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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율리우스 II세
    이.탈.리.아 역사/이탈리아가낳은인물 titani 2020. 2. 21. 22:23

     

     호색하고 권력욕의 화신이었던 알렉산더 6세의 뒤를 이어  교황으로 선출된 율리우스 2세(Julius II 1443~1513)는 전쟁을 밥보다 좋아하는 정력적인 활동가로, 제 2의 르네상스적 교황이었다. 그래서 전사교황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전쟁 이외에 학문과 예술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는 어린 시절부터 삼촌인 교황을 보조하는 복사로 봉사하였고, 삼촌이 소속된 프란치스코회에서 교육을 받았다.  프란체스코 델라 로베레가 교황 식스토 4세로 선출되면서 조카인 줄리아노(율리우스)를 추기경에 서임함과 동시에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을 명의본당으로 하사하였다. 교황인 삼촌을 배경 삼아 줄리아노는 교회 안에 매우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으며, 여덟 개 이상의 교구장직을 겸임하면서 많은 성직록을 받았다. 

     1480년 부르군트 세습에 관해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일어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교황 특사 자격으로 프랑스로 파견되어 4년간 체류하였다. 식스토 4세가 죽고 후대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재임하는 동안에도 그의 권력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강화되었는데, 인노첸시오 8세가 교황으로 선출되는 데 그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1483년경에는 사생아인 딸 펠리체 델라 로베레가 태어났다.

     1492년 인노첸시오 8세가 선종한 후 후임 교황 자리를 놓고 로드리고 보르자 추기경(교황 알렉산더 6세 - 재위 1492~1503)과 경쟁했으나 투표에서 진다. 이에 줄리아노는 신임 교황을 성직매매 혐의로 고발하여 그의 선출이 무효라고 주장하다가 오스티아와 파리로 피신한 이후에도 교황과 대립한다. 훗날 형식적으로 화해를 했지만, 끝내 보르자 가문 타도의 야망을 버리지 않았다. 1503년 교황 알렉산더 6세가 선종하고, 체사레 보르자 역시 병상에 누워있었다. 후임 교황 선출에서 줄리아노는 시에나의 피콜로미니 추기경을 지지하여, 교황 비오 3세를 즉위시켰다. 그러나 비오 3세는 재위한 지 26일 만에 세상을 떠난다.

     교황 선출을 위해 소집된 콘클라베에서 줄리아노는 체사레 보르자에게 보르자 가문에 대한 교황청의 지원 정책을 약속하여 자신을 유력한 교황 후보로 지지하게끔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보르자와 한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으며, 실제로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결국 뇌물과 계약이라는 두 가지 방법을 총동원하여 추기경들로부터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표를 얻은 그는 교황직에 당선되었다.

     교황으로 선출된 그는 교황으로서 자신의 새 이름을 4세기 전 교황 율리오 1세의 이름을 계승하여 율리오 2세로 명명되었다. 율리오 2세는 재위 초기부터 교황청을 둘러싼 복잡한 권력 관계나 강대국의 영향력을 일소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우선 그가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은 외교력과 군사력을 동원해 보르자 가문의 소유가 된 교황령을 되찾고 보르자 가문의 영향력을 없애기 위해 위험 인물인 체사레 보르자를 제거한 것이었다. 실제로 교황궁 내에 있는 보르자 아파트는 율리오 2세 재임기부터 19세기까지 봉인된 상태였다.

     율리오 2세는 이어서 로마의 오르시니 가문과 콜론나 가문을 화해시켰고, 그들을 위한 법령을 포고하는 등 우호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여 나머지 로마 귀족들도 자신에게 복종하게 만들었다. 그 후 로마와 인근 지역의 안전을 확보 하기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이 점령한 파엔차, 리미니, 기타 소도시와 요새를 탈환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강력하게 저항하자, 율리우스 2세는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과 군사 동맹을 맺고 그들의 힘을 빌려 베네치아 공화국에 맞섰다. 이는 이탈리아의 독립성을 약화시킬 위험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최선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실제적인 영향력은 별로 없었다. 1506년 율리오 2세는 갑옷으로 무장하고 직접 선봉에 서서 군대를 이끌고 페루자와 볼로냐를 점령하였다.

     1506년 율리오 2세는 스위스 근위대를 창설하였다. 이후 스위스 근위대는 교황을 최측근에서 지키는 유일한 군사력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기독교 세계의 수도로서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르네상스 계획의 일환으로 율리우스 2세는 스스로 라틴-기독교 제국을 이끄는 교황으로서의 위엄을 마치 황제와 같이 드높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과 동명이인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모범으로 삼았던 율리우스 2세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야만인들을 몰아내자는 기치 아래 몸소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수행하였고 성전 건설등 여러모로 애썼으나, 그 웅대한 꿈은 끝내 실현되지 못하였다.

     전사교황이었던 율리우스 2세는 예술과 문학에 대한 후원 활동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재임 시기는 전성기 르네상스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는 사망하는 날까지 로마를 아름답게 꾸며 가치를 높이는 일에 앞장섰다. 특히 그는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강력한 후원자였다. 율리오 2세의 후원으로 그들은 바티칸의 여러 가지 굵직한 예술 계획들에 참여하였다. 특히 시스티나 천장화를 비롯하여 미켈란젤로가 만든 위대한 작품들 가운데는 율리오 2세의 지시로 만들어진 것이 적지 않다. 

     

     1512, Michelangelo's paintings on the ceiling of the Sistine Chapel

     

     1508년 율리오 2세는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 아라곤가와 캉브레 동맹을 결성하였다. 각자 영토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던 이 세 주체는 캉브레 동맹 전쟁 기간 동안 베네치아 공화국에 맞서 싸웠다. 1509년 봄에 율리오 2세는 베네치아 공화국 전역에 성무 정지 조치를 내렸다. 캉브레 전쟁 기간 내내 동맹은 수시로 바뀌었으나 어쨌든 캉브레 동맹의 효과로 율리오 2세는 당초 계획했던 목표를 훨씬 뛰어넘는 성과를 얻었다. 1509년 5월 14일 아냐델로 전투에서의 패배로 베네치아는 사실상 이탈리아 내에서의 주권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국왕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은 당초 교황의 목적을 달성하는 수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것을 원하였다. 이에 율리오 2세는 지금까지 자신의 동맹자였던 프랑스 국왕이 이탈리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경계하여 베네치아 공화국과 손을 잡고 협정을 맺어 프랑스에 적대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510년 초, 베네치아 공화국은 율리오 2세에게 사죄를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가 율리오 2세로부터 성무 정지 조치를 받게 되었다. 

     루이 12세는 1510년 9월 반격에 나섰다. 프랑스 주교단은 교황에게의 순명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막시밀리안 1세의 협조를 얻어 율리오 2세를 조속히 폐위시키기로 결의하였고,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1511년 11월 피렌체가 통치하고 있는 피사에서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분노한 율리오 2세는 페르난도 2세 및 베네치아 공화국과 함께 1511년 신성 동맹을 창설하여 프랑스에 대항하였다. 얼마 후, 헨리 8세와 막시밀리안 1세도 대(對)프랑스 동맹인 신성 동맹에 가담하였다. 

     1512년 8월, 교황군은 신성동맹군과 합세하여 프랑스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이후 동맹국들이 만토바에 모여서 향후 이탈리아에서의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때 피사 공의회를 개최하였던 피렌체에 대해 응징을 결의하였다. 결의에 따라 1512년 8월말에 스페인군이 피렌체 공화국 프라토를 정벌하였다. 프라토 함락소식을 접한 피렌체의 메디치 가(家) 지지자들이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가 거칠어지자 피렌체의 수상과 정부 주요 관료들은 사임을 하고 망명을 떠났다. 교황 율리오 2세는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훗날 교황 레오 10세)을 교황군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피렌체로 파병하였다. 9월 1일, 조반니 추기경은 1,500명의 군인을 이끌고 피렌체에 무혈입성하였다. 이로써 18년만에 메디치 가문이 다시 피렌체의 통치권을 회복하게 되었다.

     

    Stanze Vaticane - The Mass at Bolsena (detail) by Raphael Sanzio

     

     율리오 2세는 로마를 포함한 교황령의 정치적 안정과 독립을 획득함으로써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이탈리아 반도의 독립과 통일의 꿈은 이루지 못한 채, 1513년 2월에 병에 걸려 선종하였다.

     

    Tomb of Pope Julius II: Moses by Michelangelo 

     

     

    1505년 미켈란젤로의 초기 구상

     

     

    내용출처> 대세계사 8권 근대의 서곡 / 김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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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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