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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토레토 Tintoretto이.탈.리.아 문화/미 술 belle arti 2020. 12. 4. 09:50
야코포 로부스티 Jacopo Robusti, Tintoretto, 1519 - 1594
틴토레토의 본명은 야코포 로부스티이다. 틴토레토(tintoretto)라는 별명은 아버지가 염색공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출신을 나타낸다.
틴토레토의 생애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1539년의 유서에서 그는 자신을 독립적인 전문가라고 일컬었는데, 이 말은 그의 위압적이고 강한 개성을 고려할 때 전혀 놀랄 만한 것이 아니다. 그가 받은 미술 교육에 관해서는 어떤 자료도 남아 있지 않다. 1
틴토레토의 초기 작품들을 보면 일찌감치 아들의 재능을 발견한 아버지가 그를 누군가 안정된 화가의 작업장에 보내 회화의 기초를 익히게 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는 곧 1530~40년 베네치아에서 활동하던 화가들이 시도한 다양한 방식들을 접하게 되었고...고유색보다 전체적인 색조를 중시했던 조르조네의 양식에 반발했다. 1
1527 년의 로마 약탈 이후 베니스로 이주해온 로마 예술가들, 토스카나와 볼로냐의 화가들과의 접촉은 베네치아파 화가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전통적인 색채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더욱 입체감을 나타낼 수 있게 하였으며, 미켈란젤로의 영향 및 1541 년 조르지오 바사리의 베니스 방문, 베네치아 예술가들의 중부 이탈리아 여행 등이 베네치아 회화의 변화를 유도하여 다양한 유형의 그림에 적합한 표현 양식을 제공했다.
새로운 양식에서는 아주 환상적이고 상상적인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하여 전체적으로 빛을 중요하게 다루면서 형태와 색을 배합했다. 이렇게 해서 틴토레토의 초기 작품들은 이 모든 것들에 영향을 받았다. 비평가들은 틴토레토가 젊은 시절에 그린 몇몇 작품들을 확인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성스러운 대화 Sacre Conversazioni〉(1540, 뉴욕 시 윌덴스타인 컬렉션)이다. 이 그림은 성모 마리아의 무릎에 앉아 그녀와 반대되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아기 예수와 6명의 성자를 묘사하고 있다. 그 양식은 틴토레토의 시대에 유행한 베네치아 미술의 다양한 요소들을 반영하고 있지만, 미켈란젤로의 영향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1
그는 1539년부터 독립 장인으로 활동했고, 1540년경 피사니 가의 성에 신화를 주제로 한 천장화를 그렸다고 전한다. 1545년경에는 베네치아에서 인기 있는 초상화가로 자리매김했고, 1548년에 〈성 마르코의 기적〉을 그리면서 크게 명성을 얻었다. 2
〈성 마르코의 기적〉은 산 마르코 형제회의 주문으로 제작된 것으로, 중세 시대 성인전인 야코부스 데 보라지네의 《황금 전설》에 수록된 성 마르코와 노예의 전설에서 소재를 따온 것이다. 베네치아에 성 마르코의 유해가 안장되자 프로방스 지방의 한 노예가 주인의 허락도 없이 순례에 올랐다 돌아간 후 극형을 받았다. 그러나 성 마르코의 기적으로 아무리 고문을 해도 노예의 몸에 상처가 남지 않자 고문자들이 참회한다는 이야기이다. 타원형의 구도로 군중들이 밀집되어 있는 가운데, 중앙 상단의 성 마르코와 하단의 노예가 미켈란젤로의 단축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완벽한 신체 묘사, 풍부한 색채 감각, 극대화된 조명 효과와 격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이 작품으로 틴토레토는 단숨에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2
1550년대에는 성당과 종교 단체의 주문으로 종교화를 그렸다. 〈창세기〉, 〈목욕하는 수산나〉, 〈구약성서의 여섯 장면〉 등을 통해 그의 기법은 더욱 완숙해졌으며, 1560년대 이후 전성기를 누리며 수많은 걸작들을 탄생시켰다.
전기작가가 언급하고 있듯이 그는 고독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 때문에 다른 미술가들과 교류를 갖는 것을 피하지는 않았다. 틴토레토의 생애에서 이 특별한 시기(더욱 활기찬 색채와 변화가 심한 원근법에 대한 선호, 고도의 장식성을 특징으로 한 시기)는 그가 도제 궁에서 일하고 있던 파올로 베로네세의 미술에 점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과 일치한다. 베로네세풍의 요소들을 흡수·변형한 흔적은 현재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있는 성서를 주제로 그린 그의 훌륭한 천장화에서 뚜렷이 찾아볼 수 있다.
빛을 흡수하는 색의 사용은 순수한 원근법의 작용만으로는 불가능했던 공간의 표현에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했다.
그는 이 공간들에 그림의 다른 부분과 조화로운 질서를 이루는 군중의 모습을 도입했는데, 이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베네치아의 미술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특징이었다. 바로 이 무렵부터 틴토레토는 마돈나델로르토 교회와 1563년 가스파로 대추기경의 무덤이 된 그 교회 안의 콘타리니가 예배당을 장식하는 데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가 거의 10년에 걸쳐 제작한 마돈나델로르토 교회의 작품들은 또한 그의 미술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요소들의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1
그는 활동 초기부터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의 생애가 갖는 의미와 목적을 탐색하는 데 몰두했다. 1562년부터 약 4년간 〈성 마르코의 기적〉 연작, 마돈나 델 오르토 성당의 〈최후의 만찬〉 등을 비롯해 수많은 종교화를 제작했고, ‘최후의 만찬’과 관련된 주제는 평생 여덟 번 이상 그렸다.
특히 1564년에 착수한 산 로코 대신도회당의 벽화는 틴토레토 예술의 집대성이라고 평가된다. 틴토레토는 이 시기에 다른 주문도 받았으나 이 작업에만 20여 년을 매달렸다. 이곳의 벽화는 신약과 구약성서의 이야기들을 묘사한 것으로, 〈수태고지〉, 〈성모 승천〉, 〈세 왕의 예배〉, 〈그리스도의 유혹〉, 〈그리스도 승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등 70여 점의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틴토레토는 이 연작을 통해 종교적인 주제를 해석하는 데 있어 자신의 천재성을 입증했다. 수많은 인물들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꽉 찬 화면 속에서 그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게 사건과 행위의 의미, 작품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2
틴토레토는 야심이 큰 인물로, 대규모 공방을 운영하며 빠른 속도로 엄청난 양의 작품을 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여덟 자녀 중 세 명이 공방에서 조수로 일하며 그의 뒤를 이었다. 틴토레토는 일을 따내기 위해 때로 다른 이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주문을 받았고, 주문자의 취향에 맞춰 때로는 티치아노풍으로, 때로는 베로네세풍으로 바꿔 그려 주기도 했다. 신성로마제국 루돌프 2세의 취향에 맞춘 〈은하수의 기원〉은 전형적인 티치아노풍 작품으로, 다른 작품들과 달리 따뜻하고 조화로운 색상과 부드러운 명암 처리, 우아함이 돋보인다. 2
〈늙은 틴토레토의 자화상〉에는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적인 화법에 머물지 않으려는 노익장 화가의 기품이 느껴진다. 이 그림을 그렸을 당시 틴토레토는 어느덧 일흔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늙은 틴토레토의 자화상〉에서 화가의 수염과 머리카락은 모두 하얗게 변했고 얼굴에 주름도 깊게 잡혀 있다. 그러나 커다랗고 움푹 팬 두 눈에서는 여전히 순박함이 묻어난다. 자화상 속 화가는 단정하게 정면을 향하고 있어서 마치 현대의 증명사진을 보는 듯하다. 배경은 짙은 어둠으로만 처리했고 윤곽선은 배경 속에 살며시 감춰져 있다. 다빈치의 명암 대조법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변화를 추구했음을 이 그림을 통해 느낄 수 있다.
다만, 두상이 전체 화면에서 차지하는 면적이 비교적 조그맣고 형태 역시 단조로워서 전성기 시절 활력 넘치는 틴토레토 특유의 에너지는 퇴색된 느낌이다. 삶의 마지막 터널을 외롭고 힘겹게 건너는 지친 예술가의 눈빛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틴토레토는 젊은 시절 그렸던 자화상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자신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3
최후의 걸작인 〈최후의 만찬〉은 그가 죽기 몇 달 전 완성한 것으로, 일반적인 ‘최후의 만찬’과는 다른 독창성을 지닌다. 이 주제는 서양화가들이 8천 번 이상 그렸다고 할 만큼 자주 그려진 것인데, 대체로 엄숙함과 성스러운 느낌,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로 표현된다. 그러나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은 마치 일상적인 식사 장면처럼 서민적인 분위기가 감도는데, 마치 교회의 성찬식을 주제로 풀어낸 듯하다. 제자들에게 빵을 먹이고 있는 예수의 모습은 마치 성찬 의식을 거행하는 사제의 행위를 연상시킨다. 또한 서민적인 분위기와 제자들의 초라한 행색은 청빈과 자선의 미덕, 그리스도 안에서의 평등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2
그는 사건 표현뿐만 아니라 화면 구성과 빛의 사용에 있어서도 혁명적인 성취를 보였다. 원근법을 대각선 구도로 사용하고 있는데, 예수는 3분의 2 지점에 서 있음에도 양편에 위치한 제자들의 크기와 조명 효과를 적절히 이용하여 그림의 중심에서 관람객의 시선을 모을 수 있게 배치되었다. 또한 천장에 매달린 기름 램프를 통해 예수와 성인들의 머리 뒤에 후광을 비추는 동시에 역광으로 성인들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효과를 주었다. 이로써 반대편에서 음식 시중을 드는 서민과 구별된다. 미술사학자 피에르뤼지 데 베키는 이 작품에 대해 “서민의 일상적인 식사 장면을 천상과 현실의 이중적 빛을 통해 성스러운 만찬으로 승화시켰다.”라고 평가했다. 2
과장된 표현, 격렬한 운동감, 감정과 에너지가 넘쳐 나는 그의 비범하고 개성 강한 그림들은 그의 사후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보수적인 귀족과 성직자들은 그의 그림을 지나치게 도발적이라고 여겼으나 지식인들은 종교적인 요소와 세속적인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 인간 감성을 표현한 것에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작품에 운동감을 부여하는 빠른 붓 터치로 마무리가 허술하고, 표현에 있어 절제가 부족하고 거칠다는 평도 받았다. 이후 19세기 초에 이르러 틴토레토는 존 러스킨 같은 낭만주의적 비평가들에 의해 마니에리스모(Manierismo)1) 라는 유럽 미술 운동을 대표하는 화가로 추앙받았다. 2
1 다음백과 틴토레토
2 [Daum백과] 틴토레토 –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 김영은,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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