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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이.탈.리.아 역사/이탈리아가낳은인물 titani 2020. 2. 23. 21:01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 - 1472 

    «Ci è un uomo che per la sua universalità parrebbe volesse abbracciarlo tutto, dico Leon Battista Alberti, pittore, architetto, poeta, erudito, filosofo e letterato» - Francesco de Sanctis

    여기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 같은 남자가 있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화가, 조각가, 시인, 지성인, 철학자, 문학가 - 데 상티스

     

     

    레온 바티스타는 1404년 제노바에서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이자 은행가였던 로렌조 알베르티와(1388년 정치적인 이유로 토스카나에서 추방되었다) 제노바 유수의 귀족 가문 비앙카 피에스키 사이에서 태어났다. 

    초기에는 베네치아와 파도바에서 일종의 문학 수업을 받았는데,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치던 인문주의 학교였다. 이후 볼로냐 대학에서 법학 수업을 받았으나 그는 이곳에서 음악, 회화, 조각, 수학, 문법, 문학 등 그가 일생을 사랑한 예술적 훈련도 받게 된다. 일찍부터 문학활동에 전념했던 그는 20세 즈음에는 라틴어로 자전적인 희극 Philodoxeos fabula, 매우 독창적이고 매혹적인 신화 소설 Momus, 이탈리아어로 Intercoenales, 대화 형식의 중요한 시리즈 De familia, Theogenius, Profugiorum ab ærumna libri, Cena familiaris, De iciarchia, 그리고 다른 아마추어 저작들을 썼다. 

    1421년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알베르티는 몇 년 간 자신에게 유산을 넘겨 주지 않으려는 친척들 때문에 곤경에 처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과학, 천문학, 수학에 전념한다. 경제적 어려움과 건강상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1428년 대학을 졸업한다. 파도바와 볼로냐를 오가며 많은 중요한 지식인들과 우정을 쌓게 되는데 그중에는 파올로 달 포쪼 토스카넬리, 후에 교황 니콜로 5세가 되는 토마소 파렌투첼리도 있었다. 

    1428-1431년 사이의 일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Roma

    1431년 파트리아르카 디 그라도patriarca di Grado의 비서가 되어 로마로 옮겨간 알베르티가 1432년 부터 교황청의 법률 초안을 전담하는 일종의 비서관으로 일하게 되면서 에우제니오 4세 교황청의 인문주의적 환경에 들어서게 된다. 이후 주로 로마에 살면서 페라라, 볼로냐, 베네치아, 피렌체, 만토바, 리미니, 나폴리 등으로 장소를 옮겨 지내곤 했다. 

    초기 문학작품

    1433년에서 1434년 사이에 이탈리아어로 de Familia  세 권, 1437년에 제 4권을 마쳤다. 1421년 파도바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알베르티 가족, 실제 인물 등이 등장하는데, 서로 다른 두 개의 시각 - 근대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정신과 과거에 연결되어 있는 귀족적이고 전통적인 정신이 끊임없이 대립한다. 이 작품은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 그리고 그 시대의 사회 제도를 분석한다. 결혼생활, 가족, 교육, 경제 관리, 우정, 일반 사회적인 관계 등. 알베르티는 여기서 그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도덕성과 인간은 자신의 운명에 책임이 있다는 확신, 그리고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덕la virtù은 생산활동, 의지, 이성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전적으로 인문주의적인 "철학적" 관점을 표현하고 있다.

    피렌체

    1434~1443년에 알베르티는 주로 피렌체와 페라라에서 지냈다. 교황청 업무에 이어 무엇보다도 라틴 교회와 기독교-동방 교회, 특히 그리스 교회를 화해시키려는 에큐메니칼 의회 (1438-39)의에 참여하였다. 이 시기에 알베르티는 피렌체 문화에 동화되었다. 피렌체의 예술적이고 지적인 환경에 들어가려고 노력했고 소박하나마 성공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시기에 시각예술에 대한 관심이 탄생한 것 같다. 이 관심은 라틴어와 이탈리아어로 쓴 <회화론 1435-36>으로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이탈리어어 버전 프롤로그에는 이 책을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마사치오, 델라 롭비아 같은 동시대 혁신자들에게 바친다고 쓰고있다. 

    1443년 즈음 교황 에우제니오 4세를 따라 피렌체를 떠났지만 이 도시와의 밀접한 교류는 계속되었다. 

    회화론De pictura

    1435 - 1436 처음에는 라틴어로 회화론을 집필한 후, 자신이 이탈리아어로 번역한다; 라틴어가 훨씬 풍부하고 중요한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라틴어 버전은 만토바의 곤자가 백작에게, 이탈리아어 버전은 부르넬레스키에게 헌정된 <회화론>은 기법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고 이론적이고 문화적인 연구까지 다룬 최초의 예술 교육서 였다, 피렌체라는 특수한 환경과 인문학과 예술에 정통한 지식인 알베르티가 아니면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알베르티의 원근법 다이아그램

     

    이탈리아어

    라틴어의 문화적 가치와 전문적 표현 특성들에 익숙했던 알베르티는 비록 다수의 라틴어 저작물을 남겼으나, 볼가레volgare(속된 언어) 라고 칭해지던 이탈리아어의 열광적인 수호자였다.

    두 언어로 쓰인 <회화론>은 모든 학문에 이탈리아어 사용이 가능한가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던 당대 인문학자들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피렌체에서 있었던 인문주의자들의 토론에서 알베르티의 직계 후학으로 인정되고 있는 플라비오 비욘도가 최초의 이탈리아어 문법(1437-41)을 포함하는 우수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학문을 옹호했다. 이 토론회로부터 비롯되어 1441년, 우정을 주제로하는 이탈리아어 시 경연대회 Certame coronario알베르티 주관으로 개최된다.

    로마 귀환

    1443년 피렌체 생활을 끝내고 로마로 돌아온 34세의 알베르티는 이전의 교황청 공직을 1464년까지 계속한다. 로마에 머무는 동안 자신의 건축에 대한 관심을 심화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관심은 붕괴된 고대 로마 유적지에 관한 연구로 이어지며 1450년경, 역사상 처음으로 극좌표와 방사상 좌표계를 사용하여 고대 로마 지형을 재구성할 수 있었던 <로마 서술Descriptio urbis Romae >을 남기게 된다. 건축이 알베르티 생애 말년의 20년 동안의 과업이 되는데, 그 기간에도 훌륭한 문학 작품 집필은 계속되었다. 1443년 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회와 인간에 대해 매우 냉소적이고 현실적인 Momus 라는 풍자소설을 썼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니콜로 5세의 취임 이후 알베르티는 교황 측근 그룹에 속하게 되어,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논란이 된 니콜로 5세와의 광범위한 도시 재생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1450년을 전후해서 알베르티는 로마 뿐 아니라 피렌체, 리미니, 만토바 등의 도시들의 수많은 건축 프로젝트에 더욱 활발하게 참여하게 된다. 이렇듯 알베르티는 15세기 후반 건축에 있어 중요한 설계자-컨설턴트 였는데, 니콜로 5세 휘하에서 진행된 산타 마리아 마조레, 산 스테파노 로톤도 성당의 복원, 팔라쪼 베네치아의 건설, 바실리카 산 피에트로의 갱신 등의 작업에서 알베르티의 컨설팅과 직접적 영향이 막대해서 사실상 이 두 가지를 뚜렷하게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건축술 De re ædificatoria 

    레오넬로 데스테Leonello d'Este의 의뢰에 의해 씌어진 <건축술>은 10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450년 경 알베르티가 로마에 길게 거주하던 시기에  완성되었다. 건설 기술에 대한 가장 중요한 논문 중에 하나로 인정 받고 있다. 1452년 출판본은 교황 니콜로 5세에게 헌정되었다.

     

    일생동안 알베르티의 변함없는 관심은 예술의 이론적이거나 실용적인 규칙을 찾는 것이었다. <조각론>에서는 인체의 비례를, <회화론>에서는 과학적 원근법을, 1472년 죽음에 이르기까지 쓰고 있던 <건축론>에서는 근대 건축의 모든 사례에 대해 설명했으며, 프로젝트의 중요성과, 기능에 따라 다른 유형의 건물을 강조했다. 그 작품들은 그에게 세기를 거듭해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부여하였고, 국제적 명성을 가진 예술가들의 연구 모티브가 되었다.

    건축가로서는 브루넬레스키와 함께 르네상스 건축의 창립자로 인정받고 있다.

     

     

    about 알베르티 

    예술가들의 자기평가와 예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알베르티의 저작이다. 그의 저작은 학문과 미술과 시의 종합이며, 그의 예술이론은 르네상스 미술의 토대가 되었다. 알베르티의 예술이론은 조각, 회화, 건축이라는 다양한 장르를 똑같이 포괄하고 있으며, 그 자신 이 모든 장르에서 뛰어난 예술가였다. 1464년 이전에 논문 <조각에 관하여>가, 1436년경에 <회화에 관하여>가, 그리고 그이 사후 얼마 되지 않아 1443년과 1452년 사이에 <건축에 관한 10권의 저서>가 출간되었다. 알베르티의 저작들에서 실천과 이론은 강령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마치 고대 로마의 건축물이 전범으로 간주되듯이, 토대로서의 실천과 이론은 그에게서도 또한 몇가지 변형을 거친 채로 비트루비우스나 플루타르코스 같은 고대의 저술가들에게 종속되어 있다. 물론 어떤 특정한 면에서 알베르티의 미에 대한 정의는 그 전형이었던 비트루비우스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시대정신에 상응하고 있다. "미는 일종의 조화, 즉 부분들의 전체로서의 조화이다. 미가 가장 완전하고 고차적인 자연법칙인 균제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전체는 특정한 수와 특수한 관계와 배열을 따라 성립된다. " 에 대한 <향연>에 나타난 단테의 미에 대한 정의 또한 알베르티의 예술파악에서 갱신된 형식으로 나타난다. 알베르티의 중요한 저작은 고대와 중세의 예술 표상들을 종합했으며 하나의 새로운 차원을 창조했던 바, 그 차원은 앞으로 도래할 16,17세기의 발전을 위해 중요한 것이었다. 새로운 예술이론 안에 미적 영역을 통합한 것은 알베르티의 업적이다. 예술에 대한 그의 판단 범주들과 함께 완전히 변화된 예술가들의 지위는 예술의 새로운 발전에서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1

    아카데미 교육의 기초를 이루는 과학적 예술관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와 더불어 시작된다. 그는 최초로 수학이 예술과 학문의 공통적인 근본이라는 견해를 표명했는데, 그 이유는 비례의 학설과 원근법 이론이 모두 수학에 속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마사치오와 우첼로 이래 이미 이루어졌던 실험적인 기술자와 관찰하는 예술가 사이의 일체화도 그에 의 해 최초로 명백히 표현되었다. 이들 기술자와 예술가는 모두 세계를 경험이라는 형태로 파악해서 이러한 경험에서 합리적인 법칙을 추출하려고 했고, 양자 모두 자연을 인식하고 지배하고자 했으며, 무엇을 만든다는 행위에 해당하는 행위를 통해 순전히 관조적이고 스콜라 철학적, 사변적 테두리에 묶여있던 대학교수들과 구분되었다. 2

    고전주의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모든 부분의 조화'라는 미에 대한 규정은 이미 알베르티에게서 공식화되었던 것이다. 그는 예술작품이란 전체의 미를 훼손하지 않고서 전체 작품에서 한 부분을 떼어낼 수도 없고 무엇을 첨가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알베르티가 비트루비우스에서 발견했고 실제로는 아리스토텔레스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런 생각은 고전주의 예술이론의 기본 명제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2 

     

    인물소개:

    알베르티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36XX51400009

    작품 : https://it.wikipedia.org/wiki/Leon_Battista_Alberti

     

    출처> 위키백과/다음백과

            1   예술이론의 역사 / 우도 쿨터만 

            2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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