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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과 제국주의가 로마 국내 정세에 끼친 영향
    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9. 5. 8. 02:22

     

     

    로마는 전쟁과 정복으로 지중해 세계에서 패권을 쥐었고, 그러써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시작하고 헬레니즘 세계 군주들이 지속해온 정치, 경제적 통일을 완수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한 이래 불과 한 세기 반도 되지 않는 기간에 로마는 도시 국가에서 제국으로 발전했다. 

    로마는 대단히 강력한 왕국들을 조공국으로 굴복시켰다. 금은과 노예들과 그밖의 조공들이 거대한 강물처럼 로마의 손아귀에 흘러들어왔다. 그 앞에서 국가들은 벌벌 떨었다. 그 과정에서 로마의 문화가 훨씬 다양해지고 세련돼 가는 동안, 세계 정복과 확장이라는 이 현상은 로마인들의 경제 사회 정치 윤리에 혁명적 파급 효과를 끼치기 시작했고, 이것이 공화정 자체가 몰락하게 되는 발판을 놓는다.

     

     

    농업

     

    가장 괄목할 만한 변화는 농업 분야에서 발생했다. 공화정의 처음 몇 세기 동안 농업은 로마인들의 주요 직업이었을 뿐 아니라, 생계 수단이기도 했다. 대 카토는 초기 로마인들의 모든 도덕적 가치관을 농업의 영향으로 돌렸다. 

     

     

     

    Agriculture in ancient Rome (Gallo-Roman harvesting machine)

     

     

    기원전 2세기 중엽에는 이미 이탈리아 농촌 생활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 있었다. 이 변화는 한니발의 침공으로 가속화했다. 14년 동안 카르타고의 군대와 로마의 군대가 토지를 황폐하게 하고, 곡식을 탈취하거나 망치고 가축을 죽이고, 가옥과 농촌 시설들을 불태웠다. 군사작전과 전쟁으로 인한 무관심으로 인해 수 세개에 걸친 끈기있는 노력으로 건설된 중요한 배수 체계가 파괴되었다. 그 결과 저지대는 도로 소택지와 습지로 돌아가 말라리아 모기들의 좋은 서식처가 되었다. 이 지대에는 말라리아가 창궐하고 그로써 이미 전쟁으로 격감해 있던 인구를 더욱 감소시켰다.

    인명 손실의 규모는 참담할 정도로 컸다. 대략 285,000명이었던 로마 시민들의 수가 두 번의 포에니 전쟁을 거치면서 144,000명으로 감소했다. 이 감소 수치에는 전쟁 사상자 수도 반영되어 있지만, 대부분 농촌에서 차출되어 해외주둔군으로 파견된 수많은 장정들의 수도 반영되어 있었다. 농촌 출신 병사들중 많은 수는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좌절한 채 일거리를 찾아 로마로 흘러들었다. 더러는 군대에 재입대하거나, 농사보다 돈벌이가 더 잘되던 약탈과 장사의 기회가 기다리고 있는 속주들로 돌아갔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뒤에는 시민들의 수가 증가했지만, 농민들의 숫자는 여전히 심각할 정도로 줄어들었다. 

     

    로마의 해외 팽창은 로마와 지역 이탈리아의 귀족들에게 사유지를 사용하여 라티푼디아latifundia대규모 집약적 영농을 벌일 수 있는 유리한 기회를 제공했다. 전문적으로 사육하는 대규모 영농이 남 이탈리아, 에트루리아, 그리고 라티움의 일부 지역에 급속히 퍼졌다.

    대규모 상업적 농업이 발전할 때는 반드시 다섯 가지 주된 요소에 의존했다. 그것은 풍부한 자본과 토지, 값싼 노동력, 전문적 장비, 효과적인 조직과 경영, 시장 확장이었다. 로마가 해외로 팽창함에 따라 이 다섯가지 요소 모두가 로마와 지방 이탈리아 귀족들에게 활용 가능했다.

     

    해외 정복 사업에 따른 전리품과 조공, 그로 인한 상권 확장, 속주 자원의 공식적 개발, 부패한 속주 관리들이 부당하게 수탈한 자산에 의해 막대한 투자 자본이 로마로 유입되었다. 그렇게 유입된 자본의 일부는 대부분 부동산(특히 농지)에 투자되었다. 

    대규모 사유지의 증가를 규제한 기원전 367년의 법은 한번도 엄격히 시행된 적이 없었고, 제2차 포에니 전쟁 뒤에는 거의 무시되었다.

    오히려 국가가 그러한 투자를 장려했다. 국가가 1천 4백만 에이커의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고 (대부분 전쟁 뒤에 몰수한 토지이다), 국가는 대규모 투자자들을 상대하는 게 편했기 때문에 부유하고 세도있는 지주들에게 공유지 대부분을 장기 저리로 임대해 주었는데 이들은 몇 세대 뒤에는 임대한 토지를 사유지로 간주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임대료조차 중단했다.

     

     

    노예 노동력

    정복 전쟁들은 수십만 명의 전쟁 포로들로 고갈된 인력을 벌충함으로써 전쟁으로 야기된 노동력 문제를 해결했다. 

    조직적인 노예 노동이 갖는 이점은 여러 가지였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든 필요하면 즉시 활용 가능하고 대체도 용이한 안정된 인력 공급원이었다. 노예들은 소작인들과 달리 군대에 징집할 수 없었다. 

     

     

    피해방인

    기원전 2세기 말에 원로원 지도자들에 대해서 분개하게 된 또 다른 집단은 노예 수가 급증함에 따라 점차 많이 생겨난 피해방인들이었다. 노예라고 해서 모두가 라티푼디아나 광산, 채석장, 혹은 그밖의 육체를 혹사하는 일터에서 모진 여건 속에서 강제 노동을 했던 것은 아니다. 동지중해 지역에서 포로로 끌려온 많은 수의 훈련되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개인 집에서 장부 회계원, 비서, 의사, 가정교사 등으로 일하거나 기술자로 일했다. 그런 노예들을 많이 거느릴수록 신분이 높다는 표시였고, 따라서 부자들은 종종 자기들이 거느린 노예들의 숫자로 동료들과 경쟁을 벌이곤 했다. 

    여느 고대 민족들보다도 로마인들이 노예를 즐겨 해방시켰다. 특히 가족의 숙련된 노예들일 경우 더욱 그러했는데, 이들은 주인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았고, 자유를 얻음으로써 생산적인 시민들이 될 수 있었다. 적지 않은 주인들이 기술을 가진 노예들을 고용한 뒤 수익금의 일부를 그들의 개인재산으로 주었다. 노예는 충분한 재산을 모으면 그 돈으로 자유를 살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동맹국

    동맹국들도 로마의 제국주의적 팽창의 결과로 발생한 정치 논쟁과 투쟁에 휘말린 집단이었다. 처음에는 특권과 의무의 정도가 각기 달랐던 동맹국들은 대체로 양 진영에 만족스럽게 처신했다. 그러나 로마가 팽창함에 따라 의무가 갈수록 부담스러워졌다. 

    포에니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인력을 상실했는데 로마인들은 다시 해외 전쟁터에 장기간 복무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피정복 국가들에게 부과된 전쟁 배상금과 조공이 로마로 들어갔기 때문에 로마는 갈수록 부유해지는 반면 동맹국들은 전쟁에서 거둔 이익중 극히 일부만 배당받았다. 로마가 이탈리아에서 점점 더 안전해지고 해외를 지배하는 데 익숙해지자 동맹국을 대하는 지도자들의 태도도 갈수록 고압적으로 변했다. 간단히 말해서 로마인들은 갈수록 동맹국들을 속주민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결국 동맹국들로 하여금 시민권을 요구하게 만들었고 로마인들이 이 당연한 요구를 거부했을 때 격렬한 반란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여권신장

    기원전 3~2세기에 지위가 향상된 집단의 하나는 상류층 여성들이었다. 이런 이유에는 로마가 방대한 제국을 건설해서 이용함에 따라 귀족들의 재산이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발생한 과부들이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다.

    상류층 여성들의 교육수준이 높아진 것도 그들의 독립성과 영향력에 이바지했다. 

    이렇게 교육을 받게 된 많은 여성들이 마치 18세기 프랑스 귀족여성들처럼 문인 서클을 후원하고 살롱을 운영했다.

    기원전 2세기 말에 크게 명성을 얻은 코르넬리아는 그러한 시대 여성들이 지닌 특성과 업적을 두루 갖추고 있다. 

     

     

    Cornelia, Mother of The Gracchi

     

     

    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이자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였고, 남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공직 경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원래 부자였지만 남편이 죽자 더욱 큰 부자가 되었다. 헬레니즘 사상을 받아들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좋은 교육을 받은 그녀는

    자녀들을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고, 문인과 철학자의 후원자로서도 이름을 날렸다. 그녀 자신이 남긴 세련된 편지들이 그녀의 사후에도 여러 세대에 걸쳐 읽혔다.

     

     

    정치발전

    원로원: 기원전 264~133년에 걸친 로마의 전쟁과 국토의 팽창은 원로원 귀족들의 권한을 신장하고 강화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직후에 켄투리아 회의 조직에 개혁조치가 취해졌다. 그것은 센서스에서 제2등급에 등록된 사람들에게 더 큰 권한을 주기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계층 사람들은 막대한 비용이 든 카르타고와의 전쟁에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 결과 일정한 정치적 이득을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 세기로 넘어가려는 시점에 추세는 공화정이 부유한 지주출신 원로원 의원들에 의해 더욱 장악되는 쪽으로 흘러갔다.

    그들은 경제적 이해관계가 일치했고, 막대한 부에 힘입어 민회들에거 자기들의 요구대로 움직일 충실한 피보호인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초기에는 대다수 사람들이 원로원 귀족들이 로마를 지배하는 것에 만족했다. 그들은 포에니 전쟁에 따른 위기에 지도력을 발휘했고 해외 팽창으로 국익을 신장시킴으로써 절대적 신망을 얻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전쟁과 영토확장으로 불거진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창조적 지도력을 필요로 했을 때 콘술출신 귀족들은 로마 전체의 복지 증진보다 거의 배타적인 계급이 되어 편협한 정쟁을 일삼는 일이 많게 된다.

    해외 팽창 결과 고위 정무권들의 수를 늘릴 필요가 커졌는데도 콘술의 수는 증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몇몇 유력가문들이 콘술직을 독점했다.

    그 결과 로마에는 대단히 위험한 정치 상황이 조성되었다. 외부로부터 도전을 받지 않은 채, 귀족들은 원로원 지배권과 고위관직, 군사적 승리를 가져다주는 글로리아(영광), 디그니타스(명예), 아우토리타스(권위)를 놓고 갈수록 치열한 내부 경쟁을 벌였다. 

     

     

     

     

    정치세력의 집단화 및 변화

    정치권력의 사회적 경제적 보상이 로마의 세력과 부와 함께 증가함에 따라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정치 행위를 지배해온 관습적 규칙을 어기려는 유혹도 증가했다. 공화정의 정치 형태를 보존하는 데 필요한 가치관과 행위가 점차 그 유혹 앞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공화정의 속주 통치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들 중에 하나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권한을 남용하는 총독들의 행위를 어떻게 통제한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원로원 동료들의 감시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으며, 속주안에서 최고의 법적, 군사적 권력을 행사했다. 

     

    공화정의 전체 행정 체제는 로마의 팽창에서 생긴 거대하고 급속한 변화에 대처하는 데 필요한 건실하고 장기적인 정책들을 등한히 하고 정치 투쟁을 강화하는 경향을 띠었다. 

    만약 원로원이 퉁분한 검토를 거쳐 계획을 입안하고 일관성있게 감독하는 통일된 기관이었다면 이 문제가 그처럼 심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로원은 고위 관직을 놓고 벌어진 파당주의와 개인적 경쟁에 의해 자주 사분오열되었으며 그렇게 승리한 후보자들이 원로원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수있는 신망을 얻곤했다.

    그러므로 공화국의 안녕보다 현실 정치가 원로원의 행동을 종종 좌우하게 되었다. 

    133~27년에 귀족들간의  정치 투쟁은 종종 불만을 가진 집단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로인하여 불만이 고조되어 정치 안정이 훼손되었다.

     

     

     

     

    출처>로마사 (프리츠 하이켈하임/세르릭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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