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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력의 魔神 체사레 보르자
    이.탈.리.아 역사/이탈리아 스캔들 scandali 2020. 2. 20. 14:36

     

     

    Dante Gabriel Rossetti -  The Borgia Family

     

     체사레는 로마 교황 알렉산더 6세와 연인 반노차 카타네이 사이에서 태어났고 생애의 대부분을 이탈리아에서 보냈지만 그의 가족과 문화적 배경은 거의 전적으로 스페인적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였을 뿐 아니라 놀랄 만큼 총명한 인물로 인정받았던 체사레는 1489년에  페루자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다가 피사대학으로 옮겨 유명한 법학자인 필리포 데초 밑에서 공부했고 교회법과 민법으로 학위를 취득했다.

     1492년에 아버지가 교황으로 선출됨으로써 체사레 보르자의 운명도 달라졌다. 대주교가 되었을 뿐 아니라, 1493년에는 명의(名義)성당인 산타 마리아 노바 교회를 맡은 추기경이 되어 아버지의 주요참모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보르자에게는 종교적 소명의식이 없었다. 교황청에서 보르자는 성직자의 의무는 지키지 않고 사냥 파티와 호색적인 간통 및 화려한 옷차림을 즐기는 인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이 체사레의 최대의 야망은 분열 항쟁하는 조국 이탈리아의 통일이었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저돌적인 사람이었다. 예컨대 유명한 <보르자가의 독약>이라면,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어린애도 울음을 그친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것은 하얀 가루로 된 독약으로 물에 타서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르자가의 가장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독약의 사용법을 의무적으로 익혀두는 내력이 있었다고 한다. 체사레의 정적이 쓰러질 때마다 사람들은 이 독약을 생각했다. 체사레는 몸이 날씬하고 피부가 희고 콧날이 오똑하고 입술이 붉은 미남이었다. 매일 밤 가면을 쓰고 거리에 나가 칼을 휘두르는 것이 그의 취미였다. 로마 사람들은 체사레를 악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악마 체사레의 여동생 루크레치아는 절세 미인으로, 이탈리아의 모든 젊은 귀족들이 원하는 여인이었다. 체사레는 가보의 하나이던 독약 뿐 아니라 이 아름다운 동생도 철저하게 이용했다. 

     

    Catherine d'Alexandrie 1493-1494 Pinturicchio

     

     체사레는 처음에, 로마 북방의 토스카나 공화국을 정복할 의도를 갖고 있었다. 그러자면, 북부 이탈리아 밀라노와 손을 잡을 필요가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체사레는 루크레치아를 밀라노의 페사로 성주 지오바니 스포르차와 결혼시켰다. 이 때, 체사레의 나이 20세 미만, 루크레치아의 나이 13세였다. 그러나 5년도 채우지 못하고 지오바니 스포르차가 쓸모 없게 되어버리자 그는 동생을 이혼시켜 로마로 데려갔다. 1497년의 일이다. 

     루크레치아 역시 남자없이는 못사는 여자로 알려져 있다. 1498년 로마에서 아버지의 연락원과 아이를 낳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체사레는 몹시 화를 냈다. 그러나 항간에서는, 루크레치아가 아버지나 두 오빠와도 관계해서 아이를 낳았다고 수근거렸다. 이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무질서한 사회를 말해 주는 유명한 일화이다. 체사레는 여동생의 애인이라는 남자를 찾다가 그가 아버지와 함께 걸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체사레가 칼을 들고 달려들자 문제의 남자는 울면서 용서를 청했으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체사레의 위세에 압도되어 구경만 할 뿐, 도와주려는 사람이 없었다. 남자는 교황의 옷자락을 붙들고 애원했으나 교황조차 그를 구하려 하지 않았고, 체사레의 칼이 휘둘러지자 교황의 얼굴과 옷자락까지 붉은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 그 남자와 루크레치아의 만남을 도왔던 시녀는 며칠 후 아르노 강에서 참혹한 시체로 떠올랐다. 

     이 무렵에 교황청은 북방의 베네치아나 밀라노와 같은 강력한 상인 국가 이외에도 독일 신성 로마 황제와 숙명적으로 대립했다. 이에 체사레근 우선 나폴리의 아라곤 왕국과 제휴할 필요를 느끼고, 루크레치아를 이용하기 위해 지오바니 스포르차로부터 처녀증명서를 받아냈다. 즉, 지오바니 스포르차는 성불구자로, 루크레치아와는 관계하지 않았다는 각서를 받아낸 것이다. 이 처녀 증명서를 가진 루크레치아는 나폴리 국왕의 서자 알폰소와 만났다. 이때 루크레치아가 18세, 알폰소가 17세, 루크레치아의 미모에 매혹된 알폰소는 즉시 결혼에 동의하고,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이렇게 나폴리 왕국과 손을 잡게 되자, 아우를 죽인 혐의 때문에 추기경 자리를 내놓았던 체사레는 이제 교황의 특사라는 새로운 자격으로 프랑스에 갔다. 체사레는 프랑스에서 루이 12세의 환심을 샀을 뿐 아니라 왕의 여동생 샬롯 달브레와 결혼까지 하고 귀국했다. 이로써 교황청은 프랑스라는 강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사이 루크레치아와 알폰소는 둘 다 사랑에 도취되어 바깥으로 나오지도 않았고, 알폰소는 나폴리 왕국 내에서 고립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 상황을 좋아했을 리 없는 체사레는 알폰소를 없애 버리기로 작정했다. 1500년 7월, 루크레치아와 알폰소는 교황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받고 로마로 오게 되는데, 오자마자 체사레가 풀어놓은 자객들이 알폰소를 공격했다. 중상을 입은 알폰소는 전에 루크레치아와 함께 살던 집으로 운반되었다. 이 때 루크레치아는 남편의 병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약은 물론 식사도 자신이 먼저 시식한 후에 남편이 먹도록 했다고 한다. 

     그녀의 헌신적인 간호로 알폰소는 곧 회복되기 시작했으나 루크레치아가 잠시 아버지를 만나러 방을 비운 사이, 알폰소는 누가 준 것인지도 모르는 독약에 희생된다. 

     알폰소를 많이 사랑했다고 전해진 루크레치아의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체사레가 초대한 페라라 공국의 공사 앞에서 루크레치아는 춤을 출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페라라 에스테가의 알폰소 1세와 결혼하게 된다. 이때 알폰소 1세가 21세, 루크레치아가 22세였으며 그녀의 결혼 지참금은 무려 10만 두카토였다. 

     보르자 가로서는 루크레치아와 알폰소를 결혼하던 무렵이 그 정점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위세와 프랑스, 페라라 등의 강국을 배경으로 하고, 체사레는 이 무렵 희대의 악녀 카테리나의 영지(이몰라와 포를리)를 비롯 로마냐, 리미니, 페사로, 파엔차, 페루지아, 시에나 등을 정복해서 교회령을 확장했다. 그러나 1503년 알렉산더 6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보르자 가문은 급속히 기울어 갔다. 

     1503년 8월 18일 아버지가 죽을 때 체사레 보르자는 아마 토스카나를 공격해 오랫동안 갈망해 온 독립국가를 손에 넣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을 당시 체사레 자신도 병에 걸리는 바람에 생존의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게다가 뒤이어 보르자 가문의 철천지 원수인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가 교황 율리오 2세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그의 목숨은 더욱 위태로워졌다.

     율리오는 체사레 보르자를 로마냐 공작이나 교황군의 총사령관으로 승인하기를 거부하면서 로마냐의 도시들을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체포된 보르자는 도시를 내주기로 동의해 잠시 형 집행을 유예받은 뒤 나폴리로 도망쳤다. 그러나 보르자의 반(反)교황 동맹에 가담하기를 거부했던 스페인 부왕 곤살로 데 코르도바에게 또다시 체포되고 말았다. 보르자는 그후 스페인으로 압송되어 처음에는 발렌시아 근처의 친치야 성에 갇혀 있다가 메디나 델 캄포로 옮겨졌는데 1506년 이곳을 탈출했다.

     그러나 당장은 이탈리아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처남인 나바라 왕의 곁에 있다가 1507년 비아나 외곽에서 나바라 반역자들과 소규모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했다. 체사레 보르자는 비아나의 산타마리아 교회에 묻혔다.

     

     

    출처>  대세계사 8권 - 근대의 서곡 / 김성근 

               다음백과 - 체사레 보르자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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