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년이라는 길고 긴 중세의 터널을 빠져나온
14세기가 스스로 " 혁신자 " 라는 자신의 롤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되는데는 지오또의 공헌이 컸다.
Crocefisso, 1296 -1300
템페라화, 578cm X 406cm ;
Firenze, Santa Maria Novella
동시대 문인 단테와 페트라르카, 보카치오의 지오또에 대한 언급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이
중세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그의 명성은 고대 그리스, 로마 거장들애 대한 찬미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지오또의 재능은 몹시도 탁월한 것으로, 그의 손끝이 닿으면 사소한 것도 자연이 된다 "
- 데카메론, 보카치오 [1]
그리스도의 수난 Compianto sul Cristo morto
1303 -1305;
프레스코화, 200 X 185cm;
Padova, Cappella degli Scrovegni
중세의 회화가 시공간의 배치에 있어 병렬적이고 개별적, 단편적이었다면
르네상스 회화의 특징은 관람자로 하여금 동시적인 관조가 가능하도록
전체가 하나의 통일체로서 예술적인 환영을 만들어 내는데 있다
-아르놀트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La cattura di Cristo e il bacio di Giuda
유다의 입맞춤으로 체포되는 예수
1303 -1305,
프레스코화,
Padova, Cappella degli Scrovegni
"Consegna delle verghe", 1304-06
"Corteo nunziale"
1304-06
"Matrimonio della Vergine",
1304-06
Presentation of Christ in the Temple
1310
Fresco
North transept, Low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
Raising of Lazarus (detail)
1320s
Fresco
Magdalene Chapel, Low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
The Hermit Zosimus Giving a Cloak to Magdalene
1320s
Fresco
Magdalene Chapel, Low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
Scenes from the Life of St John the Evangelist: 1. St John on Patmos
(detail)
1320
Fresco, width of detail 89 cm
Peruzzi Chapel, Santa Croce, Florence
Allegory of Poverty (detail)
c. 1330
Fresco
Low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
The Stefaneschi Triptych: St Peter Enthroned (detail)
c. 1330
Tempera on panel
Pinacoteca, Vatican
중세와 르네상스의 연대기적 분류 시점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도 이견이 많지만
대략 미술사에서는 지오또의 등장과 함께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 예술은 기독교 진리 전달의 보조수단 " 으로 인식하던 시대의 특성에 걸맞게
중세회화는
작가의 독자적 표현이라기 보다는 도상학적으로 아이콘화 된 인물과 사물을 아름답게 배열하는 것에 그치기 쉬웠던 것이다.
미술은 당시 예술로도 분류되지 못한 시기였으며
화가는 목공과 같은 장인으로 분류되어 일반적으로 그룹 작업을 했다.
따라서 개인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자신만의 스타일 - 혹은 표현 이라는 오늘날 예술가에게는 당연한 덕목들이
발현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이 모든 열악한 조건을 바꾸게 된 것이 지오또의 재능과 명성이었던 것이다.
피렌체 우피찌 미술관에 있는 지오또 석상
(1845)
Giovanni Dupré
(1817-1882),
지오또는 이딸리아에서 자연주의의 최초의 거장이다.
빌라니와 보까치오 그리고 바사리까지도 지오또의 충실한 자연묘사가 동시대에 끼친 엄청난 영향을 강조하고 있으며,
지오또의 예술양식을 그가 등장했을 당시 지배적이던 비잔띤풍 예술의 경직성 및 인위성과 대조하는데
이런 의견은 모두 충분한 근거를 가진다.
다만 우리는 지오또의 표현방법에서 볼 수있는 명료성, 단순성, 논리성, 정확성을 후에 나타나는 데욱 세부적이고
유희적인 자연주의와 비교하고 있을 뿐 지오또 이전에는 회화적 수단으로 전혀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을
그가 비로소 볼 수 있게 해주고 이야기 할 수 있게 해준, 사물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엄청난 회화기법상의 진보는 간과하고 있다.
우리는 그를 위대한 고전적인 화가로만 보지만 그는 실제로 무엇보다도 단순하고 이성적이고 냉철한 시민예술의 대가이며,
그의 고전성은 직접적인 인상을 정리 - 종합하고 현실을 합리화- 단순화한 데서 생겨난 것이지 결코
현실에서 유리된 이상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중략...
르네상스 예술가들 중에서 지오또는 어느 누구보다도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진실에 가깝게 묘사하려고 성실하게 노력했다.
뜨레첸또(1300년대) 예술을 끝까지 지배한 것은 이러한 지오또적 자연주의 였다.[2]
[1] 이탈리아 미술사 ll - Carlo Bertelli, Giuliano Briganti, Antonio Giuliano
[2] 문학가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Arnold Hau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