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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오스토 Ludovico Ariosto이.탈.리.아 역사/이탈리아가낳은인물 titani 2020. 2. 22. 19:38
루도비코 아리오스토(Ludovico Ariosto, 1474-1533) : 당대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들 중의 하나로서 시인, 극작가, 외교관. 1474년 레지오 에밀리아 출생. 아버지는 레지오 성채의 지휘관이었고, 어머니는 귀족이었다. 아리오스토가 10세 되던 해에 이사해서 페라라에 자리 잡았다. 어려서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으나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 법대에 진학한 아리오스토는 일찌감치 전공 대신 철학 수업에 열중하고 페라라의 지식인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인문학 교육을 완성했다. 특히 베네치아 출신 피에트로 벰보Pietro Bembo 와 페트라르카의 작품에 대한 열광과 정열을 공유했다고 한다. 조용하고, 침착하며 학문을 사랑하던 아리오스토는 1500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학문을 접고 가족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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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의 완성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2. 22. 16:36
전인全人 아주 날카로운 문화사적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면 15세기에 들어와 완전한 수양을 쌓은 사람들이 차츰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자기들의 정신적, 외적 존재를 조화롭게 다듬는 것을 의식적인 목표로 삼았는지는 말하기 힘들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불완전한 가운데서도, 지상의 존재에게 가능한 범위에서 그런 생각을 가졌다. 예를 들면 로렌조 일 마니피코를 행운, 재능, 성격 등에 따라 총결산 해보는 일은 포기한다 하더라도, 그 대신 아리오스토 같은 개인을, 특히 그의 풍자에 나타나는 개성을 관찰할 수는 있다. 인간으로서 시인으로서의 자랑, 자신의 향락에 거역하는 아이러니, 가장 섬세한 조롱과 가장 깊은 호의 등이 얼마만한 화음으로 조율되어 나타나는지를 말이다. 이러한 충동이 당시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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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발전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2. 22. 10:27
이탈리아 국가와 개인 공화국이든 전제국가든 이탈리아 국가들의 특성속에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현대적 인간으로 일찌감치 형성된 이유, 유일한 이유는 아니지만 가장 강력한 이유가 들어 있다. 개인주의의 형성 중세에는 의식의 두 측면 - 곧 세상을 향한 것과 인간 자신의 내면을 향한 것 - 이 하나의 공통된 베일 아래 감싸여서 꿈꾸거나 아니면 반쯤 깨어 있었다. 그 베일은 신앙심, 어린아이 같은 선입견, 망상 등으로 짜여진 것이었다. 그 베일을 통해서 내다보면 세상과 역사는 이상하게 채색되어 보였고, 인간은 자신을 오직 종족, 민족, 당파, 분대, 가족, 그 밖에 어떤 형태든지 보편성의 모습으로만 인식하였다. 바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먼저 이 베일이 공중으로 날아갔다. 국가와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에 대한 '객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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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II세이.탈.리.아 역사/이탈리아가낳은인물 titani 2020. 2. 21. 22:23
호색하고 권력욕의 화신이었던 알렉산더 6세의 뒤를 이어 교황으로 선출된 율리우스 2세(Julius II 1443~1513)는 전쟁을 밥보다 좋아하는 정력적인 활동가로, 제 2의 르네상스적 교황이었다. 그래서 전사교황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전쟁 이외에 학문과 예술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는 어린 시절부터 삼촌인 교황을 보조하는 복사로 봉사하였고, 삼촌이 소속된 프란치스코회에서 교육을 받았다. 프란체스코 델라 로베레가 교황 식스토 4세로 선출되면서 조카인 줄리아노(율리우스)를 추기경에 서임함과 동시에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을 명의본당으로 하사하였다. 교황인 삼촌을 배경 삼아 줄리아노는 교회 안에 매우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으며, 여덟 개 이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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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국과 그 위기 IV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2. 21. 10:25
하드리아누스 6세(재위 1521~1523) 치하에서 이루어진 몇 가지 소심한 개혁들은 저 위대한 독일 종교개혁에 대비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그는 고작해야 지금까지 벌어지던 일들, 성직 매매, 친척 등용, 낭비, 살인강도, 음란함 등에 자신의 불쾌감을 드러내는 정도의 일밖에는 하지 못했다. 루터에게서 오는 위험이 가장 큰 위험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클레멘스 7세(재위 1523~1534) 치하에서 로마의 전 지평선은 누런 잿빛의 시로코 열풍 비슷한 증기로 뒤덮였다. 교황은 가장 가까운 측근에게도 외국에서도 미움을 받았다. 생각하는 사람들의 불쾌감이 계속되는 동안, 로마의 길거리와 광장에는 설교하는 은둔자들이 나타나서 이탈리아와 세계의 멸망을 예언하고 교황을 안티 크리스트라고 불렀다. 추기경 폼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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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魔神 체사레 보르자이.탈.리.아 역사/이탈리아 스캔들 scandali 2020. 2. 20. 14:36
체사레는 로마 교황 알렉산더 6세와 연인 반노차 카타네이 사이에서 태어났고 생애의 대부분을 이탈리아에서 보냈지만 그의 가족과 문화적 배경은 거의 전적으로 스페인적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였을 뿐 아니라 놀랄 만큼 총명한 인물로 인정받았던 체사레는 1489년에 페루자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다가 피사대학으로 옮겨 유명한 법학자인 필리포 데초 밑에서 공부했고 교회법과 민법으로 학위를 취득했다. 1492년에 아버지가 교황으로 선출됨으로써 체사레 보르자의 운명도 달라졌다. 대주교가 되었을 뿐 아니라, 1493년에는 명의(名義)성당인 산타 마리아 노바 교회를 맡은 추기경이 되어 아버지의 주요참모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보르자에게는 종교적 소명의식이 없었다. 교황청에서 보르자는 성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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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국과 그 위기 III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2. 20. 10:00
율리우스 2세 율리우스 2세(Julius II 재위 1503~1513)의 개인적인 도덕률이 어떤 것이었든 간에, 본질적인 의미에서 그는 교황제를 구제한 사람이었다. 그의 아저씨였던 식스투스 이후의 교황들의 재위 기간에 벌어진 사태들을 관찰하면서 그는 교황의 명성의 참된 근거와 조건들에 대해서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에 따라 통치를 하고 흔들리지 않는 영혼의 힘과 정열을 그 일에 바쳤다. 의심스러운 협상들과 성물 매매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일반적으로 갈채를 받으면서 베드로의 의자에 올랐다. 이제는 적어도 최고 직위들을 놓고 벌어지는 거래만은 중단되었다. 율리우스에게는 총신들이 있었고 그들 중에는 대단히 품위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만 특별한 행운을 통해 친척 등용만은 초월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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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국과 그 위기 II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2. 19. 01:24
보르지아 가문 엄격하게 보자면 이탈리아 문화 형식들을 논하는 책에서 교황 알렉산더 6세는 다루지 않아야 할 사람이다. 보르자 가문은 나폴리 가문이나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는 체사레와 공공연하게 에스파냐어로 대화했고, 루크레치아는 페라라궁에 맞아들여질 때 에스파냐 옷차림이었으며, 에스파냐 테너 가수들이 노래했다. 집안의 가장 가까운 하인들은 에스파냐 사람들이었고, 마찬가지로 1500년 전투에서 체사레의 악명 높은 병사들도 에스파냐 사람이었다. 체사레의 온갖 이질적인 행위 중에는 폐쇄된 궁전 정원에서 투우를 즐기는 것도 있었다. 부정부패에서도 이 일가는 선두에 등장한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으며 어떤 일을 했는가는 자주 저술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을 달성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