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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네상스의 배경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2. 11. 16:11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유럽이 일찍부터 문화적으로 동양을 앞서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특히 그리이스나 로마 의 찬란한 문화를 이어받은 중세 유럽의 문화가 같은 시대 동양의 문화에 비해 훨씬 더 앞서고 있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많은 학자들이 밝히고 있듯이 유럽의 중세가 암흑 시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일부 유럽 역사가들이 중세를 문명의 시대로 말하고 있는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 왜냐하면 당시의 아라비아나 비잔틴 제국에 비하면 중세기 유럽 문화는 많이 뒤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뒤떨어져 있던 것은 문화 만이 아니었다. 도덕도 그만큼 저열한 상태였다. 그 무렵 가장 진보해 있었던 곳이 아라비아 제국이고, 중세 유럽의 십자군(1096~1270)은 그 문명 세계를 약탈, 정복하러 나선 야만 상태의 오합지졸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유럽측의 약탈, 폭행 등은 말할 수 없이 가혹했고, 이런 상황은 소아시아, 이집트, 스페인에서 모두 마찬가지로 발생했다. 

     

    The Crusader period

     

     아라비아에서 유럽인들은 재물 이외에도 학문, 예술, 사상, 기술, 심지어는 상술까지 가져갔는데, 이것이 유럽사회의 진보를 재촉하게 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아라비아 숫자도 그 무렵 유럽이 약탈해갔던 것 중의 하나이다. 로마 숫자로는 덧셈도 뺄셈도 못한다. 아라비아 문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 나가지만 숫자만은 예외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 나가기 때문에 유럽인들의 습관에도 일치하고, 계산도 편리하다. 이 숫자와 계산방식을 가장 먼저 활용한 것이 이탈리아 상인들이다. 

     제노바나 베네치아에서는 이미 14세기에 복식 부기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아라비아 숫자를 뒤늦게 채용한 것은 로마 숫자 혹은 고대 로마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부가 복잡해지고 보니 아라비아 숫자를 채용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그때까지 주먹구구식이던 상업이 충분한 계획과 계산에 의해 수행되고, 이윤도 분명해지고, 경영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그때까지의 상태는 세 자리 덧셈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상인 중에서도 얼마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상인

    유럽 각지에서 도시들이 번영하고, 그것이 새로운 사회질서와 문화의 모태가 된 것은 대개 13세기의 일이다. 그 중심은 상인들이었다. 하지만 이 경우 상인이란 소매상이 아니라 주로 국가들 간의, 또는 대륙과 대륙(유럽과 아시아 북부, 아프리카 등) 사이의 대규모적 통상에 종사한 무역상을 가리킨다.  이 상인들은 현재의 상인들과는 개념이 다르다. 역사가들은 그 상인들을 <모험 상인>이라고 부른다. 그들의 거래 대상은 대체로 미지의 나라, 미지의 사람들 또는 그와 비슷한 상대였다. 그들에게 상품을 팔고 진귀한 것들을 사오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도중에, 혹은 목적지에 어떤 위험이나 재난이 있을 지 알 수 없었다. 강도나 해적의 습격도 있을 수 있고, 현지 관헌이나 영주의 횡포에 희생될 수도 있었다. 재난을 당하면 재화를 빼앗기는 건 물론 목숨을 잃거나 노예로 팔릴 수도 있었다. 거기에 바다의 암초, 태풍, 전염병 등 어떤 재앙도 무릅쓰고 먼 길을 떠나는, 말 그대로 모험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제각기 자기 하물 운반을 관장하고, 배에 의존할 때에는 그들 자신이 하주, 선주, 선장을 겸하였는데, 따라서 상인들은 스스로 천문, 기상에 대한 지식, 측량과 배 다루는 기술, 강도나 해적과 싸울 능력 등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상인들은 물가를 예상하거나 계산하는 상업능력은 물론 영주나 왕들을 상대하는 정치적 재능도 갖추어야 했고 동료나 선원등을 다루는 통솔력과 담력도 있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번영한 상인들의 세계가 유럽 사회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 보자. 그때까지 중세 유럽의 사회는 대체로 폐쇄되어 있었다. 귀족의 자녀는 귀족으로, 농민의 자녀는 농민, 직인의 자녀는 직인이 되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농민과 직인은 평생을 열심히 일해도 제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선대보다 잘 살지도 못했다. 그러나 도시와 상업의 발달은 개인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도 주고, 능력에 따라서는 거부도 귀족도 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하여 도시와 상업의 발달이 이 시대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꿈을 주었다. 이처럼 봉건사회가 붕괴되면서 인간의 의식과 문화에 큰 진보가 있었다. 이것이 르네상스이고, 이런 변화가 일어난 가장 큰 이유는 상인 세계의 번영이다. 그러므로, 상인 사회가 가장 먼저 번영했던 이탈리아에서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화려한 르네상스의 꽃이 피어나게 된 것이다.

     

    이탈리아 상인

    그렇다고 이 시대의 모든 상인들이 그렇게 모험적이었을 리는 없고, 프랑스의 약초도감이나 화가 지오토에 못지 않게 합리적이고, 타산적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14세기 피렌체의 지오바니 빌라니Giovanni Vilani 1275~1348라는 상인의 연대기야 말로, 그 시대 상인들의 합리적이고 구체적인 사고 방식을 대변 해주는 자료의 하나로 꼽힌다. 

     

     빌라니의 계산에 의하면 당시 피렌체의 인구는 빵의 소비량에 의해 약 9만명의로 추정되고 있다. 해마다 교회에서 세례받는 어린이가 5800~6000명, 남자 아이쪽이 300명 정도 더 많다. 어린이 중에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것이 8000~10000명, 여섯 개의 학교에서 산수를 공부하는 학생이 1000~1200명, 다른 학교 네 개에서 라틴어를 공부하는 학생이 약 600명, 병원의 침대가 1000 정도 였다. 피렌체의 주요 산업이던 모직물 생산업체가 약 200, 판매업자가 3만, 그 밖에도 교회, 수도원, 화폐, 식량배급, 소방대에 관한 것이 모두 숫자로 정리되어 있다. 

     

    상인군주

     14세기 말이 되자 상인들이 세력은 더욱 확대되어, 전형적인 상인의 역할을 벗어나는 거상들이 나타난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는 원래 약방을 운영했다. 가문의 문장에 여섯 개의 환약이 들어 있는 것은 그런 사연 때문이다. 그러다 14세기 후반 지오반니 디 비치가 금융업을 시작해서 로마 교황청을 비롯한 각지의 교회 및 독일 제후 등에게 융자해 주며 세력을 확장하고, 정치에도 관여해서 소시민의 세금을 삭감해 주어 환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메디치가 번영의 기초를 확립한 것은 그 뒤를 이은 코시모(1389~1464) 때의 일이다. 그는 부친 지오반니가 시작한 금융업의 규모를 확대, 부를 축적했으며 정계에는 부하를 비밀리에 풀어 놓고, 피렌체의 정치를 교묘하게 조종했다.

     

    Portrait of Cosimo de' Medici

     

     코시모의 재력과 명성이 높아지자 알비치 등의 반대파에서 전복을 꾀하고, 1433년 갑자기 코시모와 그 일당을 체포해버렸다. 이때 알비치 일당은 코시모 일당을 사형에 처하려 했지만 피렌체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아 국외추방으로 결정했다. 1년간 국외에 추방당했다가 피렌체에 돌아간 코시모는 돈으로 정부를 매수하고 시민의 환심을 사서 사실상의 지배자나 다름없이 행동하고 알비치 일파에게 복수했다.

     이 코시모의 시대에 피렌체는 영토를 확장하고, 당쟁을 수습해서 정치적 안정을 누리고, 경제적으로도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 뿐 아니라 코시모는 문화의 보호 장려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때마침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터어키의 손에 멸망(1453)하자 동로마의 학자들의 망명을 받아들여 후대하면서 플라톤 학원Platonic Academy을 설립해주기까지 했다. 이래서 고대 그리스 학문의 부흥에는 피렌체의 상인군주 코시모의 공헌이 지대했다.

     또 코시모는 학자 이외에도 건축가, 조각가, 화가, 인문주의자들에게까지 아낌없이 원조했다. 예를 들면 브루넬레스키Brunellschi 1377~1446, 미켈로초Michelozzo 1396~1472, 기베르티 Ghiberti 1378~1455, 루카 델라 로비아Luca della Robbia 1399?~1482, 만능의 천재로 알려진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1400?~1455,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1397~1475, 포지오 브랏치올리니Poggio Bracciolini1380~1459, 지안노초 마네티Giannozzo Manetti 등이 모두 코시모의 보호 아래 활동했다. 

     

    코시모가 죽은 것이 1464년, 피렌체 시민들은 <조국의 아버지 Pater patriae>라고 칭송했다.

     

    인물소개 :

    코시모 데 메디치 https://ko.wikipedia.org/wiki/코시모_데_메디치

     

     

    출처> 대세계사 8권 근대의 서곡 / 김성근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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