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그라쿠스 형제와 농지개혁 II
    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9. 5. 12. 13:10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을 집행하도록 구성된 농지 분배 위원회가 입안자의 사후에도 활동을 허용받은 것은 원로원 내에서 티베리우스에 반대해 조성되었던 반감이 개혁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반대나 개인의 경제적 이해에 기반하지 않고 개인적이고 파벌적인 정책에 기초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개혁으로부터 가장 큰 정치적 이익을 거둘뻔한 당사자가 죽었기 때문에 개혁 자체가 더 이상 그의 정적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자진해서 호의를 베풀고 토지를 분배 받은 사람들에게서 더 많은 피호인들을 확보했다. 

    티베리우스가 죽은 뒤에 임면된 농지 분배 위원회 위원들은 티베리우스의 적극적인 지지자들이었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활동한 결과 6년만에 7만 5천 명이 넘는 인구를 정착시켰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군 복무가 가능한 병력 자원을 20% 늘린 셈이었다. 그라쿠스의 농지법은 로마의 군사력을 강화한다는 목적을 일시적으로 성취했다.

    농지분배 위원회 활동은 힘겨웠고, 불공정행위도 있었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자 고대의 부실한 기록방식 때문에 공유지와 사유지를 분간하기 어려운 경우 농지분배 위원들이 아무리 양심적으로 토지 등본을 참조하고 이웃들을 소환해서 증언을 들었더라도 무관한 사유지를 강제로 징수하게 된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그로 인한 원성이 컸을 것이다.

    로마 시민들의 원성은 무시하더라도 이탈리아, 라틴 동맹국 시민들의 원성은 쉽게 일축하기 어려웠다. 동맹국들의 불만을 무시할 경우 조약국으로서의 권리를 침해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저해하고, 심지어 반란을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로마는 동맹국들에게 개인적 혹은 집단적으로 공유지를 임대나 파격적인 하사로 분배해주었다. 

     

    Gaius Gracchus

     

    호민관 가이우스 그라쿠스 (기원전 123~122)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재능과 능력은 세상에 잘 알려져 있고 그가 호민관이 되기 전부터도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티베리우스를 반대했던 사람들은 그를 위협적인 인물로 생각했다. 그는 평민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고 자기 형이 설치한 농지 분배 위원회의 위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동료 귀족들의 강력한 적대행위에도 불구하고 호민관 직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0년 전 그의 형을 지지하기 위해 그랬던 것처럼 농촌 유권자들은 다시 한번 로마로 상경해서 공식 후보도 아니었던 그를 다시 호민관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형이 살해된 것에 대한 보복과 형에게 치명적인 약점이었던 부족한 정치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사회적, 경제적 집단들과 연대하려는 목적이 추가된 것을 제외하면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개혁을 추진한 동기는 형 티베리우스와 본질상 같았다.

    가이우스가 호민관 직을 수행한 2년은 로마 공화정 역사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해였고, 로마인들의 역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해였을 것이다. 그는 그때까지 원로원도 장악한 동일한 소수의 귀족 가문들이 차지하던 호민관 직을 야심찬 경쟁자가 귀족들의 지배를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거의 절대적인 권력의 도구로 만들어 놓았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개혁

    호민관 직에 오르자, 그는 인민을 선동하여 호민관의 신성불가침의 권리를 침해한 형의 살해자들과 형의 추종자들을 상소권도 주지 않고 처형한 절차에 대해 적대적인 여론을 일으켰다. 평민회는 원로원이 민회에 대한 상소권도 주지않고 특별 법정을 세워 정치범을 단죄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가이우스의 입장을 뒷받침해주었고, 법의 소급 조항에 따라 콘술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는 유죄판결을 받고 추방되었다.

    복수를 끝낸 가이우스는 좀 더 건설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가장 다급한 문제들은 실업과 빈민의 확산, 주기적인 곡가 파동, 군대의 전력과 효율성 저하, 빈번한 노예 폭동, 고질적인 속주 통치문제 동맹국들의 불만 등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중간층, 로마시의 프로레타리아 유권자들, 농민들의 체계적 연대를 이끌어 내려고 시도했다.

     

    Gaius Gracchus haranguing people in the Roman Forum, Rome, drawing, Italy, 2nd century BC

     

    농민 표

    농민들의 표를 얻기 위해 가이우스는 형이 제정한 법률을 부활시켜 확대했다. 사법권을 농지 분배 위원회에 다시 주었다. 대부분의 공유지가 분배된 상황이었지만 그는 대규모 도로 건설 사업으로 농민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었다. 도로를 건설하면서 종가와 시장, 촌락과 읍, 로마를 잇는 소로들을 건설했던 것이다. 이 도로들은 농민들에게 일자리를 주었을 뿐 아니라 곡물을 좀더 싼 값에 쉽게 시장으로 운반하고 그러써 상거래를 향상시켰다. 아울러 민회 참석을 더욱 쉽게 하여 농민들이 정치에 충분히 참여할 수 있게 해주었다. 

    도시 표

    도시민들의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서 가이우스는 민회를 설득하여 저 유명한 렉스 프루멘타리아lex Frumentaria 즉 곡물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국가가 해외에서 곡물을 수입하여 로마에 거주하는 시민들에게 매월 일정량을 일정한 가격에 공급하도록 규정했다. 그라쿠스의 개혁 사업을 통틀어 가장 신랄한 비판을 받은 이 법은 무상분배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오로지 소비자를 위해 곡물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함이었다. 곡물법은 로마 시민들의 독립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기원전 131년의 무기명 비밀 투표법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었다. 아울러 곡물법은 로마에 거주하는 유권자들이 가이우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만들었다.

    그밖에도 몇 가지 중요한 법안들이 통과되어 가난한 시민들에게는 필요한 구제를, 가이우스에게는 정치적으로 긴요한 자신에 대한 감사의 분위기를 제공했다. 군대법은 정부에게 병사들의 급료를 줄이지 않고 의복과 장비를 지급하고, 복무 기간을 단축하고, 17세 미만은 징집을 금하도록 규정했다. 이 법은 항상 그라쿠스 형제의 관심사였던 군대의 사기를 올리고, 수입이 적은 병사들, 동맹국 주민들, 유권자들의 정치적 지지를 끌어내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탈리아와 해외의 상업 및 농업 식민시들의 건설을 인가한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법들은 로마의 인구 과밀을 해소하고 농민과 상인들과 장인과 생계 능력을 잃은 소규모 사업자들에게 경제적 기회를 제공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가이우스는 아시아에도 시칠리아처럼 십분의 일 세금으로 전환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지역 단위로 십분의 일 세금을 징수하던 시칠리아의 징수제도와는 달리, 그라쿠스 법은 켄소르들이 로마에서 5년마다 세급 징수 도급 회사들을 대상으로 아시아의 십분의 일 세금 징수권을 경매하도록 명시했다. 새로운 조세 제도는 로마 국고에 막대한 자금이 흘러들어오게 했고, 속주 납세자들의 입장에서도 현물 납세가 품질을 구분하기 않았기 때문에 적어도 이론 상으로는 고정된 세금보다 부담이 적었다. 새로운 조세 제도는 자연히 기사 신분의 부유층에게도 이익을 주었다. 이 그라쿠스 법은 부유한 기사 신분의 경제력을 키워준 동시에 - 이들은 그 대가로 재산의 일부를 자기들에게 혜택을 준 정치가를 위해 사용해야만 했다 - 가이우스 자신의 계층인 귀족 경쟁자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기사 신분을 가이우스의 귀족 경쟁자들로부터 이탈하게 만든 또 다른 조치는 아킬리우스 법이었다. 가이우스 지지자들 중 한 사람의 후원으로 제정된 이 법은 원로원 의원과 그들의 친족, 모든 쿠룰레스 정무관들을 속주 총독들의 재산부당취득 협의를 조사하기 위해 설치된 상설 법정의 배심원단에서 배제했다. 그러므로 이 법은 배심원 자격을 원로원 신분에서 기사 신분으로 옮겼다. 이 법은 기사 신분과 가이우스의 정적들 사이를 벌어지게 하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나, 사업가들이 속주에서 저지르는 대대적인 수탈과 갈취를 방지하는 선량한 총독들이 사업욕에 눈먼 기사 신분에게 처벌 받기 쉽게 되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긴급한 사회 경제적 현안을 치유함으로써 주요 집단들로부터 좀더 많은 지지를 얻으려 했다. 로마 시민권을 라틴인들에게 확대 부여하고 라틴인들의 권리를 이탈리아 나머지 지역 주민들에게 주는 것을 골자로 한 그의 법안은 로마인들의 이기적인 무지와 원로원내부의 가이우스 정적들의 적의에 의해 좌절되었다. 

     

     

    The Death of Gaius Gracchus, by François Topino-Lebrun, 1792.

     

     

    가이우스의 몰락과 죽음

    유노니아 식민시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70일간 아프리카에 있을 때 귀족들 내부의 정적들은 이탈리아 시민권 법안과 그 발의자를 모두 파멸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정적들이  자신을 파멸시키기 위해 고른 귀족 호민관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한때 자신을 지지한 도시 로마 선거민들의 견고한 유대를 깨뜨려 놓은 것을 발견한다. 가이우스는 너무 오래 아프리카에 있었고, 그러느라 너무 늦게야 자신에 대한 음모를 깨달았다. 그에 대한 워낙 두터운 지지가 그를 방심하게 하고 그의 경쟁자들은 결속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자신이 아프리카로 떠날때 자신의 대리인으로 로마에 남겨둔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무모하고 난폭해서 가이우스 진영에 적지않은 해를 끼쳤다.

    가이우스는 호민관직에 세번째 출마했다가 낙선한다. 그를 제거하기로 결의한 정적들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그가 루브리우스 법에 의해 명령권을 받은 아프리카 위원회의 위원이라는 신분 뿐이었다. 명령권을 무효화시키기 위해 그들은 루브리우스 법을 폐지하기 위해 서둘렀다.

    가이우스는 민회를 소집하거나 법률 폐지 위협을 거부할 권한이 없었다. 그는 폭력으로 맞설 경우 정적들에게 자신에 대한 극단적 조치를 합법화하는 빌미를 준다는 판단하에 폭력을 피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도 격렬한 반대자인 신임 콘술 루키우스 오피미우스가 고의로 사건을 일으켰다. 카피톨리누스 신전에서 오피미우스의 시종 중에 하나가 가이우스에게 불량한 시민들은 현관에서 나가라고 말했고, 그라쿠스의 추종자가 칼을 빼어 그를 쓰러트렸고 그로서 빌미를 주게 되었다. 사실상 계엄령을 선포한 원로원의 비상결의로 무장한 오피미우스는 원로원의원들과 노예들로 부대를 조직하고 아벤티누스 언덕으로 피신해 있던 그라크스의 추종자들을 공격했다. 250명의 그라쿠스 추종자들이 죽었다. 가이우스도 도피하려고 시도했으나 자신의 절망적인 처지를 깨닫고는 자신의 노예를 시켜 자신을 죽이게 했다. 그 뒤 의사 재판이 벌어져 그라쿠스 추종자 3천명이 처형되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이렇게 죽었다. 그는 2년간 호민관으로 재직하면서 원로원과 민회들을 장악한 소수의 귀족들이 휘두르던 독점권을 잠시나마 분쇄했다. 여러 가지 행정권과 기능을 자신의 수중에 결집시켰다. 주민들에 대한 곡물 배분을 감독하고, 법원의 배심원들을 선정했고, 대로 건설 계약에 도급을 주고, 도로 건설을 감독했고, 원로원 회의를 주재했고, 콘술 후보자들을 지원하고 그들을 위해 유세를 했으며 호민관 직을 콘술 직보다 더 강력한 지위로 만들었다. 그가 했던 개혁들 중 몇 가지는 과연 생각이 깨인 정치가로 내놓은 조치였다. 어떤 개혁들은 그저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었고, 순전히 기회주의적인 조치로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대부분은 두 가지가 뒤섞인 것이었다. 

    그라쿠스 형제는 살아서보다 죽어서 더 강한 힘을 발휘했다. 정적들은 그 형제를 죽임으로써 그 두 호민관을 뜻하지 않게 영웅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만약 그렇게 죽지 않았다면 그 형제는 이미 잊혀졌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죽음으로써 아무리 거만한 귀족이라도 그 형제에 관해 말할 때는 자신의 사견과 무관하게 존경과 경의의 말 이외에는 감히 입밖에 내지 못했다. 평민들은 곤궁과 착취가 만연한 세상에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이유로 그들을 존경했다. 

     

     

     

    출처> 로마사 - 프리츠 하이켈하임/세드릭 요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