 결혼식 때 공연된 것이다. 오케스트라 대신 코러스가 노래를 하는 동안 처녀신 디아나의 요정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요정이 신부를 안내하는 유노 여신에게로 날아 올라간다. 사자, 여기서는 사자 가면을 뒤집어쓴 인간을 거느린 베누스 여신은 사나운 남자들이 추는 춤 사이로 이리저리 움직일 뿐이다. 여기서 무대 장식은 자연의 숲과 아주 똑같아 보였다.

     

    보르소 궁전의 행렬 <베누스의 승리> Francesco del Cossa, 1470

     

    1491년 베네치아에서는 에스테 가문의 리아노라와 베아트리체 공주가 도착한 것을 총독의 배인 부친토로Bucintoro로 영접하고 보트 경주와 총독 궁전에서 공연된 화려한 팬터마임으로 축하하였다. 밀라노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공작과 다른 권력자들의 축제를 지휘하였다. 브루넬레스코의 기계들과 겨룰만한 그의 기계 장치들 중에 어떤 것은 어마어마한 크기로 움직이는 천체구조를 표현한 것도 있었다. 행성 하나가 젊은 공작의 신부인 이사벨라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그에 해당하는 신이 천구에서 뛰쳐나와 궁정시인 벨린치오니가 지은 시들을 노래하였다.(1489). 또 다른 축제에서는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기마상 모델이 요새 앞 광장의 개선문 아치 아래서 많은 사람들 사이에 모습을 보였다. 바사리는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의 영주로 오는 프랑스왕들을 환영하기 위해 얼마나 훌륭한 자동 기계들을 만들었는가를 더욱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도시들에서도 때로는 대단한 노력이 집중되었다. 보르소 공작이 1453년에 영접을 받기 위해 레지오에 갔을 때, 성문에서 시민들은 하나의 커다란 자동 기계로 그를 영접하였다. 자동 기계에는 시의 수호 성인인 성 프로스페로가 천사들이 받치는 천개 아래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아래에는 스스로 돌아가는 판 위에 여덟 명의 음악 천사들이 음악을 연주하는 데, 그들 중 두 명이 성인에게서 도시의 열쇠와 왕홀을 받아서 공작에게 전해주었다. 그 대음에 감추어진 말들에 이끌린 무대가 나타났다. 무대 위에는 텅빈 옥좌가 있고, 옥좌 뒤쪽에는 정의의 여신이 정령을 거느리고 서 있고, 네 귀퉁이에는 네 병의 늙은 입법자들이 다시 깃발을 든 여섯 명의 천사에 둘러싸여 서 있었다. 여신과 정령이 환영 인사를 하면서 공작을 옥좌 위로 이끌어갔다. 두 번째 마차는 일각수가 끄는 것 처럼 보였는데, 그 마차는 불타는 횃불을 든 카리타스를 싣고 있었다. 무대와 마차 사이로 감추어진 사람들이 앞으로 밀고 가는 배 모양의 차가 만들어낸 고대식의 즐거움도 빼놓을 수는 없으리라. 이 차와 두 개의 알레고리들이 공작에 앞서 나가다가 성 피에트로 교회 앞에서 다시 멈추어 섰다. 성 베드로가 두 명의 천사와 함께 둥근 광채에 휩싸여 건물 전면에서 아래로 내려와 공작에게 오더니 그에게 월계관을 씌우고 다시 위로 올라갔다. 또 다른 순수하게 종교적인 알레고리는 성직자들이 마련한 것이었다. 두 개의 높은 기둥 위에 '우상 숭배'와 '믿음'이 서 있었다. 아름다운 소녀가 분장한 믿음이 인사말을 하자 다른 기둥은 거기 세워진 인형과 함께 무너져내렸다. 계속해서 '황제'가 일곱 명의 아름다운 여인들과 함께 서 있었다. 그는 보르소가 추구해야 할 일곱가지 미덕을 나타내는 이 여인들을 그에게 선물하였다...

    이제는 행렬 자체가 주요 행사인 축제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종교적인 축제행렬은 의심할 여지 없이 중세 초기부터 가장행렬이 되곤 하였다. 작은 천사들이 성사나 성스러운 그림들과 유품들을 나란히 동반해 가거가 아니면 수난의 인물들, 곧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 함께 처형될 죄인들, 군인들, 성녀들이 함께 행렬을 이루어 행진하였다. 아주 일찍부터 거대한 종교 축제는 도시의 축제 행렬과 결합되었다. 도시의 축제 행렬은 중세의 소박한 방식에 따라 세속적인 요소를 상당수 간직하고 있었다.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교에서 넘어온 배 모양의 차, 곧 '카루스 나발루스'였다. 그것은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극히 다양한 종류의 축제에 등장하곤 했던 것 같다. 특히 그 이름은 '카니발'이란 표현에 남게 되었다. 그런 배는 명랑하게 치장된 화려한 축제의 일부로서 원래 의미는 알지도 못하는 구경꾼들을 즐겁게 하였다. 예를 들어 잉글랜드의 이사벨라가 신랑인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함게 퀼른에 도착했을 때 감추어진 말들이 끄는 수많은 배 모양의 차들이 음악을 연주하는 성직자들을 싣고 그녀를 향하여 다가 왔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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