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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기 로마 - 왕들의 업적 lV
    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0. 6. 4. 03:23

    제 4 대 왕 안쿠스 마르키우스 Ancus Marcius (이탈리아어 Anco Marzio)
    675 a.C. (?) – 616 a.C

    재위기간 : 641 a.C. - 616 a.C







    제 2 대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친구였던 아버지 Marcius와 누마 폼필리우스의 딸 폼필리아 Pompilia 의 아들로 알려져 있으며,
     로마 명문가 gens Marcia 의 일족으로, 사비나 족 sabini 의 후손이라고 한다.










    Ancus 라는 이름은 그의 구부러진 팔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하는데,
    누마 폼필리우스처럼 평화를 사랑하고 종교적인 왕이었으나  영토를 지키기 위한 전쟁을 하기도 했다.[1]

    안쿠스 마르키우스가 왕으로 선출된 것은 로마가 전대 툴루스 호스틸리우스의 종교를 권력에서 분리시키는 정책에 따라 신성성이 많이 위축되어있던 시기였다.

    그는 현명하게도 영토확장과 종교를 양립시켜가며 로마를 발전시킨 왕이었다.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제사장을 시켜 이해 관계국을 먼저 찾아가 민생의 여론을 섭렵하게 하고,

    신에게 계시를 물어 전쟁의 정당성을 얻은 후에 비로소 전쟁을 시작했다.

    그는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시키기 위해 툴루스 호스틸리우스가 시작한 라틴족과의 전쟁을 이어받아 최종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서

    무르치아 계곡Valle Murcia 과 아벤티노 Aventino 언덕에 엄청난 숫자의 패전 이민족을 받아들였다.

    이후 로마는 승전할 때마다 영토는 물론 인구를 증가시키곤 했다.


    육지와 티베리나 섬을 연결하던 수블리치오 교각은

    교각을 건설함으로서 로마를 강화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던 안쿠스가 건설한 목제 교량으로,

    후세 학자들에게 로마의 확장세를 알려주는 지표가 되고 있다.

    이 교각 주변 지역은 곧 상업지역으로 변모하는데,

    포로 보아리오foro Boario가  바다로 부터 소금을 실어 나르는 도로 via campania와 북쪽의 가축이동로 via salaria가 만나는 지점이었고,

    북쪽 에트루리아의 도시들과 남쪽 라틴 도시들의 교역에 매우 적당한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블리치오 근처의 포로 보아리오와 스깔로 띠베리노 Scalo Tiberino 가 중요해짐에 따라 지아니꼴로 언덕의 수비강화에 역점을 두어야할 필요성이 발생했다.


    소금길은 로마 경제의 중요한 재원이었다.

    이에 따라 안쿠스는 오래된 비아 캄파니아(테베레 강 오른쪽) 와 나란히 비아 오스티네제(테베레 강 왼쪽) 도로를 새로 건설함으로서 소금의 공급을 더욱 원활하게 했다.

    [2]







    기원전 620년 테베레 강 하구에 식민도시 오스티아 Ostia 를 건설했다.[1]









    안쿠스는  로마에 처음으로 교도소Carcere Mamertino 를 만든 왕이었다.




    Mamertine Prison
    in Foro Romano




    이곳은 후에 성 베드로와 바울이 갇혀있던 감옥으로도 유명하다






    기원전 616년 사망한 안쿠스 마르키우스와 함께 로마에서 사비나인의 군주시대는 끝났다.[2]
    후대 마르키우스 왕족의 시조는 이 안쿠스 마르키우스이며, 공화국과 제국을 거치는 동안에도 뚜렷한 자취를 남기고 있다.













    [1] 위키백과 이탈리아
    [2] http://www.romaspqr.it/
    내용발췌> 로마사 -  프리츠 M. 하이켈하임, 세드릭 A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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