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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키아벨리 Niccolo Macchiavelli
    이.탈.리.아 역사/이탈리아가낳은인물 titani 2020. 2. 7. 14:37

     

    마키아벨리의 생애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469년 5월 3일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의 수도 피렌체에서 태어났으며 공화제 자유도시의 상층을 대표하는 시민으로 성장했다. 그의 부모는 피렌체 이름 있는 지방 귀족 가문 출신들이었으며, 특히 부친은 변호사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그의 유년기와 소년기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런 환경으로 미루어 보아, 그리고 생애 후기에 병약한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지식으로 남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특히 학문과 음악에 정진할 것을 당부한 것으로 보아 대체적으로 유복한 환경 속에서 면학에 힘쓰고 고상한 취미를 추구하는 전형적인 귀족의 장남으로 생활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탈리아 반도에서 가장 강한 도시국가이던 피렌체는 일대 변혁을 겪어야만 했다. 오랫동안 교황세력을 배경으로 피렌체를 통치하던 메디치 가문이 권력으로부터 축출당하였고 새로운 공화정이 실시되었다. 이 변혁의 해에 마키아벨리는 신생 피렌체 공화국의 제 2 서기국 서기로서 최초의 관리가 되었으며, 4년 후인 29세에 제 2 서기국 서기장으로 임명되어 1512년 메디치가가 피렌체 공화국을 무너뜨릴 때 까지 14년간 봉직하였다. 그동안 그는 공화국 특사로서 로마교황, 각국의 국왕 및 재상 등 수많은 권력자와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며, 피렌체의 정치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가 정치인들에게 충언을 하는, 이른바 브레인 트러스트의 영향력을 갖고 있었음에는 틀림 없으나 결코 군주론에 서술한대로 권모술수를 써서 남의 이목을 자극한 일은 없었던 것 같으며, 사실상 그만한 지위도 아니었다. 다만 권력자의 행태와 성쇠를 냉철하게 관찰할 수 있는 입장과 지위에 있었을 뿐이었다. 그 산물이 바로< 군주론 >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군주론을 세상에 내어놓게 된 것도 피렌체의 중대한 정치적 격동과 그것이 일신상에 미친 충격이 계기가 된 것으로, 줄리아노 메디치가 스페인군의 후원으로 독재 정권을 다시 잡게 됨에 따라, 마키아벨리가 관직에서 쫓겨나 시골로 은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듬해 메디치가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장 드 메디치의 암살음모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쓰고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며 교황청이 마련한 보석금으로 겨우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피렌체에서 추방 당했다. 그가 반역에 가담했다는 증거는 후세 마키아벨리 연구가들에 의해 혐의가 없음이 증명되었다. 사실 그는 그런 어마어마한 음모에 가담할만큼 야망가도 아니었고, 적극성도 없는 겁 많은 성격이었다. 메디치가에서 그처럼 냉혹한 학대를 받고도 옛 관직으로 돌아가기 위해 로렌쪼 메디치에게 군주론을 헌정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이다. 메디치는 그의 군주론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재능은 인정하여 7년이 지난 후 피렌체사의 집필을 위촉했다.

    1527년 6월 22일 향년 57세로 병사하기까지 산 카시아노San Csciano 부근의 산장에서 농사일을 하는 틈틈이 저작에 골몰하면서 군주론, 로마사(티도우스 리비우스의 로마사의 제 1부 제10권에 관한 논고), 전술론 및 피렌체사를 저술하였고,  풍자극 만드라골라, 언어에 관한 대화의 언어론 등을 비롯한 천재적 작품을 남겼다. 

     

     

    la casa di Macciavelli a San Casciano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 문화가 만발하는 시대에 르네상스의 발상지 피렌체에서 태어나, 온갖 시련과 고독의 일생을 보내면서, 르네상스는 물론 후세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그를 탄압한 권력자들의 이름은 망각되었으나 마키아벨리의 사상, 문학, 문화에 걸친 다양한 업적은 영원히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마키아벨리 사상의 핵심 

     모든 사상은 시대와 환경의 영향과 배경을 중추로 삼는 <시대의 산물>이다.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의 분열과 혼란,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 강국의 이탈리아 할거정책 같은 대내외적 권력투쟁이 격심한 시대의 부침을 체험하였고, 전환기 극복을 위한 경국치세의 이론을 제기했다.

     마키아벨리는 오직 현실을 냉정한 눈으로 통찰, 그것을 있는 그대로 서술, 설명한 탓으로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 지탄을 받는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는데, 인류가 정치생활을 영유한 이래 현재까지 어떤 시대, 어떤 사회를 막론하고 그 양상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정치가 투쟁의 성격을 벗어난 적이 없고, 권모술수가 따르기 마련인데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가 정치 이면에 숨은 현실상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군주론 Il principe(1513-1514)> 을 세상에 내놓은 이후 그의 이름은 흔히 권모술수를 논하는 권력자의 대명사가 되다시피 하였다. 그의 사상의 배경과 이론의 가치 등을 연구한 학자들은 그렇지 않았으나, 많은 사람들은 흔히 그를 권모술수, 약육강식 등 파렴치한 정치적 악덕의 권력화, 혹은 그런 악덕의 종자들을 번식시킨 장본인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핵심적인 사상은 군주론1513-1514, 로마사론1513-1517, 전술론1519-1520, 및 피렌체사1520-1525 의 네가지 저서에 잘 나타나 있듯이 1. 현실주의적 지배자 원리를 전제주권의 관점에서 정치 권력적인 지배 관계라는 것을 명시, 2. 정치행동의 기술을 전제군주의 자유자재한 지배라는 관점에서 파악, 3. 정치력으로서의 힘을 퇴폐, 분열의 방지와 통합의 권력의지로 생각하였다는 점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요컨대 마키아벨리 사상의 본질은 흔히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마키아벨리즘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그의 사상은 자유 도시공화제적인 공화적 자유 사상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같은 자유의 퇴폐, 부패 및 그 타개의 독특한 방법을 군주론 등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경국치세 도리를 제시하였을 뿐 아니라 정치학이 한 과학으로 성립할 수 있는 초석을 최초로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출처> 세계의 대사상 제3권 마키아벨리  책임편집/해설 이정식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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